< 낭만필드 - 004 >
“팀이 나한테 이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요!!!"
"그래. 이러면 안 돼지."
"내가 아니었으면, 1부 리그 승격은커녕 3부 리그 강등을 걱정했어야 할 팀이라고요!!”
“그래, 알지. 내가 왜 모르겠니.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너한테 그러면 안 되지.”
지난 며칠의 괴로움을 술로 날려버리기 시작한 성배는 곧 알코올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감정을 표출했다.
며칠 동안 폐인처럼 방에 처박혀 지냈고, 사람 자체가 궁지에 몰려있다 보니 알코올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3년 전 시즌, 로얄 앤트워프는 무슨 마가 낀 것처럼 심한 부진에 빠졌고, 결국 강등 결정전 플레이오프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강등 결정전 플레이오프에서의 3부 리그 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겨우 2부 리그에 잔류했는데, 이 때, 마지막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었던 선수가 바로 성배였다.
“그 때는 무슨 클럽의 영웅처럼 대우해주던 사람들이라고요... 내가 잘 했을 때, 그러니까 5년 전에... 내가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던 사람들, 재계약 날 직접 우리 집에 나를 데리러 왔던 사람이 바로 그 단장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나한테 이래!! 나한테!!”
“주,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자네 얼굴을 아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로얄 앤트워프를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16년을 이 곳에서 뛰면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 로얄 앤트워프, 그리고 안트베르펀의 팬들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있다고 믿었고, 몇 년 전, 이적 제의를 모두 걷어차고 잔류했을 때 클럽과 팬들이 보내주었던 환호와 사랑은 진심으로 남기 잘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을 정도였다.
선수의 가치가 기량이라는 것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프로 스포츠 시장이 자본의 법칙에 지배당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과 로얄 앤트워프의 관계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도 특별하지 않았다.
“술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도 못 합니까!? 내가 뒤에서 겨우 이 정도의 섭섭한 점도 이야기 못 합니까? 내 꿈을 짓밟았으면!! 내 마지막 꿈을 짓밟았으면!! 이 정도 욕 하는 건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예?”
“허허... 많이 취했구나. 겨우 이 정도로... 너도 나이가 들기는 들었나보다. 네가 나이가 들었으니, 나도 참... 많이 늙었구나. 그리고... 그 사이에 이 바닥도 참 많이 바뀌었지.”
성배의 목소리는 헤르만의 만류에도 오히려 점점 더 커졌다.
성배가 헤르만을 아버지처럼 생각해왔던 것처럼 헤르만 역시 자신과 코드가 잘 맞고 성격이 비슷한 성배를 아들처럼 여겨왔었기 때문에 무너져버린 성배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좋고 항상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훈련장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이나 그라운드 위에서도 결코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법이 없었던 성배였다.
그런 성배가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탓인 것 같아 헤르만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으아아악!!”
“... 과거의 낭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내가, 내가 결국 네 꿈을 가로막았구나...”
성배는 결국 탁자 위로 무너져 내렸다.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그들 중 몇 명은 성배의 정체를 눈치 챘을 것이고, 얼마 뒤 성배의 은퇴 소식이 들리면 평소 얌전한 모범생 스타일로 유명했던 성배가 이렇게까지 괴로워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었다.
결국 무너진 성배를 지켜보는 헤르만은 착잡하고 미안한 기분 외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헤르만은 확실히 옛날 사람이었다.
40년 전, 이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헤르만은 시작부터 은퇴할 때까지 믿음, 의리, 신의와 같은 가치에 기본을 두고 일을 해왔다.
하지만, 헤르만은 이 세계의 흐름이 빠르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선택하지 않았고, 결국 말년의 계약들은 자잘한 실패들이 많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장 큰 실패는 성배의 재계약이 되었다.
***
-쿵!!
“악!! 아오, 아파라...”
헤르만과 헤어지고 어찌어찌 집까지는 돌아왔지만 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성배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바로 신발장에 무릎을 찧었고, 아프기는 해도 별 것 아닌 충격이었지만 앞으로 넘어졌다.
“에이, 빌어먹을!! 뭐,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어!!”
술 취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술에 취하면서 감정 조절도 제대로 안 되고 있었기 때문에 신발장을 걷어차려던 성배는 순간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선수생활을 이어오면서 그라운드나 훈련장이 아닌 공간에서는 발을 최대한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도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술에 취해도 그런 원칙만큼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빡!!
“젠장!!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미 은퇴를 결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발을 아끼고 있었다.
그것이 성배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 강제적으로 결정하게 된 은퇴. 성배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1부 리그에서... 1부 리그의 잔디를... 한 번이라도, 1분이라도 밟아보고 싶다는 내 꿈이... 내 꿈이 그렇게, 그렇게 큰 거냐!! 씨발...”
성배는 신발장을 걷어차고 혼자 신발장을 상대로 씩씩대다가 그냥 현관에 누워버렸다.
오른팔에 가려져 있던 성배의 눈에서 바닥으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술로 인해 고양된 감정과 며칠 동안 쌓였던 자괴감, 그리고 지난 가족이라 생각했던 클럽에 대한 배신감은 그 16년 동안 힘들게 버텨왔던 성배를 무너뜨렸다.
“한 번 쯤은... 겨우 1년, 아니 반 년!! 반 시즌이라도 나한테 시간을 줄 수 있었잖아... 은퇴가 재계약이냐!! 이적이냐고!! 꼭 이적시장에서 해야 되는 거 아니잖아!! 반 시즌 있다가, 한 경기라도 뛰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은퇴해도 되잖아... 응!! 내 말이 틀려!! 틀리냐고!!”
내일이면 아마 옆집에서 쳐들어올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거의 십중팔구 옆집 사람에게 욕을 들어먹겠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표출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혼자서 고래고래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러서라도 이 울분을 풀지 않으면 자신은 당장 오늘 밤에라도 일을 치를 지도 모를 것 같다는 직감이 성배를 감싸고 있었다.
“하, 하하... 신발도 안 벗고 내가 이러고 있었네... 미니나 엘라가 봤으면 한 마디 했겠어. 안 되지, 안 돼. 혼나면 안 되지.”
울다가 갑자기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배는 비틀거리면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바로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엎어져있는 액자를 집어든 성배는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한참동안 사진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엘리야... 엘리. 어떠니? 지금 잘 지내고 있니? 아빠는 말이다, 이제 인생의 두 번째 장을 시작하려고 한단다. 첫 번째 장이 제대로 완결이 나지 못하고 조기 종결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래도 두 번째 장을 잘 쓰고, 인생의 마지막 완결을 잘 내면 되는 거 아니겠니? 아빠 걱정은 하지 말고, 거기서 행복하게 지내렴.”
사진 속에는 두 명의 여성이 성배를 바라보면서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아직 학교에 들어갈 나이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여자 아이가 바로 성배의 딸이었다.
마치 직접 아이와 이야기하는 아버지처럼 속마음은 전부 다 안으로 삭히고 겉으로는 희망찬 이야기들을 내뱉는 성배는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딸,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일 것이었다.
“미니... 너도 좋아 보이네. 잘 살고 있지?”
3년 전에 이미 헤어졌지만 벨기에로 건너온 이후 성배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저런 힘든 일들을 많이 겪고도 겨우 자리를 잡은 이후 만난, 그렇게 10년을 이어가며 성배를 붙잡아주었던 한 명의 여자. 법적으로 가족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로 10년간 성배를 지탱해주었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옆에 없었다.
성배는 눈물로 인해 뿌옇게 변한 세상을 다시 선명하게 되돌리면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미친 짓인 줄은 알지만, 그리고 아마 내일 일어나서 가장 먼저 후회할 일인 것도 알지만, 지금은 그녀의, 자스민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여보세요?]
“아!! 미ㄴ... 아니, 자스민? 나야, 주.”
[알아. 무슨 일이야, 갑자기?]
헤어지고 나서 몇 번 연락을 주고받다가 끊은 뒤에 이렇게 연락을 한 것은 거의 2년 반 만이었다.
2년 반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전 애인의 연락이었으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자스민의 목소리가 살갑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아니, 뭐. 마땅히 이유는 없고!! 그냥... 그냥 자스민 목소리가 듣고 싶더라고...”
[술 취했어? 웬일이야. 최소한 술은 입에도 안 대던 사람이... 그나마 그 덕분에 50점은 넘었는데, 술까지 입에 댔으니 남편으로서는 이제 50점도 안 되겠네.]
“하하하!! 그런가? 아아, 미안, 미안...”
헤어졌고, 그렇게 좋은 이별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지기 전에 이별을 선택했기에 좋은 추억들은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성배에게 나눠줄 정이 남아있는 것인지 자스민은 성배를 타박하면서도 그 속에 성배에 대한 걱정을 담고 있었다.
“뭐... 그냥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했어. 잘 지내고 있지? 비밀인데, 가끔 영상 확인하거든. 잘 지내는 것 같더라. 다행이야.”
[그래. 1부 리그 승격했더라. 축하해.]
“...하하!! 고마워!! 내가 언젠가 그 팀도 1부 리그 갈 거라고 했잖아. 내가 맞았지?”
[그래. 내가 틀렸어. 축하해.]
더 좋은 조건과 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는 클럽으로의 이적을 계속해서 거절한 성배의 행동은 둘의 사이를 나빠지게 만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어쨌든 로얄 앤트워프의 승격은 성배가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고, 자스민도 그 부분에 대해 축하를 건네주었다.
[늦었으니까 다음에 연락하든지, 해. 졸리니까.]
“... 그래야겠지? 지금은... 너무 늦었지?”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자스민은 통화를 끊으려 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미 끝난 전 애인과의 통화가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었다.
내일이 되어 술기운을 잃으면 용기를 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는 성배는 조금 더 오래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자스민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통화를 이어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은 성배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사진만 쳐다보았다.
< 낭만필드 - 004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