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305)
오랜만에 대학교 동기들끼리 모여 술 한잔을 기울이던 도진은 술집 한구석 TV로 눈을 돌렸다.
음악 채널에서는 마침 은호와 은지의 ‘엔조이’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날 가지고 놀아 봐
그런 네 모습이 like
like a toy Like that toy
you like Like that toy
Enjoy the 그것처럼
은지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도진은 왠지 모를 욱신거림에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왜 그래?”
“조금 급하게 마셨나 봐.”
“……?”
도진이 술잔을 내려 두자, 도진의 지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인당 이제 반병쯤 마신 것 같은데.’
도진의 평균 주량을 생각하면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양이기 때문이었다.
“오. 이번에 이응이들 신곡 냈다며?”
“아, 응.”
“저거야?”
“그런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은데는 뭐냐? 너 NRY 엔터테인먼트로 옮긴 지가 언젠데. 하하.”
다른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는 친구 녀석을 쏘아보던 도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난 톡신 형님들 매니저거든. 저쪽은 현우 형님이 담당하고 계셔서 어깨너머로 아는 게 고작이야.”
“그래?”
TV 속에선 노래의 분위기가 바뀌고 은지가 목줄을 맨 채 화면을 붙든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Look at me
굴러가는 눈동자를 멈춰 봐 여길 봐
그래 봐 나를 봐 나만 봐 바라 봐
“야, 야, 전도진.”
“왜.”
도진은 욱신거리던 통증이 진정된 듯 다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친구의 부름에 행동을 멈췄다.
엔터 쪽에서 근무하지 않는 대학교 동기가 화면 속 은지를 가리키며 은근하게 물었다.
“쟤, 실물 이쁘냐?”
“…….”
도진은 마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화면 속 은지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또 한 번, 조금 전과 같은 통증이 뻐근하게 머물다 사라졌다.
“뭐, 얼굴은 이쁘던데…….”
도진은 은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도할 줄 알았는데 제 오빠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은근히 어리광이 많은 성격이 의외였었다.
“캬, 저런 여자랑 사귀는 놈은 무슨 복이냐?”
“그런가.”
“나도 너희처럼 엔터 쪽이나 들어갈까.”
“갑자기?”
“나도 연예인 한번 꼬셔 보게. 전도진, 아까 쟤 한번 나 소개해 줘 봐. ‘뻑’ 갈걸?”
생각 없는 친구의 킬킬거리는 저질 농담에 같은 일을 하는 도진의 친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도진도 못 말린다며 혀만 차고 넘어갈 일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친구의 농담에 여러모로 기분이 구렸다.
“그, 진심으로 니가 상판대기를 다 갈아엎어도 너랑 엮일 일은 절대 없을걸.”
“너무하네. 나 정도면 좀 생긴 편이거든.”
도진은 저질 농담을 한 친구를 대놓고 훑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건 어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X랄.”
“푸핫.”
그동안 도진의 말을 공감한다는 듯 같은 업계의 친구는 웃음을 터뜨리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마침 뮤직비디오가 끝나기 전 TV에 은호의 얼굴이 비쳤다.
도진은 이거다 싶었는지 TV를 검지로 가리키며 저질 농담을 한 친구에게 물었다.
“쟤 어떠냐?”
“뭐, 방금 남자?”
“어.”
“좀 생기긴 했는데, 내가 남자한텐 관심이 없어서.”
“그래. 네 눈에도 좀 생기긴 했다는 거지?”
“솔직히 저긴 다른 영역이잖아.”
“어. 근데 그 얼굴을 은지 씨는 ‘우럭’ 닮았다고 까거든. 그럼 넌 어떻게 보이겠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업계 친구가 안주를 집어 먹다 놀란 눈으로 물었다.
“진짜로? 이은호 솔직히 얼굴 배우급이지 않나?”
도진은 힐끔 저질 농담을 하던 녀석을 힐끔 보며 피식 웃었다.
“쟤는 은지 씨한테 한, ‘개불’쯤 되려나.”
“하하하하!”
“웃지 마, 새끼야.”
“싫은데.”
같은 계열에서 근무하던 친구가 크게 웃자 저질 친구는 미간을 구기며 짜증을 냈다.
하지만 경고조차 되지 못한 건지 업계 친구는 무시하며 계속 웃었다.
저질 친구는 속이 타는 듯 똥 씹은 얼굴로 맥주잔에 소주를 말며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쉴 틈 없이 술잔이 오가고, 2차로는 노래방에 가서 예X 마이스터 다섯 병을 비우고 헤어진 이후였다.
“……졸려.”
취기가 오를 만큼 오른 듯 도진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불안할 정도로 비틀거렸다.
잠시 후.
풀썩.
도진은 어지러운 몸을 주체하지 못한 듯 전봇대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몇 분이 흐른 뒤에서야 도진은 슬그머니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시 깨어난 도진은 왔던 길과 반대로 다시 차들이 다니는 도롯가 쪽으로 나왔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을 뒹굴 것 같던 취객이었던 도진은 잠깐 눈을 붙인 것만으로 술이 완전히 깨 버린 것처럼 평범한 걸음으로 바뀌었다.
도롯가로 나온 도진은 멀리 보이는 ‘빈 차’ 알림을 보며 손을 뻗었다.
잠시 후 택시가 도진의 앞에 멈춰 섰다.
“NRY 엔터테인먼트로 가 주세요.”
“예―. 음?”
택시 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도진을 봤다가 놀란 눈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요즘 애들은 컬러 렌즈인지 뭔지, 그게 유행인가 봐요?”
택시 창가 너머로 가로등 불빛이 넘어온 탓일까.
택시 기사의 물음에 도진은 대답 대신 샛노란 눈을 빛내며 웃었다.
“글쎄요. 유행이면 좋을 텐데…….”
* * *
저녁 시간이 가까워진 NRY 엔터테인먼트 사옥의 회의실.
긴 회의 끝에 짧은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전 그럼 잠시 ‘담탐’.”
“같이 가죠.”
성민과 기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창석이 눈치를 주며 경고했다.
“회사 앞에서 피지 마라. 거, 애초에 담배 피울 시간에 운동을 더―!”
“네!”
“넵.”
성민과 기훈은 흠칫거리며 슬그머니 도망치듯 사옥을 나갔다.
“저는 그럼 화장실 다녀올게요.”
이어서 보영과 소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 안에는 민지, 송주, 창석, 은지, 은호, 현우, 슬기가 남아 있었다.
드르륵.
그때였다.
이어서 은지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은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먼저 집에 갈래.”
은지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은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재미없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래도 우리 콘서트라니까. 뭐 얹을 건 있을 줄 알았지. 이러면 나는 하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은지가 입술을 비죽이며 시무룩해졌다.
오늘 회의는 곧 있을 은호와 은지의 콘서트 기획 회의였다.
현재 NRY 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팀장인 은호는 당연한 말이지만 회의에서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위치였고, 또 그만큼의 실적을 보여 주는 중이었다.
하지만 같은 멤버임에도 은지는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말 한마디 못 꺼낸 채 보영이 챙겨 준 아이스티만 쪽쪽 빨고 있었다.
「“이은지, 넌 뭐 더 하고 싶은 거나 했으면 하는 거 아이디어 있어?”」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 그, 그, 따, 딱히?”」
앞서 은호의 입에서 은지가 생각했던 부분은 모두 더 좋게 보완해서 나와 버렸다는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은지가 말했던 ‘이러면 나는 하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라는 부분은 말이 안 됐다.
은지는 현재 NRY 엔터테인먼트 내 최고의 인력 중 하나였다.
나오는 모든 작품이 은지에게서 나왔거나 은지의 손을 거쳐 편곡되고 있었으니까.
시무룩해진 은지를 지켜보던 창석은 못 말린다는 듯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은지야, 너는 이미 충분히 네 일을 하고 있고, 심지어 넘치게 잘하고 있어.”
은지는 창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머리 꼬여요, 대표님.”
“그래. 미안하다.”
“히히.”
창석의 손이 공중에 어색하게 떠올랐다.
예상을 빗나간 은지의 말에 당황한 창석은 곧장 손을 치워 내며 머쓱하게 웃었다.
은지 또한 진심은 아니었다.
그저 진지한 칭찬이 왠지 근질거려서 괜히 그런 장난스러운 말이 나와 버렸다.
창석의 위로가 나름 도움이 된 건지, 은지는 시무룩하던 조금 전과 달리 당당하게 회의실 문 앞으로 향하며 인사했다.
“그럼 난 갈게. 내가 좋아할 만한 무대로 잘 준비해 주고 나중에 이야기도 해 줘.”
“어.”
“수고~.”
은지가 손을 흔들자, 은호는 안 보는 척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가볍게 인사했다.
은호는 휴대폰 액정을 켜며 시간을 확인하더니 기지개를 켜며 팔짱을 꼈다.
이후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너 또 잠 제대로 안 잤구나.”
“자긴 잤어요.”
창석의 못마땅한 목소리에 은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은지도 이제 다시 활동하는데…….”
“괜찮다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는 한동안 활동도 힘드니까. 원 없이 즐기려고 하는 거예요, 다.”
은호가 웃으며 답하자 창석의 수심은 오히려 더 깊어진 듯 보였다.
그때, 은호는 민지와 송주에게 잠깐 나가 줄 수 있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후 현우와 슬기도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면서 회의실에는 창석과 은호 단둘만 남은 상황이 됐다.
“대표님.”
“그래.”
“대표님은 아시잖아요. 제가 은지보다 더 잘하려고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알다마다.
최근 은호는 노래뿐만 아닌 자리를 잡은 모든 분야에서 빛나고 있었다.
‘같이 쫌 살자’에서 에이슬과 시우가 빠진 뒤 은지까지 휴가로 빠지게 됐었다.
유 PD는 줄어든 인원을 게스트로 채워 넣으며 새로운 재미를 부여했고, 그러면서 자연히 은호는 본의 아니게 인맥의 폭도 넓어지게 됐고, 그 외에도 MC를 맡은 석현의 아래에서 보조 MC의 역할까지 맡으며 은호의 말주변이나 예능 감각도 눈에 띄게 상승하고 있었다.
덕분인지 은호는 최근 행사에서 노래뿐만 아니라 MC로서도 자리를 잡은 참이었다.
거기다…….
창석은 눈앞에 놓인 한 기사에 눈을 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깔끔, 모던함의 이상향으로 패션계에서 이은호를 주목하고 있다. 이은호는 현재 ‘E―UNG’ 남매 아이돌로 활동 중인 NRY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최근 ‘fragrance’라는 명품 브랜드의 글로벌 앰배서더로 …….》
이런 기사가 나오게 된 계기는 창석의 어머니, 심순자 때문이었다.
‘프라그란스’만 생각하면 창석은 한숨이 먼저 나왔다.
‘엄마도 참…….’
‘프라그란스’의 대표 디자이너가 바로 창석의 어머니이신 심순자 여사였기 때문이다.
심순자는 최근 세계에서 극찬받는 디자인을 연속으로 뽑아냈다.
거기까지는 은호와 은지가 엮일 일이 없었다.
애초에 창석은 은호와 은지를 해외로 보낼 생각도 없었으니까.
‘얘들을 해외에?’
내수만 해도 걱정으로 머리가 빠질 지경인데, 외국으로 풀었다간 농담 하나 없이 진심으로 머리털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그랬는데…….
「“최근 프라그란스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디자이너 심만의 이런 특별한 디자인은 어디서 얻게 된 건가요?”」
「“후후. 내 아들이 양녀와 양자를 들이게 됐는데, 그 두 아이가 제게 보물과 같은 영감을 준 존재죠.”」
「“즉, 손자가 디자이너 심의 ‘뮤즈’라는 말씀이신 거네요?”」
「“맞아요. 정말, 아주 멋진(gorgeous)한 아이들이랍니다.”」
심순자가 한 해외 매체 인터뷰를 통해 직접적으로 ‘뮤즈’라며 손자의 존재를 밝히면서 일이 커지게 됐다.
「국가의 위상을 세계로 끌어올린 ‘디자이너 심’의 아들이 NRY 엔터테인먼트 대표?」
「알고 보니 디자이너 심의 ‘뮤즈’라는 손자의 정체는 NRY 엔터테인먼트 대표 박창석의 양자이자 소속 아티스트 ‘E―UNG’ 남매라고 밝혀져……」
창석은 은호의 선택을 말릴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품 안에서 둘이 함께 있을 것 같은 녀석들이었는데…….’
은지는 ‘E―UNG’으로의 활동을 제외하면 앞으로 활동의 폭을 줄이고 작곡에 더 임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혀 왔다.
하지만 은호는 달랐다.
은호는 이번 정식 앨범 활동의 마지막인 콘서트가 끝난 뒤 잠시 ‘E―UNG’으로의 활동을 접고 해외로 떠날 예정이다.
‘더 큰 무대를 위해서.’
본래 떠날 생각이 없었던 은호였으나, 그런 은호를 설득한 건 다름 아닌 은지였다.
‘은지도 결심한 이상 나도 아버지로서 응원해 줘야 하는 일인데…….’
왜 이리 가슴 한편이 갑갑한지.
은호는 눈을 또렷하게 반짝이며 창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석은 그렇게 자신을 보는 은호를 눈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생해 왔으니까 이젠 나아가야지.”
세상에 서로밖에 없던 남매는 수많은 일을 겪으며 이제 각자의 세상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