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303화 (303/309)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303)

익숙한 시선이었다.

악연이 맺어졌던 시기.

누이를 아꼈던 사내의 살의가 어린 시선.

전생의 이은호를 죽일 땐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 눈을 만만히 봤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달랐다.

무시했던 그 일로 인해 수천 년간 세상에 묶였던 경험을 했으니까.

‘……도망쳐야 한다.’

본능에 가까웠다.

왜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세월로 쌓아 온 본능이었다.

여기서 은호에게 걸렸다간 은지에게 큰 피해가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훔친 모자를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은호 녀석이 나를 알아볼 수 없도록 난 모자를 최대한 깊이 눌러쓰며 다급하게 얼굴부터 숨겼다.

겉으로 보기엔 나 역시 사람과 흡사하게 보일 테니까.

‘검은 혀’와 ‘노란 눈’을 가진 인간.

적어도 수천 년간 이 땅에서 내가 만난 인간 중에선 없었다.

최대한 태연한 척.

나는 자리를 벗어났다.

“거봐, 좀 조심하라니까.”

은호는 그동안 은지에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나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여간 독한 놈.’

문밖을 나선 이후엔 곧바로 촬영장 바깥으로 달렸다.

그 순간 뒤에서 은호와 왠지 익숙한 다른 남자가 함께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달리던 중 많은 사람을 지나쳤다.

‘클라우드’였던가?

은지와 함께 무대에 올라 춤추는 동료들이었다.

이들은 분명 바로 옆을 지나갔을 때 눈치채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심지어는 몸을 통과하며 지나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은호가 나를 알아본 이후부터 무언가 이상하다.

내가 지나치자, 그들의 시선이 나를 쫓는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대놓고 그 자리에서 고양이로 변해 옷을 문 채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헥, 헥…….’

콜록.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촬영장의 뒷산 중턱까지 오고 나서야 겨우 달리는 것을 멈췄다.

아마 이쯤 되면 내가 지나갔다는 것도 잊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다시 편하게 모습을 바꿨다.

입을 옷은 없지만, 어차피 이 산골까지는 아무도 안 올 테니까.

혹시 문제가 생긴 곳이 있나 살펴볼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지금까지와 달랐던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됐다.

정확하게는 또 한 번의 1년이 흐르고 비슷한 시기를 지나치고 난 뒤였다.

* * *

선택

“어…….”

“…….”

연탄과 도진은 서로를 마주 보고 멈춰 섰다.

도진은 단순히 낯선 생김새에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반면 도진을 보고 있는 연탄의 노란 눈동자에는 격한 지진이 일었다.

“저…….”

도진이 입을 열자, 연탄은 촬영장에서처럼 뒤를 돌아 바쁘게 달려갔다.

도진은 연탄이 떠난 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코스프레……?”

급하게 도망친 연탄은 골목을 돌아 벽에 등을 딱 붙이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연탄의 머리 위로 수천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왜? 왜지? 뭐야? 저거 누군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진은 은호와 은지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연탄은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곰곰이 지금까지의 시간을 떠올리다 보니 우연히 떠오른 순간이 있다.

‘촬영장.’

그때 ‘그―도진―’를 처음 봤었다.

그리고 은호를 포함한 많은 사람과 접촉이 생기게 됐다.

「“야, 연탄. 너 혹시 저주 뮤비 촬영장에 온 적 있냐?”」

「“그게 뭔데, 밖에 있는 거라면 나간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야.”」

「“하긴.”」

촬영이 끝나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은호가 물었었다.

당시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던 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냥 지나칠 대화가 아닌 것이다.

인연의 힘은 강하다.

시간이 정해 둔 힘도 강하다.

아무리 신이라 한들, 때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다.

원래의 계획은 인과율에 은호를 내어 주고 비어 버린 시간을 맞추려고 했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래.

은지 대신 은호를 죽이려고 은호를 끌고 왔다.

‘은호라면 동생을 위해 기꺼이 죽어 주지 않을까 싶어서.’

본디 선한 신과 악신은 사람에 따라 다르듯 나 역시 그러했다.

내가 지키고 싶어진 그 존재만 계속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그 외에는 누가 죽든지, 나와는 관계가 없었다.

‘게다가 둘은 본래 하나였으니까. 괜찮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은지와 지내며 깨달았다.

겉으로 사이가 나쁜 듯 보이지만 은호가 그렇듯 은지 또한 그랬다.

‘세상에 하나 남은 서로를 위해서라면 희생할 수 있다.’

은호와 은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에게 치르는 희생은 또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무엇 하나 빼앗기기 싫어서 투덕거리던 둘이 말이다.

은지는 항상 ‘가족’을 원했다.

그건 전생의 은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날 때부터 부모의 복을 가지지 못한 아이.

너무 외로운 나머지 제 영혼을 둘로 나누어 제 몸 같은 또 다른 존재를 만든 아이.

하지만 둘로 나뉜 영혼은 서로의 시간을 거치며 각각의 개체가 되었다.

그로 인한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은호는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각인되는 일들을 사랑한다.

한편, 은지는 비어 버린 자신의 절반을 음악으로, 사람으로 채워 공허함을 달래려 한다.

은지는 낯선 사람에게 새로운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다.

내가 처음으로 은지의 마중을 나갔던 그날.

은지의 어설픈 노력이 무색하게도 처음 ‘이별’을 겪고 돌아온 날.

어둑한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오던 은지는 외로움에 지친 듯 공허한 눈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였던 것 같다.

한지에 먹물이 스며들며 번져 가듯.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감정은 이미 은지의 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연탄이?”」

나를 보자, 은지의 공허하던 그 눈에 생기가 단숨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은지의 그 맑은 눈이 나를 보며 반짝였을 때 깨달았다.

은호를 죽였다간 시간을 거스르기 전 은호처럼 은지가 그렇게 될 것이다.

조금 전에 마주했던 은지의 공허한 얼굴은 그때의 맛보기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두 번 다시 그 공허한.

지쳐 버린 은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희생을 결심했다.

그리고 희생했다.

내가 희생함으로 인해, 시간을 건드린 죄는 끝났다.

적어도 이제 은지는 안전해졌다.

‘아.’

머리가 빠르게 굴러간다.

신은 전지전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지전능하기에 그들은 열등한 존재인 자신이 시간이라는 귀한 재산을 훔치리라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것도 내 발로 ‘나 여기 있소’라고 하기 전까진 발견조차 못 했다.

아니, 애초에 발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이 ‘시간’에서 나가면?’

“하하.”

연탄은 입 밖으로 소리 내 웃었다.

“탈출…….”

연탄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하지만 소리는 금세 모습을 감췄다.

탈출을 떠올린 건 좋았다.

이젠 그 방법이 문제였다.

‘은호가 나를 발견했던 것.’

그때의 조건이 필요했다.

그건 내가 이곳에 갇히기 전부터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곧 이 ‘시간’을 벗어났다는 뜻이니까.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신의 구역에서 시간도 훔친 이 내가 뭔들 못 훔칠까.’

그렇게 생각한 그 순간.

머리에 스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 무형의 존재로 이 시간에 갇혔다. 그 말은…….’

몸을 얻으면……?

다만, ‘아무나’의 몸을 얻을 수는 없다.

자아가 강한 사람이라면 반대로 내 자아가 집어삼켜 질 수도 있다.

거기다 도리어 내가 소멸할 수도 있다.

이건 도박이었기에 신중해야 했다.

기왕이면 은지와 인연이 있고 감각도 예민한…….

‘아.’

연탄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말려 올라갔다.

함께 지낸 시간 동안 닮기라도 한 건지, 은호와 은지의 미소와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 * *

콘서트가 있고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온 날이었다.

흩날리는 벚꽃길을 분위기 하나 없이 터덜터덜 걸어 오랜만에 1층이 아닌 배진수 작곡가의 작업실에 모인 날.

“너 진짜 괜찮은 거 맞냐?”

“…….”

“야! 호박 대가리!”

“…….”

“야, 돼지야.”

“…….”

“이은지!”

“…….”

“은지야.”

“어? 어? 왜?”

은호는 황당한 한숨을 흘렸다.

“왜 같은 소리 하고 있다…….”

한편, 은지는 대답한 이후에도 허공을 보며 눈이 풀려 있었다.

이런 상태가 현재 몇 달째다.

‘방에만 박혀서 작곡만 하던 때보다야 낫다지만…….’

왜 저러는지 이유라도 알면 속이라도 편하겠건만, 이유를 모르니 더 답답했다.

다행이라면 은지의 상태가 항상 이렇지는 않았다.

주변이 고요할 때나 혼자 있을 때.

특히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지도, 키운 적도 없는데 들여놓은 캣 타워를 보고 있을 때면 더 그랬다.

「“버려라. 좀, 방도 좁은 데 그걸 왜 꾸역꾸역 들고 있냐.”」

「“닥쳐!”」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던 건 그때였다.

은지는 욕을 하다 말고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또르륵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아, 이 X발. 갑자기 눈물은 왜 나오고 X랄이야. 이, X발, X신같이……, X발! 뭘 봐! 내 방 신경 끄고 니 방이나 가―!!!”」

이후에 말하는 꼬락서니는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크게 멀었지만.

은호가 은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녹음실 문을 열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어쩐지 못 본 사이에 머리가 많이 길어진 배진수 작곡가였다.

“시작할까?”

“네.”

“아…… 오셨어요.”

은지의 애써 밝아 보이는 인사에 배진수 작곡가도 걱정스럽게 은지를 바라봤다.

하지만 특별히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NRY 엔터테인먼트 안에서 은지에게 ‘정신 차려!’라든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건 은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은지의 상태가 나빠지면서 E―UNG의 정식 앨범 발매는 밀려 버렸다.

하지만 은지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은지는 휴가 기간에 대뜸 30곡가량의 가이드를 가지고 왔다.

거기서 술판인지 회의인지 모를 시간을 거쳐, 톡신의 신곡 ‘색체’와 화랑의 신곡 ‘엘리스’가 뽑혔다.

거기다 ‘색체’와 ‘엘리스’는 당당하게 1위를 한 데 이어 활동 날짜가 달랐음에도 약 2주간 1위 후보에서 서로 맞붙을 정도로 성공적인 결과를 보였다.

최근 은호 또한 은지가 손댄 곡으로 정신이 없었다.

홀로 있는 동안 은지는 귀와 손이 심심했는지 창석의 결혼식 날 불렀던 ‘좋은 날’을 꼼지락거리며 다듬었다.

그저 심심풀이였을 뿐, 딱히 본격적인 발매를 위한 작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은지가 만진 곡을 빠짐없이 들어 보는 은호에게 그건 마침 비는 일정에 채워 넣을 최고의 아이템이었다.

「“대표님, 은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은데, 저 이걸로 활동 한 번 더 이어서 가면 어떨까요?”」

「“너 혼자? 괜찮겠냐. 요즘 은지가 쉰다고 네가 너무 무리―.”」

「“무리는 아니에요. 그리고 공백은 짧을수록 좋잖아요.”」

「“그래도 은호야.”」

「“정말로, 괜찮아요. 저. 오히려 지금처럼 할 수 있을 때 많이 노래하고 싶어요.”」

무리하는 은호를 생각하면 반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좋은 날’을 발매하고 싶다는 은호의 아이디어는 창석도 환영이었다.

‘좋은 날’은 결혼식에서만 쓰이고 버려지기엔 아쉬운 곡이었으니까.

그리고 은호의 디지털 앨범 솔로 곡.

‘좋은 날’이 추가로 발매됐다.

‘좋은 날’은 창석의 결혼식으로 먼저 화제가 됐던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았다.

마침 축가로 탄생했던 곡이기 때문일까.

은호의 솔로 곡 ‘좋은 날’이 발매된 직후.

최근 진행되는 결혼식에는 유행처럼 ‘좋은 날’을 불러 줘야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축가 가수로 은호를 부르는 일 또한 적지 않아, 밀려 들어오는 결혼식 축가 일정에 정신없이 불려 다니기 바빴다.

그건 오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은호는 조금 있다가 스케줄 있다고 했었지?”

“네. 오늘도 축가 공연이 네 군데 잡혀서 전국 투어 돌아야 할 판이에요.”

은호는 배진수 작곡가의 질문에 은지를 힐끔 돌아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또 작업실에 박혀 있을 은지가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한편, 그런 은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지는 태연하게 녹음실 문을 열며 은호를 돌아봤다.

“일정 소화하려면 가이드는 다 따 줘야 하니까. 얼른 들어가.”

“그래.”

“오랜만에 놀아 보자.”

은지가 활짝 웃었다.

응원과 동시에 이번에 녹음할 곡의 제목을 섞은 농담에 은호도 은지를 따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이 호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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