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301)
“…….”
검은색.
무언가 번쩍 떠올랐다가 신기루처럼 증발해 버렸다.
은지는 어쩐지 갑갑한 기분이 들었지만, 고민을 길게 하는 타입은 아니라 그런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발을 옮겼다.
슬리퍼를 끌고 1층으로 내려온 뒤, 녹음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공기에 답답한 숨통이 잠시나마 트이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작업해야지.”
오래 미뤘다.
이유 모를 감정으로 정식 앨범을 미뤘으나 더 미룰 수는 없었다.
빈틈을 메우기 위해 혼자 활동하는 은호에게도, 또 앨범 소식에 기대하며 기다린다던 E%에게도 미안한 일이니까.
“아자!”
은지는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에서 기지개를 켜며 시원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은지의 눈에 한결 생기가 맴돌았다.
으득거리며 손을 푼 후 컴퓨터를 켜고 작업 준비를 끝마친 은지는 곧장 작업에 들어갔다.
스튜디오가 있는 1층에는 은지 혼자였다.
한창 작업을 이어 가던 중, 은지는 힐끔 녹음실 안을 바라봤다.
‘방금, 뭔가…….’
무언가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막상 고개를 들어 녹음실 안을 보자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귀신?’
스스로 떠올린 단어에 은지는 흠칫 긴장하며 떨리는 시선을 화면에 고정했다.
하지만 계속 느껴지는 인기척에 자꾸만 창 너머로 눈이 갔다.
툭.
그 순간, 녹음실 안에 걸려 있던 헤드셋이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졌다.
절대 떨어질 리 없는.
잘 걸려 있던 헤드셋이.
‘……!’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순간 겁에 질린 은지는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허공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단전에 힘을 모아 소리쳤다.
“이 X발 X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X랄 하지 말고 안 꺼져!!!”
은지는 그렇게 한바탕 쌍욕을 하고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그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작업하는 내내 느껴지던 찝찝한 인기척이 쌍욕 이후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흠흠.”
거슬렸던 부분을 다듬은 은지는 뿌듯하게 웃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
숍에서 메이크업을 받던 은호는 익숙한 진동음에 현우를 불렀다.
“형, 내 휴대폰 좀.”
“아, 네 거였어?”
현우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전화 누구예요?”
은호의 물음에 뒤늦게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현우는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빡……대가리라는데……?”
“아, 주세요.”
현우에게 휴대폰을 건네받은 은호는 엄지로 수화기 버튼을 밀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은지, 왜.”
“하하하하하.”
은호의 인사에 ‘설마 했는데, 진짜 은지를 그렇게 저장해 놨냐’라며 숍 사람들에게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어디야?
“어디긴 숍이지.”
―아, 오늘 행사 있다고 했었지.
“어. 왜 전화했는데.”
은호가 물은 그때, 은지는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맞아. 오빠, 오빠! 나 방금 퇴마했다! 내가―.
뚝.
은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곧장 전화를 끊었다.
숍에 있던 스태프들과 현우와 슬기는 ‘무슨 이야기였어?’라는 궁금한 얼굴로 은호를 바라봤다.
“은지가 좀 취했나 봐요.”
“응?”
저녁이 다 돼 가는 시간이긴 하지만, 은지가 혼자 술을 마셨다고?
스태프들은 가볍게 웃고 넘어갔지만, 은지를 잘 아는 슬기와 현우는 오히려 의문만 더 늘었던 그때였다.
은호의 휴대폰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빡대가리]
은지에게 또 전화가 왔다.
은호는 앞날을 예상한 듯 전화를 받는 즉시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왜 끊어!!! 아쒸, 난 끊긴 줄도 모르고 계속…….
예상 그대로였다.
스피커폰을 해 뒀나 착각할 정도로 엄청난 소리였다.
큰 목소리가 줄어들고 나서야 은호는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그때 막 헤드셋이 떨어진 거야. 그래서 내가 녹음실 쪽 보면서 이 X발 X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X랄 하지 말라고 소리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은지가 신나게 떠드는 와중에 은호는 또 전화를 끊었다.
“푸하.”
“하하하!”
이번엔 은호의 얼굴에 대놓고 귀찮다는 기분이 드러난 탓일까.
상황을 지켜보던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후엔 은지도 삐친 건지 더 전화가 오는 일은 없었다.
메이크업을 끝마친 은호는 짧은 감사 인사를 한 후 곧장 차로 향했다.
메이크업이 망가질까,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채 잠시 눈을 붙였다.
짧은 꿈을 꿨다.
왕벚나무 아래 술을 마시고 있는 자신을 보는 그런 꿈이었다.
시작은 왠지 슬픈 기분이 들던 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어떤 꿈을 꿨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눈을 떴을 땐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은호야, 내리자.”
“네, 형.”
현우의 이야기에 은호는 물을 머금고 차에서 내렸다.
곧 노래하기 위한 준비 중 하나였다.
“이쪽인가?”
은호는 현우의 불안한 안내를 받으며 행사장으로 향했다.
“아, 은호야. 미안하다. 완전히 반대였네.”
“형. 믿었는데.”
“미안, 나도 이 동네는 처음이라…….”
“하하. 됐어. 얼른 가요.”
평소 실수가 적은 현우의 몇 없는 귀한 실수에 은호가 웃으며 현우를 놀렸다.
이후에는 오늘 올라갈 예정이었던 무대로 곧장 도착할 수 있었다.
스태프를 기다리는 동안 은호는 힐끔 고개를 빼고 무대 너머를 봤다.
행사장에서 자주 본 익숙한 얼굴들도 몇몇 보이는 걸 보아하니 E%들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이쪽에 계셨었네요!”
오늘 무대의 스태프인지, 그는 다급하게 은호와 현우를 알아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이후에는 곧 오를 무대의 순서 외에도 여러 가지를 정리하기 위해 짧은 회의를 거쳤다.
항상 같이 섰던 무대였기 때문일까.
은호는 최근 혼자 활동하면서 무대에 오를 때면 은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떠오르곤 했다.
그때마다 갑자기 우울해졌던 은지의 모습에 걱정이 많았는데, 오늘은 다행이랄지. 황당했던 은지와의 통화가 먼저 떠올라서 웃음이 샜다.
‘퇴마네 뭐니.’
솔직히 은지의 헛소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듣기 힘들었던 밝은 은지의 목소리만큼은 굉장히 반가웠다.
한결 걱정이 덜어진 덕분일까.
오늘은 집중을 위해 시간이 꽤 필요했던 평소와 달리 무대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표정이 밝네?”
“그래 보여?”
“응. 평소 살벌한 얼굴보다는 보기 좋네. 잘하고 와.”
“예썰.”
현우의 진심 어린 응원에 은호는 장난스럽게 경례하며 무대에 오르는 계단 앞에 섰다.
시간이 됐다는 듯 사회자가 내려가고 스피커를 통해 은지가 준 ‘Perfect me’의 베이스 간주가 흘러나왔다.
♩♩♩♪♪
은호는 이어진 드럼의 박자에 따라 심호흡을 하며 마이크를 들었다.
* * *
‘뭐지…….’
여자는 오늘따라 북적거리는 공원을 불편한 시선으로 돌아보며 한숨을 흘렸다.
하필이면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던 오늘따라 평소 보기 힘든 수많은 인파가 집 앞 공원에 모여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며 가려던 편의점으로 마저 향했다.
“오랜만에 왔네? 어디 갔었어?”
“아뇨. 그냥……. 최근 며칠 아파서.”
“어머, 그랬어?”
여자는 쓸쓸하게 웃으며 맥주 캔 네 개와 안줏거리로 소시지 하나를 챙겨 계산대로 돌아왔다.
“오늘 여기 뭐 있대요?”
“응? 아.”
편의점 직원은 그녀의 질문에 편의점 창밖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제 저기 중앙에 무대 만들던데, 오늘 뭐 행사 있다더라고.”
“행사요?”
“그런 거 있잖아. 시에서 주최하는 뭐 문화 공연이랬던가?”
“아아.”
여자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원을 가로지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직원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제야 동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보였다.
거기다 다는 아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응원봉 같은 것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응원봉의 모양이 특이해서 더 눈길이 갔다.
‘이웅?’
응원봉에 쓰인 영어를 보며 마지막 뒤집힌 ‘G’에 이질감을 느끼던 그때였다.
‘아.’
그녀는 뒤늦게 응원봉 전체 모양이 ‘이응’ 모양인 걸 깨달았다.
‘그 남매 그룹인지 걔들 팬인가 보네.’
‘이응’ 그룹에 대해선 알고 있다.
워낙 눈길을 끌 과거사 때문에 한동안 인터넷이 떠들썩할 정도로 유명했었다.
하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 취향이 아니라서 일부러 그 그룹의 노래를 직접 찾아서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구경…… 해 보고 올까.”
딱히 돈이 드는 것도 아니겠다.
우울한 기분도 떨칠 겸 겸사겸사.
그녀는 무대 정 반대편에 있는 입구에 다다라서야 다시 발길을 공원 안으로 돌렸다.
한 걸음 뒤늦게 무대 근처에 도착했을 때, 여유롭게 걸었던 건지 노래는 이미 시작한 후였다.
다들 ‘데이’만 되면 모두
나만 빼고 데이트를 해
행복해 보여서 그땐
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
은호의 노랫소리를 들은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슴에 콱 박혀 오는 가사 때문이었다.
그게 나는 맞는 건 줄만
그런 줄만 알았어
친구들이 하나씩 연애를 하며 떠나가니 마음이 촉박해져 가던 시기.
닭 털을 날리며 연인을 자랑하는 친구들의 SNS를 보며 나도 그렇게 살아야만 ‘정상’이 될 것 같았었다.
그래서 소개팅을 받고 만나기 시작했던 남자였다.
소개팅 날짜는 2월 14일.
연인들이 열렬하게 사랑을 표하는 밸런타인데이였다.
그렇게 인연이 닿아 사귀기 시작했던 그녀와 그녀의 남자 친구는 2년이 지난 올해 2월 14일.
많은 커플이 행복한 시기에 그녀는 남자 친구에게 이별 선고를 받았다.
잘 지내니 인사 보내기 and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내 감정이
나도 알아 끝났다는 거
기대한 원 플러스 원
은호가 부르는 ‘Perfect me’는 은지가 작사했던 시점의 느낌과 비슷하지만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벗, 기대만큼 좋지 않던 그 이별
봐, 이 꺼져가는 폰
봐, 내 폰 배터리도 네 사랑보단 오래 가
은지가 지었던 가사는 이별에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은지만의 성격이 짙게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은호가 부르는 ‘Perfect me’는 달랐다.
그날, 가지 말라 너를 붙잡아도
그날, 뿌리치던 낯설었던 네 손
넌 어떠니 연락하고 싶지만
인사 한 번 건네기엔
나도 알아 못났다는 거
사랑했단 말은 않을래
이젠
네가 아닌 날 더
사랑하게 됐으니
은호의 가사는 ‘앞으로 나아가겠다’라는 다짐과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그녀가 겪은 이별의 이유는 ‘널 보면 더는 여자 같지 않다.’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언제는 편해서 좋다던 사람이…….’
그 ‘편함’을 오히려 이별의 이유로 붙이니, 그녀로서는 황당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설레게 만들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헤어진 연인으로 인해 자신을 미워하게 된 그녀에게 있어 은호의 노래는 왠지 모를 위로로 다가왔다.
엇박과 정박을 오가는 리드미컬한 R&B 발라드를 부르던 그는 마치 음을 가지고 놀듯 여유롭게 클라이맥스까지 고음을 끌어 올렸다.
이제 와
미안해라는 말은 말아
네가 없는 나 이제야 완벽하니
너 없이도 잘난 지금 내가 나기에
시원한 진성의 고음은 마치 더운 사막에 갑자기 나타난 시원한 바다처럼 개운한 해방감을 몰려오게 했다.
그녀는 뒤늦게서야 무대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무대 가까이 향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그는 지켜보는 사람마저도 따라서 미소가 지어질 만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