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88)
“…….”
비록 피가 섞인 부모는 아니지만 기른 부모 역시 부모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픈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려니, 창석은 속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한 번쯤 직접 이야기해 주고 싶었는데…….”
깨어 있을 땐 괜스레 민망해서 단 한 번도 직접 해 주지는 못했던 말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아픈 모습을 보니, 새삼 그게 후회가 돼서.
창석은 어색한 낯선 기분을 이겨 내며 입을 열었다.
“아들아. 내 아들.”
창석의 투박한 손이 은호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시원해진 머리가 편안했던 걸까.
통증이라도 느끼듯, 그사이 다시 미간에 자리 잡았던 은호의 주름이 점점 흐려졌다.
“너희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돼도, 넌 내 아들이고, 은지는 내 딸이야. 나한테 아이가 생겨도, 이건 여전할 거야.”
어느새 평온한 얼굴이 된 은호를 보며 창석은 안심한 듯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은호와 은지는 또래 아이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아이들이었기에 마음의 병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쯤도 알고 있었다.
창석은 그런 은호와 은지의 후견인을 자처할 때 생각했다.
은호와 은지에게 진짜 ‘부모’가 되어 주겠다고.
불쌍하다고 뭐든 들어주지도 않고.
반대로 방치하지도 않고.
정말 부모님처럼 창석은 은호와 은지를 항상 진심으로 대하겠다고.
하지만 그런 창석조차도 둘만의 세계에 발 하나 담그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때에 자신보다, 그 어떤 약보다 도움 되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창석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대―.”
“은지야, 지금 병원으로 다시 좀 와라.”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창석은 은지에게 본론을 말했다.
“……이은호한테 무슨 일 있어요?”
창석의 이야기에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한 건지, 은지는 평소와 달리 장난기가 전혀 없이 물었다.
“은호가 병원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지, PTSD 반응을 보인다는구나.”
“혹시 트라우마 같은 거예요? 그 PTSD라는 거.”
“그래.”
“…….”
상황을 전해 들은 은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창석은 뭔가 있어 보이는 은지의 반응에 조금 더 깊이 캐물을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은지 성격상, 이야기를 할 것이었다면 진작 말을 꺼냈을 성격이라는 걸 알기에 창석은 말을 아꼈다.
“도진이 이제 회사로 돌아올 시간이니까 도진이랑 같이 와.”
“네. 금방 갈게요.”
전화 너머, 은지는 흔들림 하나 없는 덤덤한 대답을 했다.
은지의 답을 듣자, 창석은 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은호와 은지는 항상 쥐어뜯고 물어뜯을 듯 싸워도 가족이었다.
세상에 단둘밖에 없는.
* * *
꿈은 은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술에 찌들었던 내 모습을 비췄다.
은지와 따로 살기로 한 이후, 홀로 이사 온 전망이 환상적이었던 아파트.
하지만 좋은 전망이 무색하게 창가는 항상 암막 커튼을 쳐 놔서 아침인지 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도진이 형이 말리던 내 모습.
그렇게 죽기 직전까지 술만 마시다 엉엉 울고 쓰러지기를 반복한 뒤, 정신을 차린다.
이후 대표님에게 살려 달라며 소리치는 나.
그때의 모습을 지금의 내가 다시 보는 그 기분은…….
‘X나 쪽팔려…….’
끝까지 보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정말 간절했기에 내 모습이 어떤지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보려니 수치스러워서 미쳐 버릴 것 같다.
‘후…….’
심호흡하는데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꿈속임에도 선명할 정도로 얼굴이 익을 것 같았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렇게 1년.
은지가 떠난 1년이 흘렀다.
익숙한 풍경이 나타난다.
경기도의 한 수목원.
은지는 왕벚나무에 수목장을 치렀다.
은지를 보낸 지 1년이 되던 해.
은지를 보낼 때처럼 벚나무는 마침 활짝 피어 있었다.
나는 술이 약하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술이 고팠다.
수목원의 풍경을 안주 삼아 술을 홀짝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취해 버렸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지금까진 회귀를 겪기 전의 내 경험과 기억들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내 방에서 눈을 뜬 이후 여전히 또렷한 지난날이 이어졌다.
연탄이 녀석이 했던 말이 있다.
‘넌 누구 덕분에 그냥 얻어걸린 거니까 새 인생이나 즐기셔.’
흘러가는 시간을 다시금 눈으로 바라보며 그 말을 다시 떠올리자, 문득 난 지금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은 끝없이 이어진 어두운 터널과 같다.
나는 여전히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여러 장르에서 표현하는 ‘지옥’은 옛날처럼 고통받고 시험대에 오르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터널 또한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졌다.
은지랑 일을 하다 보니 여러 터널을 볼 기회가 생겼다.
어두운 터널에도 지나간 세월을 따라 변화가 생겼다.
어떤 터널은 무지개 조명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곳도 있고, 어떤 터널은 달리는 대로 노래도 나온다.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은지와 내 곁에는 사람 또한 늘어났다.
대표님, 예찬 형, 송민 형, 승연 형, 태현 형, 오현 형, 석현 형, 다시 만난 도진이 형, 영희 형, 철수 PD님, 현우 형, 슬기 누나, 주연 씨.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 주신 대표님 아버지, 어머니.
NRY 엔터테인먼트 보영 씨, 성민 씨, 기훈 씨, 소현 씨, 민지 씨, 송주 씨, 진수 작곡가님, 하늘, 구름 선생님.
화랑 누나, 지키, 셀라스 숍 미주 원장님, 명훈 감독님, 유 PD님.
뭐, 에이슬 등등.
지금껏 만났던 모든 사람들.
부모라는 작자들에게 버려졌던 시절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일까.
시작은 분명 악몽이었던 것 같은데…….
끝은 처음의 나쁜 기억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벅차기만 했다.
은지와 난 인복 하나는 과분하리만큼 넘쳐흐르는 것 같다.
우리가 작품을 하다가 쓰러진 날을 끝으로 긴 달리기가 끝났다.
이어서 눈앞에 빛이 쏟아졌다.
“아들아. 내 아들.”
빛이 뻗어 오는 방향에서 대표님 목소리가 들렸다.
* * *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햇빛이 쏟아지는 그 옆으로 듬직한 그림자가 보였다.
“아, 깜짝이야. 눈을 떴으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방금 일어났거든.”
민망할 정도로 잠긴 걸걸한 목소리에 은지가 웃는다.
“이은호 목소리 겁나 잠겼네.”
“……뭘 쪼개. 니보단 나아.”
은지가 멈칫했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그림자가 지면서 은지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은지가 정성껏 들어 올린 가운뎃손가락은 오히려 그림자 때문에 더 선명하게 잘 보였다.
‘눈부셔.’
햇빛이 눈에 정통으로 쏟아져서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제 일어나. 너 졸라 오래 잤어.”
“얼마나 잤는데.”
“이틀.”
“……뭐?”
번쩍 눈이 절로 뜨였다.
‘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집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내 방 창문은 저렇게 햇빛이 내 눈 위로 쏟아지지도 않는다.
낯선 석고보드 천장.
딱딱한 매트리스.
“병원…….”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싸늘해지는 섬뜩한 기분이 엄습했다.
“이은호. 미친, 니 또 잘라고?”
호흡이 가빠지려던 그 순간.
은지의 사투리 섞인 비꼬는 말투를 듣자 현실감이 닥쳐왔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커튼 너머에서 들렸다.
“은지야, 은호 일어났냐?”
차르륵.
창가 반대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걷혔다.
커튼이 사라지자 그제야 난 이곳이 1인실 병실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 좁은 방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도.
“좀 괜찮냐?”
대표님이 걱정하며 물었다.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네. 괜찮아요.”
내 대답에 대표님도 안도한 듯 따라 웃는다.
침대 옆으로 다가온 대표님 뒤로 현우 형, 도진 형, 슬기 누나, 톡신 형들, 직접 만들어 온 듯 마카롱이 든 상자를 들고 있는 주연 씨까지.
회귀를 실감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회귀 전엔 변종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던 지긋지긋한 전염병으로 인해 이렇게 많은 면회를 오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었으니까.
그때, 뒤에서 신경질 섞인 은지의 투덜거림이 들렸다.
“정신 차렸으면 빨리 퇴원 준비나 해. 이러다가 앨범 내년에 내겠다.”
* * *
은호의 퇴원 후 일주일 뒤 NRY 엔터테인먼트 사옥 내부.
보영은 보고를 위해 회의실 문을 열었다가 다급하게 닫았다.
뒤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던 성민은 그런 보영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는지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 들어가요?”
보영은 희게 질린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괜한 불똥 튈 거 아니면 지금 회의실 들어갈 생각 하지 마요.”
“……?”
성민은 보영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보영이 그런 성민을 이끌고 회의실 앞을 피했다.
한편, 두 사람이 들어가려던 회의실 안에는 살벌한 공기가 맴돌고 있다.
“……후우.”
회의실 테이블 중심에 앉은 박 대표.
창석은 테이블에 깍지 낀 주먹을 느리게 올리며 노기 섞인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 건너편에는 고개를 숙인 은호와 은지가 서 있다.
“왜 불렀는지는 너희가 더 잘 알겠지.”
“…….”
은호는 제 죄를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한편, 은지는 할 말이 있는지 창석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 그래도 녹음은 다 끝냈…….”
퍽.
은지가 구시렁거리자 은호는 은지의 안면을 가격하다시피 다급하게 은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은지는 안면을 가격하듯 올라온 손을 치워 낸 뒤 신경질적으로 은호를 쏘아봤다.
그것도 잠시 정면에서 느껴지는 사나운 기운에 천하의 은지라도 얌전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퇴원한 지 일주일.
그날 아침, 창석은 은지에게 ‘녹음 끝!’이라는 반가운 문자를 받았었다.
일정이 하루가 아쉬운 와중에 그건 진심으로 반가운 이야기였다.
이어서 현우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표님, 은호랑 은지가 또 쓰러져서 병원에…….”」
창석은 또 한 번, 일주일 만에 또 한 번 은호와 은지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행이랄지, 이번엔 은호가 따로 발작을 일으키지 않아서 금세 퇴원할 수 있었다.
건강 관리를 똑바로 하지 않았다고 잔소리를 해야 할지, 일정이 여유롭게 남을 정도로 작업했으니 잘했다고 해야 할지.
‘스트레스가 탈모의 큰 원인이라는데, 이놈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 날이 단 하루도 없으니…….’
창석은 ‘보호자’와 ‘회사 대표’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덕분에 이렇게 두 사람을 살벌하게 쏘아보면서 근심 섞인 한숨만 흘리는 게 고작이었다.
“세 번째는…….”
“네?”
“……?”
한참을 고민하던 창석이 겨우 입을 열자 은지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은호는 놀란 눈으로 가만히 바라봤다.
“너희 쓰러졌다는 소리 말이야. 세 번은 안 듣게 해 주라.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창석이 한숨을 흘리며 말하자, 은호와 은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두 번이나 병원에 실려 간 만큼 예정보다 작업 기간이 늘어났다.
그 결과.
은호와 은지의 정식 앨범 발매는 합동 콘서트 이후 내년 상반기로 밀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