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81)
내가 은지의 첫 이별(?) 소식을 접해 들은 건 시우의 하차 소식 이후였다.
“은지가 시우랑 사귀었다고요?”
“은호 씨는 그걸 이제 알았어요?”
“네.”
아마 우리 회사 내에서는 가장 늦었던 것 같다.
“오빠가 돼서 동생 소식을 제일 늦게 알면 어떡해요. 하하하.”
날 제외한 회사의 전 직원들이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나를 놀렸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도 웃기지 않나?
이은지의 연애사는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걸.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아무것도 모를 때라 그런지 오히려 ‘멀쩡한 시우가 왜 이런 애를 만나나’라고, 반쯤은 장난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나머지 반은 진담 맞다.
은지가 늦게 들어온 그날의 일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히려 시우 쪽이 더 문제 많은 또라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니까.
은지가 늦던 날.
저녁 12시가 넘어갈 때까지 은지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어서 그런가.
연탄이 갑자기 분주하게 굴기 시작했었다.
그러더니 결국 내 옷을 훔쳐 입고 사람의 형태로 밖으로 나갔다.
난 순간 저놈이 드디어 미친 줄 알았다.
하지만 뒤늦게 시우 그 자식이 한 행동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그날 은지의 마중을 나가 준 연탄이가 아주 조금. 조금은 좀, 많이인가?
그래. ‘미세하게’ 고마웠다.
시우 녀석한테는 나 역시도 진심으로 X 같은 기분이었다.
‘X새끼가.’
아무리 은지가 레슬링 선수처럼 튼실해 보였어도 새벽이 가까운 한밤중인데.
심지어 본인이 데려갔으면 당연히 그 자리에 다시 데려다주는 건 기본적인 매너가 아닌가.
나는 당연히 이은지한테 대놓고 표는 내지 않았지만, 시우한테 진심으로 화가 많이 났다.
그래서 계획도 세웠었다.
촬영 날 시우 그 자식을 다시 보면 미션 중에 모른 척 다리라도 걸어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계획을 실행할 일은 없었다.
대표님이 더 빨랐으니까.
“시우, 하차했어요.”
시우는 이미 ‘같이 쫌 살자’에서 퇴출당한 데다, DI 뮤직 내에서도 계약 사항 중 어긴 부분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사내에서도 미움이라도 받은 건가?
“그거 들었어? 시우 걔 이번에 잡힌 방송 싹 다 캔슬돼서 다른 애들로 채워졌더라?”
그 녀석의 소식은 들리는 족족 출연이 잡혀 있던 방송에 다른 연예인이 출연하게 됐다는 소식만 가득했다.
한편, 시우가 사라진 ‘같이 쫌 살자’는 한 자리가 비어 버리게 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다음 주에 게스트가 올 거예요.”
유 PD님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최근 ‘같이 쫌 살자’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게스트나 고정 출연을 목적으로 많은 제안이 들어왔다.
여러 게스트를 섭외하고 다양한 매력을 보여 줄 수 있게 되자 유 PD님은 은근히 이번 시우의 하차를 반기는 것 같았다.
유 PD님의 이야기에 스태프들과 출연진들 역시 최근 흔한 그림에 떨어지기 시작하던 시청률이 다시 오를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 외에도 우리 촬영장에는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이 하나 생겼다.
기와집 벽 한구석에 큼지막한 포스터가 하나 걸렸다.
「한 지붕 아래 연애 금지」
마치 떠난 시우의 일을 저격하는 듯한 글귀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들 잠을 자기 위해 방으로 들어갈 준비를 할 때였다.
“……?”
거실 역할을 하는 대청마루의 중앙.
후드 모자를 뒤집어쓴 작은 키의 멤버 한 명이 가만히 ‘연애 금지’ 포스터를 구경하고 있다.
“뭐 해요?”
“아!”
누구인가 싶어서 호기심에 불러 봤는데, 상대는 하필 에이슬.
“그, 그냥 포스터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래. 잘 자라.”
연애 금지라 적힌 포스터를 왜 그렇게 오래 보고 있었는지 이유가 궁금해서 불렀는데, 그 대상이 에이슬이라는 걸 알게 되자 관심 또한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간단하게 인사한 뒤 에이슬이 혹시나 말이라도 걸까.
난 곧장 이번 주 역시 혼자 쓰게 된 내 방으로 향했다.
* * *
며칠 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다만, 오늘은 은지도 나도 조금 산만하다 할 정도로 분주했다.
오늘은 ‘정산 날’이기 때문이다.
‘정산’이라고 하면 보통 돈을 떠올리지만, 돈은 아니다.
애초에 이은지나 나나 물욕은 그렇게 크지 않다.
물욕도 가져 본 사람이나 큰 것을 볼 수 있는 건지, 우린 그저 배부르고 등 따숩고 노래만 할 수 있다면 뭐든 됐다는 마인드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고로, 우린 대표님이 만들어 주신 통장이 있음에도 그 통장에 얼마가 들었는지 관심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통장 잔액을 확인했던 게, 아마 1년 전이었던가.
……아무튼, 그렇다.
고로, 오늘은 돈이 아니라 ‘곡’을 정산하는 날.
은지가 몇 달간 미친 듯이 공장처럼 뽑아냈던 수많은 가이드 곡을 공개하는 날이었다.
몇 달, 아니.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은지의 곡 작업은 만드는 즉시 대표님에게 보내고 피드백을 받는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NRY 엔터테인먼트가 상당히 이름을 알리기도 했고…….
그외에도 광고, 방송 그 외에도 E-FAN 팬 클럽 어플의 확장, 합동 콘서트, 굿즈 사업, 심지어는 강의까지.
‘우리 대표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꽤 많은 사업을 늘여 두셨구나.’
덕분에 직원이 몇 없는 회사에 일은 넘치게 많아지니 모든 직원이 바빠졌다.
어지간하면 밥과 정시 퇴근만큼은 보장해 주려던 대표님이었는데…….
아무래도 몰려드는 일과 복지까지 동시에 챙기기는 힘들었는지, 최근엔 야근 선언이 잦아졌다는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건 직원들은 의외로 불만이 크진 않은 분위기라는 것.
일단 야간 수당이 상당히 만족스러운 금액인 것도 있는 것 같지만.
그 외에도 다들 그동안 대표님이 정말 많이 배려했던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것 같았다.
「“그동안 월급 루팡 많이 했으니까.”」
「“이럴 때도 있어야지. 매일 느긋하면 그것도 이 회사에 미래가 있나 싶어서 걱정돼.”」
「“내가 법인 카드로 먹은 그동안의 소고기가 내 월급보다 많으니까 해야지.”」
「“점심마다 내가 소고기 사 먹자 했으면, 일할 땐 똑바로 해야지.”」
직원들은 마치 한마음처럼.
그동안 뜯어먹은 값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최근 정신없이 바쁜 상황에도 놀랄 정도로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은지의 곡 피드백까지 받는 건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은지가 만든 곡은 한 달만 지나도 그 수가 정말, 너무, 많다.
제각각 한 소절만 들어도 전부 듣는 데에 족히 한 시간은 걸리지 않을까.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게다가 대중들에게 선보일 최고의 곡을 고르는 일은 원래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공장장 같은 이은지의 하드에서 그런 곡을 고른다?
심지어 히트곡 제조기나 다름없던 회귀 전 감각이 온전하게 돌아온 그 이은지의 곡을 솎아 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반드시 날을 잡아서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결국, 오늘과 같은 ‘정산 날’이 탄생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괜찮은 곡은 톡신 형님들이나 화랑의 신곡으로 택할 수도 있었다.
은지와 난 평소보다는 멀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회의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든 직원과 대표님이 자리에 앉아 있다.
‘오늘은 없으신가?’
자리를 둘러보는데, 대표님의 껌딱지 같던 어 대표님이 오늘은 없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유출을 조심해야 하니 대표님이 보냈거나 본인이 양심상 빠진 것 같았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은지의 클라우드는 미리 연결해 둔 듯, 보영 씨가 스피커를 세팅하며 말했다.
회사 천장 각 모서리에 못 보던 네 개의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정산 날’이 정해진 이후 전 직원이 골고루 다 잘 들을 수 있도록 대표님이 신경을 써 주신 모양.
은지와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아, 종이와 펜을 들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표님을 포함한 모든 직원이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첫 작업은, 일단 듣는다.
내 달을 찾아
떠나야만 했어 했고 했던―
한 곡이 끝나고, 이어지는 두 번째 곡과 함께 회의실에는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가득하다.
라 나나나 나 나잇
어느새 내 나인 나잇값을―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그렇게 스무 곡을 넘어갈 때쯤.
잔잔한 발라드곡이 나오자 송주 씨와 기훈 씨는 뒤집히는 눈꺼풀을 본능만으로 겨우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해’라고 하기엔 넌
다른 이에게 더 좋은 이기적인 사람이기에
한편, 약 서른 곡이 다 되어 감에도 변함없이 집중 중인 직원들도 많았다.
특히 회귀 전 내 매니저이기도 했던 도진 형과 지금 우리 남매의 매니저인 현우 형.
슬기 씨는 한 곡 한 곡 나올 때마다 은지한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어지간하면 이은지가 먼저 지쳐 보일 정도로 꾸준히 칭찬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대표님 또한 길고 꾸준한 몰입도를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번호와 함께 사내 아티스트들 중 누가 제일 어울릴 것 같은지도 함께 써 내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놀아 봐
날 가지고 놀아 줘 like a toy
Like that toy
네가 좋아하던 그것처럼
가이드에는 가사가 정해진 것, 가사가 일부분만 정해진 것, 반대로 허밍밖에 없는 것도 있었다.
가사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쓰는 건 아니듯, 반대로 흥얼거리는 허밍뿐이라고 버려지지도 않는다.
오늘 이 ‘정산 날’은 직원들 제각각의 기준을 가지고 단숨에 여럿의 귀를 낚는 곡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었으니까.
그렇게 곡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이 지나고 두 번째 작업 시간이 찾아왔다.
토론이었다.
두 번째 작업은 점심 무렵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이 다 되어 감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든 건가 싶었던 몇 직원들 또한 대표님이 고민 끝에 뽑은 것 인재들답달까.
다들 졸면서도 일은 확실하게 한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정도의 토론이 나올 수가 없었으니까.
“5번 곡이 은근히 자꾸 떠오르는 느낌이라 더 좋은데요? 이걸 타이틀로 가면 실험적인 느낌이라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실험은 위험하죠.”
“기훈 씨는 평범의 기준 같은 사람이면서 은근히 취향은 마이너 하시네요.”
“마이너라기보단, 그냥 저는 반대예요. 은호랑 은지는 은근히 떠오르는 곡보다 단번에 사로잡는 곡이 어울리죠.”
“보영 씨 말이 맞아요. 곡이 강렬한 맛이 있어야죠. 은호랑 은지는 게다가 아이돌이잖아요!”
“저기, 다들 퇴근 안 할 거야?”
열띤 토론의 현장은 대표님이 집에 가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9시까지 이어졌다.
“아까 20번대에서 허밍으로 흠, 흠 음음음~ 하던 곡 몇 번이었죠?”
“그거 30번대 곡 아니었어요?”
“플룻 들어간 32번 곡 말하는 거죠?”
“아, 맞아요! 그 곡 겨울 느낌은 어때요?”
“맥주 더 드실 분?”
“저요! 겨울 느낌에 대해선 글쎄요. 수록곡으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타이틀로 가기엔 조금 약하지 않을까요?”
“이건 화랑 씨 타이틀로 세우면 말이 달라질 것 같은데.”
“오, 될 것 같네요.”
“저는 그럼 32번 곡 킵 해 두는 걸로.”
대표님은 직원들을 집에 보내는 걸 포기한 채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한편 직원들은 마치 나들이나 회식이라도 나온 것처럼 다들 맥주까지 뜯으며 토론의 장을 펼쳤다.
나는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대표님한테 궁금한 게 생겨서 물었다.
“대표님.”
“은호, 왜.”
“이거 월급 나와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노래.
왁자지껄한 사람들.
대표님은 감성 주점인지 회의실인지 모를 테이블을 돌아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줘야지. 다들 우리 아티스트들 잘되라고 저러고 있는 건데.”
어느새 술판을 벌인 직원들을 보며, 대표님은 못 말린다는 듯 장난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