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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280화 (280/309)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80)

지도를 안 보고도 알고 있는 길이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걸었을까.

집 인근 버스 정류장에 걸린 스크린을 발견하고 나서야 나는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벽 두 시.’

최시우 차에서 내린 게 정확히 12시쯤이었던가.

족히 2시간을 쉬지 않고 걸어왔다는 말이었다.

노래하면서 왔더니 지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 하루 내내 감정적으로 소모한 체력 때문일까.

익숙한 길이 보이자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집에 가서 따뜻한 연탄이를 끌어안고 잘 생각만 하며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들어섰다.

그때였다.

골목 입구 앞 가로등 불빛 아래에 익숙한 후드 집업을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이은호?’

저 인간이 웬일로?

분명 매번 잠옷처럼 입던 이은호의 후드가 맞다.

하지만 왠지 조금 낯설다 싶던 그 순간.

“어. 드디어 왔다.”

나를 반기는 익숙한 목소리.

반대로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

상대는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마스크도 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려지지 않는 부분.

이 새벽에 고요한 골목에서 가만히 그 샛노란 눈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런가.

잠깐 시간이 멈춘 기분이었다.

“연탄이?”

“쉿.”

내가 바로 알아챈 게 기쁜 건지 연탄이가 배시시 웃었다.

마스크 위로 노란 눈 아래에 양쪽에 찍힌 까만 점이 눈꼬리를 따라 위치가 달라졌다.

“어인 일로 늦기에.”

“근데 너 왜 그 모습으로…….”

연탄이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묻자, 연탄이는 후드 모자 끈을 당기며 말했다.

“은호의 옷은 저기, 네가 말한 시시티브이라는 거에 비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아서.”

연탄이의 시선을 따라 본 곳에는 대표님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 사각지대 하나 없이 빼곡하게 깔아둔 CCTV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편이 한낱 미물보다는 몸집이 더 크잖아.”

“…….”

늙었달까.

특유의 오글거리는 단어를 섞어 가며 말하는 걸 보니 정말 연탄이가 맞구나.

“위험한 늦은 밤엔 이 모습이 더 든든하고…….”

“하핰.”

웃음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성인 남성인 이은호도 힘으로 때려눕히던 나였다.

누군가 떼로 덤비지 않는 이상 적어도 내가 맞은 몇 배로 갚아 줄 자신도 있다.

누가 지켜 줘야 할 만큼 나약하진 않다는 말이다.

연탄이 역시 이은호만큼이나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녀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지켜 주겠다며 이렇게 신경 써 주는 게.

연탄이의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래. 든든하네.”

놀리듯 말했지만 그래도 상당한 진심을 담아서 한 말이었다.

그걸 아는지, 연탄이도 헤실거리며 웃는다.

“가자. 늦었다. ‘곳블’에 들면 몇 날은 앓아누울라.”

경호원을 자처한 연탄이와 함께 골목으로 향했다.

“근데 곳블이 뭐야?”

“아, 고뿔이라고…….”

“감기?”

“응. 그거.”

“하핰핰핰. 진짜, 너 말하는 거 되게 웃겨.”

“나로 인해 은지 네가 웃는다니, 좋구나.”

“하핰핰.”

연탄이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

오래 묵은 느끼한 말투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 오래 묵은 게 치즈가 아니라 된장 같은 느낌?

오페라나 클래식이 아닌 아리랑 같은 그런 느낌.

나는 연탄이가 이럴 때마다 오글거린다고 장난처럼 웃어 넘겼다.

근데 오늘은 평소와 다른 ‘사람’의 모습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별거 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별’이라는 걸 겪었기 때문일까.

그간 웃으며 넘겼던 연탄이의 말들이 넘치고 넘쳐서 주변까지 고여 버린 듯 손끝부터 온몸의 감각이 간질거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 친구가 생긴다고 들떴을 때보다 더, 훨씬 더 떨린다.

호흡이 흐트러지는 느낌.

내가 나답지 않은 그런 느낌.

“은지야, 이거 어떻게 해야 해?”

“어?”

손잡이가 보이지 않는 난감한 대문 앞에서 연탄이는 많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내가 해 줄게.”

그때였다.

연탄이가 옆으로 비켜섰을 때, 손등의 살갗이 스쳤다.

연탄이 손은 밖에 오래 있었던 건지 싸늘할 정도로 차게 느껴졌다.

심장이 시끄럽게 뛰었지만 평온한 척, 평소처럼 대문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아하. 와, 세상이 좋아지니까 이런 것이 다 있구나.”

“하핰. 바보.”

감탄하는 연탄이의 목소리는 거슬리는 것 없이 듣기 좋은, 내가 좋아하는 중저음이다.

앞장서서 두 칸 먼저 2층을 오르던 연탄이.

“……?”

연탄이는 내가 걸음을 멈추자 동시에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왜? 뭐 두고 온 거 있어?”

“아니…….”

오르던 계단을 멈추고 가만히 멈춰 서 있자, 연탄이가 나를 돌아봤다.

‘나 미쳤나 봐.’

그 순간 새삼 깨달아 버렸다.

연탄이랑 함께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그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연탄이는 내가 움직이지 않자, 여전히 앞서 걷던 두 칸 위에 똑같이 멈춰 있었다.

일말의 재촉조차 없었다.

그저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조금 전 깨달았던 내 감정을 인정해 버렸다.

첫사랑이었다.

세상에 밝힐 수 없는 존재를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훗날.

나는 이날을 잃었다.

잊은 것이 아닌 잃어버렸다.

연탄이도, 풋풋했던 첫사랑도,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짧은 골목에서의 기억까지도.

마치 한밤의 꿈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잃었다.

* * *

솔로

「DI뮤직 측, 현재 사실 확인 중…….」

「데뷔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발칙한 신인 ‘최시우’」

「최근 스캔들이 난 신인 가수 최OO의 그녀는 함께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어디서 구한 건지, 아직 터지기 전 한 기자의 기사 초고가 쓰인 보고서를 읽어 내려 가던 박창석.

창석은 머리가 어지러운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박 대표의 한숨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려올까요?”

“그래. 부탁하마.”

창석의 대답에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곧장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대표실을 떠났다.

박 대표는 현우가 떠난 뒤 보고서를 책상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 뒀다.

그리고 천장을 보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은지야. 너는 아니어야 한다…….”

* * *

둘만의 비밀로 남겨 두려던 시우와 짧은 ‘연애 썰’.

하지만 며칠 뒤, 직원의 제보로 은지는 대표님한테 그간의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래서 우연히 마주친 겸 제 생파 끝나고 친구들하고 시우 데리고 노래방에서…….”

은지는 어떻게 연애를 시작하게 됐는지 등, 그날 있었던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풀었다.

“그러니까 은지, 네 말을 정리하자면 솔로인 게 억울해서 아무나 붙잡고 사귀게 됐는데, 그게 시우였다. 맞지?”

“네…….”

“그런데 일주일간 사귀긴 했는데 아무런 접촉도 없었고?”

“네…….”

“은지야, 냉정하게 말해서 넌 이걸 남들이 들으면 믿을 것 같니?”

창석의 냉정한 목소리.

은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아시잖아요. 저 거짓말은 진짜, 단 하나도 안 하고 사실만 말했어요…….”

“그래. 나는 너를 아니까 믿지. 그런데 대중들도 그럴까?”

“하지만…….”

“일단 이 문제는 됐고, 최시우 그 X놈 새끼는 헤어진 직후엔 널 길바닥에 그냥 버려 두고 갔다고?”

“네…….”

“감히?”

“……네.”

“내 새끼를?”

“…….”

“넌 그 두 시간 거리를 휴대폰도 꺼져……! 아아.”

창석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뒷골이 당기는 듯 목덜미를 주무르며 한숨을 흘렸다.

창석은 속이 펄펄 끓는 듯 머리 위로 아지랑이가 보일 지경이었다.

“내가 오늘 일로 머리가 벗어질 날이 1년은 더 앞당겨진 것 같구나. 은지야…….”

“풉, 큼. 죄, 죄송합니다.”

“웃기냐? 내 머리가 웃겨?”

“아뇹…….”

은지는 아랫입술을 꽉 물며 웃음을 참았다.

“어쩐지, 그간 여자 문제가 많았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다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꼬인 녀석인 줄은 몰랐는데…….”

오늘 회의실 안에는 은지와 창석 외에도 DI 뮤직의 어석배 대표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연락이 들어온 듯 어석배 대표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한결 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형님, 기사에 여자는 은지가 아니라 엘핀 그룹에 마린이라고 합니다.”

“그건 참 불행 중 다행이네.”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좋은 소식에도 불구하고 창석의 얼굴색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뭔가 걸리는 게 있습니까?”

“……파고들면 은지는 결국 나올 텐데, 마린으로 만족할 것들이 아니니까.”

최근 DI 뮤직과 NRY 엔터테인먼트는 몸집을 무섭게 키워 가는 중이다.

원래부터 큰 기업이었던 DI 뮤직에는 적이라 부를 소속사가 많지 않았지만 NRY 엔터테인먼트는 달랐다.

DI 뮤직과 얽히면서 본래 DI 뮤직과 협업을 진행하려 눈에 불을 켜고 있었던 중소 엔터테인먼트들.

창석이 어석배 대표의 마음을 단숨에 잡아 버린 이후.

어석배 대표의 편애로 DI 뮤직은 NRY와의 작업을 위해 타 중소 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을 무산시키는 것들이 굉장히 많았다.

불만이 있어도 표를 낼 수 없는 몸집의 차이.

불똥은 자연히 그 옆에 붙은 만만해 보이는 ‘혹’에게 향한다.

NRY 엔터테인먼트는 현재 은호와 은지의 ‘같이 쫌 살자’에서의 활약 외에도 톡신과 화랑 등.

모든 뮤지션이 높은 성적을 내면서 굉장히 잘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이제 겨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생 소속사.

이름을 알리고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만큼 주위 노리는 적들의 수도 배로 늘어났다.

DI 뮤직에게 차인 중소 엔터들에게 곱게 보이지 않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집중한다.

외부에서는 세부 계약을 모르니 일단 자본 줄을 쥔 DI 뮤직이 마치 ‘갑’, ‘을’ 중 ‘갑’처럼 비쳐 보였다.

예능도, 합동 콘서트도 기획 자체는 박창석에게서 나온 이야기들이었음에도, DI 뮤직이 차린 밥상에 NRY가 숟가락을 올린 격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헛소문이다.

내부에서 ‘실권자’는 오히려 어석배 대표보다는 박창석 대표가 더 가까웠다.

창석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고, 어석배는 창석에게서 얻어야 할 것이 있는 만큼 당연한 관계의 높이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어석배는 잔뜩 열 받은 창석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짙게 내려온 눈 그늘을 엄지와 중지로 누르며 물었다.

“형님, 시우…… 뺄까요?”

“안 빼려고?”

“아니요. 혹시 다른 생각이 있으신가 해서.”

“다른 생각은 무슨. 너희 애니까, 알아서 해.”

어석배 대표의 질문에 창석은 숨도 안 쉬고 되묻고 답을 했다.

“혹시라도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알겠어요.”

창석은 그렇게 말을 마치려다 급하게 뒤를 덧붙였다.

“참, 어 대표.”

“네.”

“앞으로도 내 노하우를 원한다면 그놈 앞으로 은지 눈에도 띄지 않게 근처에서 치워.”

“네, 형님.”

어 석배 대표는 ‘그쯤이야’라는 듯 가볍게 웃었다.

은지는 오가는 대화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 줄 몰랐다.

하지만 이후 다음 ‘같이 쫌 살자’ 촬영 날.

“시우, 하차했대.”

“이번에 터진 마린이랑 열애설 때문에?”

비어 버린 한 자리를 본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됐다.

새삼스럽지만 둘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은지에겐 시우는 그렇게까지 나쁜 놈으로 남진 않았다.

자신 역시 못한 점이 많았던 것도 있지만, 덕분에 첫 도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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