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62)
연탄의 쇼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은지는 콧김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탄은 어느새 바글바글 몰린 스태프들 사이에서 고양이의 몸으로 비보잉이라도 할 기세였다.
거기까지 갔다간 정말 ‘고양이’에서 과하게 멀어지는 탓에 은지는 연탄에게 조용히 경고의 의미를 실어 그를 불렀다.
“연탄아.”
제발, 그만하고 이리 와.
은지가 부르자 연탄도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온 모양.
연탄은 얼마나 격하게 포즈를 취했으면 숨까지 헐떡이며 은지에게로 다가왔다.
다들 연탄에게 홀려 정신없던 그사이.
은지는 은호를 돌아봤다.
은호도 연탄의 쇼에 어이가 증발한 듯 입을 떡 벌린 표정이었다.
연탄이 때문에 한 박자 늦긴 했지만, 은지의 눈길을 느낀 은호는 뒤늦게 ‘지금이야’라며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은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이며 여전히 연탄이에게 홀려 있는 유 PD를 돌아봤다.
“PD님, 연탄이가 이런 친구라서 그런데…….”
“예, 예!”
연탄이의 다양한 ‘포즈’에 홀려 있던 유 PD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은지를 돌아봤다.
“제가 연탄이한테 멤버들이 뭘 가지고 오든지, 어떤 유혹을 하든 움직이지 말라고 할 거거든요?”
“그게 되나요? 아무리 똑똑한 녀석이라도……. 그리고 ‘고양이’는 본능이 강하지 않나요……?”
유 PD는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은지는 그런 유 PD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혹시라도 실패하면 저희 미션인 ‘연탄의 행동을 예측’하는 거에 실패하는 거니까요.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아……!”
유 PD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멤버들은 결국 ‘연탄이의 마음’이 아니라 ‘은지 씨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군요.”
“그렇죠! 역시 PD님.”
은지가 활짝 웃었다.
유 PD도 대답을 하고 나니 여러 재미있는 장면이 그려지는 듯 은지를 따라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연탄이가 은지의 제안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은호와 은지에게 주어진 미션의 실패로 연결된다.
아직 미션 실패 시 받을 벌칙은 멤버들에게 공개되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유 PD는 힐끔, 뒤에 놓여 있는 패널을 바라봤다.
‘개인적으로 이번 벌칙은 꼭 은지 씨가 걸렸으면 좋겠는데…….’
유 PD가 바라본 뒤집힌 패널에는 오늘 미션을 실패했을 때의 벌칙이 쓰여 있었다.
‘흉가 체험.’
유 PD는 벌칙 판에 눈길을 두다가 다시 은지에게 시선을 옮겼다.
“은지 씨 상당히 자신 있으신가 보네요.”
“그럼요. 연탄이는 제 말이면 뭐든지 ‘다!’ 들어주거든요!”
마치 다른 누군가가 들으란 듯 은지가 목청껏 소리쳤다.
* * *
은지가 유 PD와 이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동안.
은호는 촬영장 내부, 스태프가 운영 중인 ‘구멍가게’로 다가갔다.
허름한 가게 안에는 파마머리에 ‘몸빼 바지’를 가슴께까지 끌어 올리고 새빨간 립스틱을 제 입보다 크게 그린 남자, ‘아줌마’가 앉아 있었다.
그의 가슴에 붙은 이름표에 쓰인 것이 ‘아줌마’라 그의 이름처럼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은호는 그에게 ‘소원 수리권’을 내밀며 말했다.
“종이 하나 주실래요?”
“살 거야?”
“아뇨. 그 종이에 쓰는 내용을 살 거예요.”
“응? 그, 그래. 근데 그래도 되나?”
스태프는 갸웃거리면서도 종이를 내어 줬다.
나는 은지가 연탄이한테 명령할 생각을 한 직후부터 거기서 더 뜯어낼 방법을 고심했다.
‘멤버들한테서도, 내 동생한테서도.’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계약서’.
법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완벽한 계약서를 써 내긴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펜을 잡고 긴 내용을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
한참 뒤 펜을 멈췄을 때, 내용을 다시 읽어 보자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만하면 법 쪽에 까막눈인 내가 쓴 것치고는 꼼꼼한 편 아닐까.
“이거, 얼마에 팔 거예요?”
수상한 내용을 써넣은 ‘소원 수리권’을 내밀자, 내용을 읽은 아줌마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 자, 잠시만 내가 우리 사장님한테 물어보고 올게.”
스태프는 부여받은 역할에 몰입을 유지하며 은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유 PD에게 곧장 달려갔다.
이야기를 전달받은 건지, 멀리 떨어진 유 PD가 놀란 눈을 하며 은호가 있는 방향을 돌아봤다.
‘허!’
황당한 숨을 터트린 유 PD는 곁에 있던 조연출에게 펜 한 자루를 전달받았다.
「이은호(이하 “갑”이라고 함)와 이은지(이하 “을”이라고 함)와 _____(이하 “병”이라고 함)은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위 계약은 ‘같이 쫌 살자’ 측에서 책임지고 이행할 것을……(중략)
‘병’은 해당 미션에서 포인트를 받을 경우 그것에 80%를 ‘갑’에게 전달하며, ‘갑’과 ‘을’은 해당 포인트를 ‘갑’이 9, ‘을’이 1로 나누어 받는다.
……(중략)
위 계약은 상호 합의하에 진행되었으며 계약의 파기를 원할 땐 참여자(“갑”, “을”, “병”)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
유 PD는 은호가 쓴 내용 아래에 추가로 몇 글자를 더 곁들였다.
「이번 회차 내에서 단 1회만 적용.」
이후 은호는 스태프에게 내용이 추가된 종이를 전달받았다.
“우리 사장님이 이 내용을 추가하면 5포인트에 OK라네?”
5포인트.
방을 빌리는 값에 맞먹는 액수였다.
하지만 이 터무니없는 계약서 조건에 비하면 오히려 저렴한 축이 아닐까.
물론 아직 미션을 완료했을 때 얼마의 포인트가 들어올지 모른다.
그 점은 분명 도박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투자해야 재밌지.’
은호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주세요. 바로 살게요.”
* * *
대표님이 그토록 ‘계약서에 함부로 사인하지 말아라.’라고 했던 그 잔소리.
그것의 진짜 의미는 제발 내용을 보고 사인을 하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은지의 가장 나쁜 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수차례 잔소리를 들어도 글자와 친하지 않은 은지는 매번 대충 훑기만 하고 사인해 버린다.
청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게 오늘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우리가 싸운 직후라는 상황 또한 이은지가 평소보다 무뎌져 있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게 아니라도 이은지는 이은지였다.
“이은지, 사인해.”
“엉.”
종이를 내밀자 은지는 내용을 읽어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 을’이라는 단어가 나온 그 순간.
은지의 시선은 훑는 축에도 끼지 못하고 종이 속 내용을 지나쳤다.
이럴 줄 알았다.
애초에 난 이은지가 이러길 바라고 일부러 번거로운 ‘갑’이니, ‘을’이니, ‘병’이니 이런저런 문장을 덧붙였으니까.
‘이런 착한 오빠가 또 어디 있냐.’
동생 버릇도 고쳐 주려고 이렇게 신경 써 주는 오빠 말이야.
은지는 더 읽어 갈수록 종이에 빼곡한 글씨에 머리가 아픈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곤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곧장 펜을 들었다.
사인하는 이은지를 보고 있으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은지는 조금이라도 수상한 면을 보이면 문제를 눈치챌 테니까.
보다시피 계약서는 당당하게 내가 9할을 가져가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혹여 걸리더라도 어떻게 입을 털지까지 계획해 뒀다.
하지만 이걸 다행이랄지, 굳이 입을 털 필요조차 없었다.
이래서 이은지가 어디 가서 계약서를 써야 할 땐 나나 대표님이 항상 함께했었다.
우리 두 사람을 모두 거치고 나서야 이은지는 읽지도 않고 계약서에 사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번 읽으라고 잔소리를 해도 큰 소용은 없었다.
대표님이나 내가 없을 때 이은지는 이런 ‘서류 문제’에선 그야말로 호구가 따로 없었으니까.
한편, 유 PD님도 못된 면이 있달까.
이 계약서 전문을 봤으면서 그는 은지에게 따로 귀띔해 주지 않았다.
‘이 정도는 눈치채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이 계약서로 인해 일어날 그 이후의 ‘사건’을 카메라 렌즈에 담길 기대하고 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 *
은지는 멤버들이 모두 마당으로 모일 때까지도 계약서의 진상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잠시 후.
멤버들은 하나둘씩 연탄이를 유혹할 ‘무기’들을 챙겨 돌아왔고, 촬영은 다시 시작됐다.
그렇게 시작된 ‘연탄이를 꼬셔라’.
많은 참가자가 관심조차 주지 않는 연탄이에게 좌절했다.
단 한 명.
에이슬이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숨겨 둔 고기를 구워 왔을 때.
연탄은 침을 뚝뚝 흘리며 은지의 명령을 어길 ‘뻔’하긴 했었다.
하지만 끝내 은지와의 의리(?)를 지켜 내며 본능을 이겨 내고 고기에서 눈을 돌렸다.
여기서 멤버들은 하나둘씩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관심이 없다기엔 조금 전에 에이슬이 고기를 내밀었을 땐 정말로 넘어가기 ‘직전’ 근처까지 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은지야, 힌트 좀 주라!”
승연은 은지에게 매달렸다.
그 짧은 찰나.
내내 무심하던 연탄의 반응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거기에 눈치챈 몇몇은 일찍이 목표를 연탄이 아닌 은지에게로 돌렸다.
“은지야, 초콜릿 먹을래?”
“저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미안해요.”
은호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은 은지에게 온갖 아부를 털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은호의 눈짓에 따라 은지가 멤버들을 한 명씩 불러 은호에게 보냈다.
은호는 찾아온 그들에게 조용히 계약서를 내밀었다.
멤버들은 하나둘씩 계약서를 확인했다.
이런 허무맹랑한 계약서에 은지의 사인이 있는 것도 황당하지만, 80%라니…….
심지어 이 내용을 외부에 알리면 벌금까지 걸려 있어, 다들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보상은 아직 안 나왔잖아요? 포인트가 없으면 형이 이득이에요.”
은호가 입을 열었지만, 쉽게 넘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번 미션 보상에 포인트가 많으면 많았지 없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손해라고 판단한 대부분의 멤버들은 차라리 미션을 실패하겠다며 계약서를 거부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은호와 은지는 나름의 배려로 아직 한국어가 서툰 지키에게는 계약서를 들이밀지 않았다.
슬슬 포기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져 가던 그때였다.
유 PD는 멤버들의 사기 충전을 위해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번 미션의 승자에게는 정말, 정말, 정말로 여러분이 원하셨던 그런 보상을 드릴 예정입니다. 푸짐해요!”
“푸짐해?”
그때, 마침 은지와 대화 중이었던 승연.
승연은 안 그래도 귀가 솔깃하던 차에 이어진 유 PD의 말을 듣고는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승연은 어설프게 만든 병뚜껑에 실을 연결한 장난감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연탄을 유혹하기 위해 준비해 온 승연의 ‘무기’였다.
“은지야, 진짜 연탄이가 이거 가지고 놀게 할 수 있어? 그럼 내가 우승인 거지?”
“네. 그럼요! 제가 연탄이한테 오빠 쪽으로 가라고 한마디만 하면 게임 끝이에요!”
“좋아. 할래, 나.”
“대신 우리가 제시한 보상을 나누겠다는 계약서에 사인해 줘야 해요.”
“우리 사이에 뭘 사인씩이나, 계약서는 어디 있는데?”
“저쪽에 이은, 아니. 오빠한테 가 봐요.”
‘이번 미션 보상은 정말 클 것이다’라는 말이 어지간히 뇌리에 강하게 박혔는지 은호를 찾아간 승연은 마음이 급해 내용을 훑지도 않고 흔쾌히 사인해 버렸다.
“승연아, 그래도 일단은 읽고 사인을…….”
“에이, 뭐 우리 애들인데 이상한 짓 했겠어?”
승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태현의 한숨이 깊었다.
“왜? 동생들 못 믿어?”
“어, 난 얘들 이런 면으로는 못 믿겠는데…….”
냉정한 태현의 대답에 승연은 어이가 없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와, 형! 애들 상처받아!”
가만히 건너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은호는 해탈이라도 한 듯 웃고 있었다.
‘미안해요, 형. 저 상처 안 받아요.’
표정과 다르게 속이 좀 쓰렸다.
양심에 찔려서.
“누가 들으면 애들이 사기라도 치는 줄 알겠네!”
‘미안해요. 형. 나 지금 형한테 사기 치고 있는 거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