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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238화 (238/309)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38)

얼어 있는 10초가 느리게 흘러 10분 같았다.

소리가 잠잠해지고 나서야 은호는 ‘얼음, 땡’을 하듯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다급하게 머리를 감았다.

이후 대충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욕실을 나섰다.

‘깜짝아.’

그때, 문 앞에는 검은 실루엣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실루엣의 주인은 화장실 가까이에서 잠든 태현이 상체만 일으킨 채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그림자였다.

은호가 덤덤해서 크게 티가 나지 않았을 뿐, 공포 내성이 낮은 은지가 봤더라면 사이렌 같은 비명이 터질 법한 장면이었다.

“형님?”

“……응.”

은호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태현은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잠결인지 목이 잠겨 있었다.

“안 깨우려고 살살 들어갔는데, 다라이가 스댕이라 망했어요. 죄송합니다.”

“……아, 그 소리였구나. 비 오는 줄 알았네.”

“하핰. 크흠, 죄송해요.”

“……괜찮아.”

은호가 웃음을 다급하게 갈무리하며 사과하자, 태현이 되레 피식 웃으며 답했다.

‘으흐.’

태현이 괜찮다고 하자 긴장이 풀린 건지 그제야 쌀쌀한 새벽바람이 창틀로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데워진 공기로 가득한 욕실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가.

찬바람에 이가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은호는 재빠르게 누워 있을 때 덮던 이불을 몸에 휘감았다.

후끈할 정도로 따뜻한 바닥에 잘 데워진 이불.

젖어 있는 머리는 여전히 추웠지만 오묘하게 온도가 맞으면서 천국이 따로 없었다.

“참, 형……님?”

은호는 입을 떼기 전에 태현을 돌아본 그때였다.

태현의 얼굴을 보자 은호가 다시 얼어붙었다.

“……?”

혼란스러웠다.

‘저거 뭐지?’

의문이 먼저 들었다.

방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이라고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날벌레를 잡는 파란 불빛뿐이었다.

그래서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잠을 깊이 못 잔 건지, 태현은 컴컴한 야간 시야를 뚫고 보일 정도로 피곤함에 절어 보였다.

‘그냥 안색이 안 좋으셔서 그늘진 건가?’

그때였다.

“은호야.”

“네?”

잠이 조금 깬 듯 태현이 평소와 다르게 다소 짜증이 솟은 듯한 어투로 은호를 불렀다.

“나, 이 방 포기하고 저쪽 방 셋 중에 하나 여기 쓰라고 해야겠다.”

“갑자기요?”

“응.”

어제 그렇게 전쟁을 벌일 정도로 욕심 있던 분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루 만에 손바닥 뒤집듯 의견이 바뀌었다.

은호가 놀라며 태현을 돌아보자 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태현은 사나운 눈길로 큰 방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방 싫어졌어.”

하루아침에 뒤바뀐 단호한 대답에 은호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요?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아니.”

그때 태현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눈에 불이 붙었다.

“서승연 개자식이 화장실 가다가 내 얼굴 밟았거든.”

“아……. 아!”

처음의 ‘아’는 ‘아이고, 저런’이라는 의미로.

얼룩의 의미가 이해됐을 땐, ‘아, 그래서!’라는 의미의 ‘아’가 터져 나왔다.

은호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 되더니 조용히 윗입술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화난 태현에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왜.”

은호의 찝찝한 표정을 본 태현이 갸웃거리며 물었다.

은호는 더 감추지 못하겠는지 젖어 있는 수건에 얼굴을 파묻으며 표정을 감췄다.

하지만 완벽하진 못했다.

소리는 안 나지만, 들썩이는 어깨가 누가 봐도 울거나 웃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왜.”

태현이 다시 한 번 물었고, 은호는 손을 들어 조용히 욕실 방향을 가리켰다.

“욕실?”

“거울…….”

“거울은 왜?”

“봐요…….”

사랑방과 세 사람이 잠든 큰 방 사이에는 마루가 있다.

청소했다고 하더라도 마당은 흙 마당이었고, 창이 따로 없다 보니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일까.

‘……또는 그냥 승연이 형 발바닥이 오지게 더러웠거나…….’

태현은 그동안 잠결을 이겨 내고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은호 말대로 거울을 확인했다.

불 켜진 욕실에서 보자, 태현의 얼굴에는 승연이 남긴 발바닥 모양의 얼룩이 찍혀 있었다.

은호는 직감했다.

‘승연이 형, 조졌다.’

* * *

“형!”

“…….”

“형, 형!”

승연과 태현이 아침부터 흙 마당 중앙에 놓인 평상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바깥에서 난 시끄러운 소리에 막 일어난 듯 지키가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나오기 전에 어느 정도 머리칼을 정리하고 나온 건지, 지키의 머리는 매일 보던 은지의 산발보다는 비교적 정리된 모습이었다.

“음…….”

설명하려던 그때였다.

“내가, 내가 진짜 미안해.”

“이리 와.”

“실수였어! 형, 나, 진짜!”

승연이 버럭 소리치는 바람에 은호의 대답이 묻혔다.

“알겠어. 알았으니까. 이리 와 봐.”

태현은 모든 것을 용서해 줄 듯한 인자한 맏형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승연을 꼬드기기 위한 가식적인 미소였다.

‘그, 그래도 형인데…….’

길고양이처럼 경계를 띠던 승연은 평소 태현의 순한 성격을 떠올리며 경계심을 차츰 풀어 갔다.

천천히 다가가던 승연이 단숨에 잡힐 거리까지 다가간 그때였다.

뻔히 보이는 함정이었는데, 걸렸다.

‘이래서 평소 행동이 중요한 건가.’

은호는 새삼 깨달음을 얻은 듯 눈을 반짝였다.

“아악! 잘못했어!”

“잘못했어? 형한테 반말이냐?”

“자, 잘못했어요!!! 형님!!! 형!!! 아악!!!”

태현은 당장이라도 체포할 것 같은 자세로 승연을 평상에 엎은 채 팔을 뒤로 꺾어 버렸다.

“은호야!!! 살려 줘!!!”

승연의 간절한 외침에 태현의 눈길이 은호에게 사납게 날아들었다.

은호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얌전히 웃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신호를 받은 태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승연을 본격적으로 괴롭혔다.

“어제 자던 중에 승연이 형이 화장실 가다가 태현이 형 얼굴 밟았대요.”

“어머.”

지키는 당하는 승연을 불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은호가 이유를 말해 주자, 뒤늦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방은 두 사람만 잤죠?”

“네.”

“펴냈어요?”

“뭘, 아, 편했냐고요?”

“네. 현했.”

“편.”

“편, 했다. 편했다! 맞죠?”

“네. 잘했어요.”

틀린 부분을 가르쳐 주자, 지키가 은호의 발음을 열심히 따라 하며 웃었다.

은호는 이후 편했느냐던 지키의 질문을 생각하며 어젯밤과 오늘 새벽을 떠올렸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어요. 욕실이 가까운 건 좋은데, 아무래도 냄새가…….”

“맞아요!”

“……?”

지키가 알고 있다는 듯 답하자, 은호가 당황하며 지키를 돌아봤다.

“여기 방도 냄새가 났어요. 특히 그럴 때요.”

“그럴 때? 아, 사람들 화장실 갔다가 나왔을 때요?”

“맞아요. 맞아요. 은호 씨는 말을 되게, 으음…….”

지키는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듯 양손 검지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갑자기 떠올랐는지 푸른 녹색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아! 개떡같이 말했는데 창떡 같이 알아들어요!”

“……찰떡.”

“아! 차―르떡. 찰. 차르. 찰떡.”

“정확하네요.”

은호는 틀린 부분을 고쳐 줬다.

지키는 틀린 건 그 즉시 고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회귀 전 만남을 통해 그런 성격을 잘 알기에 한 행동이었다.

“뭐야.”

그때였다.

이제 막 일어난 듯 ‘산발’의 정석인 머리를 한 채 은지가 비척거리며 마루로 나왔다.

은지는 지키와 은호를 게슴츠레 뜬 눈으로 바라보다, ‘흐음’ 소리를 내며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둘이 썸 타?”

은지의 질문에 은호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주제를 넘겼다.

“아침부터 헛소리하지 말고 그 귀신 꼴부터 정리해라. 대표님 뒷목 잡으신다.”

“뭐 어때, 리얼이잖아.”

“그래, 우리 팬분들도 보시는 ‘리얼’이지.”

은호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은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번 방송으로 은호에게 ‘노잼’이라는 타이틀이 꼭 떼어 내고 싶은 부분이라면, 은지는 은지대로의 목표가 있었다.

‘지지’라는 별명이 붙은 계기였던 ‘지저분하다’는 이미지 없애기 말이다.

“아 참, 이은지.”

“엉?”

은지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였다.

“니 가방에 내 안경 좀.”

“니 안경을 왜 내 가방에서 찾으세요. 미―.”

“쫌.”

“…….”

‘미X놈아.’를 끝마치지 못한 은지는 입술이 댓 발 나온 채 뾰로통해졌다.

“내 가방에 자리 없어서 니 가방에 넣어 놨어.”

“언제.”

“어제 버스 타기 전에.”

은지는 ‘대체 어떻게?’라고 눈으로 묻듯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의외로 방으로 가서 얌전히 가방을 가지고 왔다.

적어도 가지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보였다.

퍽.

가방으로라도 때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효과는 없었다.

“나이스 샷.”

은지는 방을 나온 순간 내던지다시피 은호에게 가방을 던졌다.

하지만 은호는 예상한 일이었는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롭게 은지의 가방을 공중에서 낚아채며 인사했다.

“땡큐, 호박.”

“우럭같이 생긴 게 누구보고 호박이래. 짜증 나게.”

“으쯔라구용.”

더 약 오르라며 은호가 장난스럽게 비꼬자, 은지는 중지 대신 약지를 세웠다.

은호가 마법의 단어인 ‘쫌’을 외치려던 그때.

“‘쫌’ 하지 마라. 잘 보셈. 이건 욕 아님.”

“이거 봐라……?”

“이건 예상 못 했지? 넌 나한테 안 돼, 이은호. 하하핰.”

손가락은 미묘하게 욕을 피해 갔지만, 은지의 표정은 명확히 ‘엿이나 드세요’라는 감정이 진득하게 담겨 있었다.

정말 예상치 못한 한 방이었는지, 은호의 이마에 살짝 짜증 섞인 핏줄이 솟았다.

“그래. 이건 인정.”

은호는 오히려 당한 걸 드러내면 은지가 기세등등해질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은지의 가방이나 뒤적였다.

넣어 뒀다던 안경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는 겸, 놀릴 것도 찾고.

“아, 이은지 가방 왜 이렇게 더러워.”

“싸 물어라.”

“코 푼 휴지 같은 건 왜 들고 다니냐?”

“마스카라 똥 닦은 거거든!”

“응. 니 똥 닦았겠지. 으― 더러워.”

“아, 개소리하지 마! 지키 언니 오해하잖아!”

은호의 집게 손에 들려 가방 밖으로 꺼내진 건 누가 봐도 검은 잉크 같은 걸 닦은 듯한 휴지 조각이었다.

은호도 화장품을 닦은 휴지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냥 은지를 놀리려고 일부러 그랬다.

하지만 은지는 그간 욕하는 게 반강제적으로 막히면서 덕분에 욕을 쓰지 않고 상대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는 기술이 늘어났다.

은지는 은호의 약점을 찾던 중, 자주 보이던 카디건과 흰 티셔츠 패션을 포착하며 비열하게 웃었다.

“더러운 건 본인이겠지. 그 ‘교복’, 집에서 며칠 동안 입었던 거 아니야?”

“……야, 아니거든. 그리고 교복은 뭔 소리야.”

은지가 말하는 ‘교복’은 단순했다.

검은 바지 또는 진한 색의 청바지.

반소매, 긴소매 관계없이 흰 티셔츠에 베이지색 또는 갈색 계열의 카디건을 걸친 패션.

은호가 가볍게 외출할 때면 항상, 정말 항상 이런 비슷한 느낌으로 입고 나가는 탓에 붙인 별명이었다.

“다 똑같은 똥색 카디건.”

“아니거든, 그리고 집에서 입던 건 베이지색이었어.”

“응. 똥색.”

“아니라고, 호박 대가리야.”

“이젠 내가 아니라 오빠가 ‘쫌’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거 봐라, 머리통 좀 컸다고 오빠한테 기어오르네.”

“180 초반이면 별로 높지도 않은데 충분히 올라갈 만하잖아?”

현재 시각, 오전 7시 30분.

이응 남매가 투덕거리는 와중에도 마당에서는 승연의 비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키는 이런 풍경이 처음인 듯, 영혼이 증발한 눈으로 해가 차오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기…… 정신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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