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34)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긴 밝은 갈색의 머리칼은 말끔하게 포니테일로 끌어 올려 묶어 끝자락이 동물의 꼬리처럼 흔들거렸다.
동양인의 외모 같으면서도 굴곡이 큰 서양의 외모를 동시에 가진 지키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오.
낯선 지키의 녹색 눈동자를 보자, 은지와 에이슬이 동시에 감탄을 흘렸다.
“그러지 마.”
은지의 반응에 은호가 슬쩍 경고하듯 말했다.
“안녕하세요.”
살짝 어색한 발음이긴 했지만, 어머니가 한국인인 데다가 지키 나름 열심히 노력한 덕분인지 다행히 소통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은호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회귀 전의 그녀는 한국어를 굉장히 유창하게 했기 때문이다.
은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였던 때가 아닌, 몇 년이나 앞서 만났기 때문일까.
베테랑 뮤지션의 여유가 돋보이던 지키는 그때와는 사뭇 다른, 풋풋함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풍겼다.
휙―!
‘왐마, 깜짝이야.’
그때였다.
은지가 갑자기 양팔을 번쩍 들었다.
옆에 있던 은호가 눈에 띄게 화들짝 놀란 그 순간, 은지가 외쳤다.
“와아아아!!! 맞았다!!!”
잠시 당황하던 다른 멤버들은 이내 여덟 번째 멤버 맞추기에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 얻게 될 햄 통조림의 탑까지.
은지뿐만 아니라 은호와 태현을 제외한 나머지가 일제히 “와아아악!”거리며 기쁜 비명을 내질렀다.
이제 막 내려온 지키는 당황스러울 법도 했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미리 안내를 받았었는지 같이 손뼉을 치며 함께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멤버인 지키가 합류하고, 멤버들은 다 같이 정말 논밭밖에 없는 시골길에 들어섰다.
비포장된 흙길을 다 같이 걸으니 자작거리는 걸음 소리가 괜스레 정겨운 기분도 들었다.
멤버들만 해도 여덟.
그 외 각각 개인 카메라에, 추가로 앞뒤에 두 카메라맨이 더 붙어 총 열 대의 카메라가 함께했다.
밭과 밭 사이에 난 길은 절대 좁은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우르르 움직이려니 그런 길도 미어터질 것 같았다.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수녀님 못 뵈러 가는 건 조금 아쉽다.”
은지가 중얼거리듯 흘린 말에 은호가 의외라는 듯 돌아봤다.
“우리 호박 다 익었네.”
“지―.”
“쫌.”
“…….”
평소처럼 ‘지랄’이라며 대꾸하려 했는지, 은지의 입술이 찰지게 앞니를 드러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은호가 반박자 빨랐다.
꾸준한 연습의 결과 덕분인지 은지는 ‘쫌’이라는 경고를 들은 순간 자동으로 입이 닫혔다.
불만 가득한 표정은 감추지 못했지만, 방송 사고급으로 욕설을 남발하던 은지치고는 정말 큰 발전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이은지요?”
그때였다.
지키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타이밍 탓에 은호는 당연히 은지가 욕할 줄 어떻게 알았냐는 말처럼 들었기에 그렇게 대답했다.
지키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소극적으로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상황을 풀어낸 건 곁에서 모든 걸 지켜봤던 태현이었다.
“은호야, 네가 지키 씨 이야기를 제일 먼저 꺼냈었잖아.”
“네. 그랬죠.”
“그거 여쭤보신 거야.”
“아, 아아.”
“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은호가 이해했다는 듯 입을 연 그때.
은지가 소곤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
되지도 않는 애드리브에 은호가 살짝 짜증 섞인 표정으로 은지를 돌아봤다.
“왜, 솔직히 피식했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딴 드립에 피식해서 더 빡쳤으니까.
은지는 자괴감에 절여지는 은호가 재밌었는지 킬킬거리다, 지키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수한 표정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은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은지를 무시하고 지키에게 대답했다.
“그냥, 생각하다 보니, 지키 씨가 나왔어요.”
“그래요?”
지키가 눈을 휘며 웃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운 마음에 은호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긴가?”
승연이 외쳤다.
멤버들의 시선이 앞서 걷던 승연을 따라 한곳으로 향했다.
갈색 페인트가 발린 빛바랜 철문 너머 고즈넉한 시절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한 기와집이 보였다.
앞으로 이틀간 여덟 멤버가 함께 지낼 집이었다.
“진짜, 기와집이네.”
은지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소리를 들은 은호가 물었다.
“뭘 기대한 거야?”
“뭘 기대하긴, 한옥 마을처럼 좀, 그런 거 있잖아.”
“현대화?”
“어, 뭐, 그런 거. 근데, 여기 뭔가 우리가 살던 폐가도 관리가 잘 됐으면 이런 느낌이었을 거 같기도 하다.”
“그런가.”
은지를 따라 풍경을 구경하던 은호가 답했다.
“그러네.”
대문 앞에 선 멤버들 중 대표로 류석현이 대문에 노크를 했다.
쾅쾅쾅.
살살 두드렸음에도 얇은 철판을 댄 대문은 동네를 울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관리인에게 안내를 받은 이후에 촬영을 이어 가기로 했던 탓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였다.
“어? 여기, 벨 있어요, 선배님.”
“아.”
승연이가 철문 옆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승연의 말대로 벽에는 떡하니 벨이 붙어 있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석현은 벨을 눌렀다.
빠아악―!
“풉.”
류석현이 벨을 누른 그 순간.
까마귀의 울음 같은 그야말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낯선 벨소리에 멤버들 전부가 일제히 화들짝 놀랐다.
“핰핰핰핰핰!”
가장 먼저 은지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숨넘어갈 듯 웃음이 터졌다.
이후 은지의 웃음이 전염이라도 된 듯하나같이 다들 배가 아플 정도로 웃고 있었다.
한창 그렇게 떠들썩하던 그때, 대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한 노인분께서 나오시며 물었다.
“눈교?”
“아,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오늘 촬영한다고 연락드렸던…….”
“아, 아이고, 미안합니더. 내 귀가, 쬐매 귀가, 그래가.”
창석이 없는 동안 고향 집을 한 달에 두 번씩 꾸준히 관리해 주신 관리인이자, 동네 어르신이셨다.
박 대표가 가진 건물이 여러 개라, 일이 바빠서 직접 관리가 힘든 만큼 주변 분들께 일정 공간을 제공해 주는 동시에 일정 금액과 함께 관리를 부탁드리고 있었다.
말이 ‘관리’지.
몇 주에 한 번씩 청소를 부탁하는, 딱 그 정도.
하지만 사람 운이 좋은 건지, 대부분 꼼꼼하게 관리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었다.
이번 촬영에 이용될 이 고향 집 역시 그러했다.
덕분에 기와집 내부는 창석이 오랜 기간 들르지 않은 것치고는 상당히 깨끗한 편이었다.
“테레비에 뵈기 좋으라고 얼마 전에 창도 함 갈았고…….”
어르신의 안내에 따라 여덟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집 안을 구경했다.
“여는, 사장님한테 허락 받고 동내 아지매들이 쓰고 있는 밭입니더. 에, 저건 꼬추고, 저는 깻잎이고, 또…… 쩌, 호박은 잎이 실해서 쪄가 쌈 싸 먹으면 에, 맛이 좋습니다.”
“호박잎으로 쌈을 먹을 수가 있어요?”
에이슬이 동그래진 눈으로 류석현을 돌아봤다.
“왜 나한테 물어. 나도 듣기만 했어.”
류석현도 낯선 소리였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삼촌 나이도 있으면서.”
“갑자기 나이 공격하기 있어?”
에이슬이 입을 비죽이며 장난스럽게 투덜거리자 류석현이 발끈하며 반박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투덕이는 동안, 은지는 실한 호박잎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호박 쌈, 매력 있지. 안 그래?”
“개인적으로 난 별로.”
“맛있는데. 초딩 입맛.”
“쫌.”
“흥.”
은호와 은지의 투덕이는 소리에 에이슬이 두 사람을 돌아봤다.
에이슬은 눈빛으로 ‘먹어 봤어요?’라며 물었다.
“꺼끌꺼끌해서 싫어, 난.”
“그게 뭐가 꺼끌하다고, 아, 이은호 음식 먹을 줄 몰라. 매력을 모르네. 매력을, 강된장 딱! 올려서 냠! 하면! 을~매나 맛난데!”
“하하하.”
“하하하하, 은지가 먹을 줄 아네.”
은지가 마임으로 쌈을 먹는 시늉을 하자, 승연과 태현이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도 따라 웃으시다가 마저 밭 설명을 이어 갔다.
“저긴 정구지 심어 놨으니까, 찌짐을 해 무도 괜찮고…….”
그때였다.
“저, 정구지? 찌짐, 해 무? 해 무가 뭐, 뭐예요?”
에이슬은 혼란스러워하며 바쁘게 주변을 돌아봤다.
‘아…….’
은호는 일부러 무시하려다, 에이슬의 간절한 눈빛에 못 이겨 무뚝뚝하게 답했다.
“정구지는 부추예요. 부추로 부추전 해 먹으면 맛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 아하!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은호에게 허리를 숙여 가며 꾸벅 인사하는 에이슬.
‘내가 쟤한테 선배라느니, 감사하다느니 하는 인사를 듣는 날이 올 줄이야…….’
은호는 여전히 그런 에이슬이 적응되지 않지만, 그런 찜찜한 기분을 애써 감췄다.
이후 에이슬은 ‘정구지’와 같이 나름대로의 단어 지식이 늘어난 덕분에 순간 자신감이 생겼었지만.
“데파 물 때는 렌지는 여 있고…….”
“대, 대, 대파를 먹을 때 왜, 전자레인지를…….”
문제는 이어진 어르신의 본토 사투리 안내에 에이슬의 올라간 자신감이 다시 곤두박질쳤다.
“아. 오신다 캐가 장에 내가 나가가 귤 도 쫌 사 놨는데, 하우스 껀지 쫌 마이 쌔그러버가 설 분들이 좋아하실런지는 모르겠네.”
“쌔, 쌔그러버……?”
어르신이 입을 열 때마다 에이슬은 눈앞이 핑핑 도는 듯했다.
에이슬은 그런 와중에도 어르신께서 혹여나 기분이 나쁘실까.
대놓고 못 알아들은 체는 못 하고 그럴 때마다 소곤거리며 ‘정구지’의 구세주였던 은호를 돌아봤다.
「“지금이 귀여우니까 말해 주지 말아 봐. 하핰핰.”」
괜히 불붙은 은지의 장난기에 불똥이 튀고 싶진 않았던 은호는 에이슬의 시선이 닿는 걸 느낄 때면 조용히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마, 맛이 세다는 건가?’
아무도 일러 주는 이가 없으니, 에이슬은 나름대로 갸웃거리면서 스스로 해석해 나갔다.
에이슬은 이후에도 혼란스러워하며 어르신의 설명을 따라가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문제는 사투리도 사투리였지만 지역적인 특징인 건지, 어르신은 말씀하시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그 결과.
“어떡해, 나만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메이크업을 한 것도 잊은 채 에이슬은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울적해했다.
“괜찮아요. 나는 더 못 알아들었어요.”
절망한 에이슬에게 위로의 말과 함께 다가간 유일한 사람은 지키였다.
어르신은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껄껄 웃으며 일부러 더 빨리 말하며 장난을 치시는 것 같기도 했다.
설명을 마친 후 떠나려는 어르신께 은호가 가장 먼저 앞장서서 인사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려요. 잼나게 있다 가요들―.”
은호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한 명씩 인사를 덧붙였다.
설명을 마친 어르신은 손을 흔들며 제작진과 ‘같이 쫌 살자’ 멤버들을 남겨 두고 기와집을 대문을 떠났다.
“공부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봐. 나만 못 알아들어. 오빠는 알아들었어……?”
“눈치껏 알아들었지. 그냥 네가 특별히 더 바보라서 그래.”
시우의 시비에 에이슬이 도끼눈을 뜨며 노려봤다.
“괜찮아. 괜찮아. 모르면 뭐 어때. 내가 다 알려 줄게.”
그때, 은지가 에이슬에게 말했다.
에이슬은 눈을 반짝이며 은지를 바라봤다.
훈훈한 분위기였다.
“참나, 본인이 더 돌머리면서 가르치긴 뭘 가르쳐 준다고…….”
은호가 콧대가 높아진 은지를 비웃으며 한마디 더하기 전까진.
“아, 이은호. 짜증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