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30)
창석의 눈길은 느끼지 못한 채, 은호는 검은 노트에 메모까지 해 가며 진지하게 회의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
한동안 창석의 말이 이어지지 않자, 그제야 은호는 노트에서 눈길을 돌리며 창석을 바라봤다.
“……왜요?”
“뭐가?”
“……저 뭐 실수한 거 있어요?”
눈이 마주치자, 은호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창석은 대답과 동시에 입꼬리를 늘이며 씨익 웃었다.
은호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안한 미소였다.
“뭐예요. 그 불안한 표정은.”
“은지를 교정할 방법 중에 괜찮은 방법이 하나 떠올라서.”
“……?”
괜찮은 방법이라는 것치고는 창석의 의미심장한 표정 때문에 은호는 괜히 불안감만 커졌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은호가 걱정하던 그때였다.
“마법의 단어를 정하자.”
“마, 뭐요?”
“마법의 단어!”
황당해하는 은호와 달리, 최근 ‘메르헨’ 분야에 관심이 많은 은지는 눈까지 빛내며 좋아했다.
하지만 창석이 설명을 이어 가자 이후에는 처음과 반대로 은호가 호쾌하게 웃고, 은지는 큰 실망을 드러냈다.
‘마법의 단어’라는 건 은지가 본인도 모르게 입에 붙은 ‘X랄’, ‘X친’, ‘X발’ 등의 말실수를 할 것 같을 때마다 은호가 외칠 단어를 정하자는 말이었기 때문.
그리고 은호가 그 단어를 외칠 때 은지는 ‘무조건’ 어떤 말을 하려고 했더라도 멈춰야만 한다.
그야말로 은호의 말이 곧 목줄이나 따로 없는 것이다.
하지만 창석은 이 방법이 통하리라 믿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통통 튀는 은지의 반응을 적어도 은호만큼은 알 수 있으니까.
즉, 창석은 은호에게 합법적으로 은지의 입을 닫게 할 권한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아―!”
“쫌.”
“…….”
마법의 단어는 ‘쫌’으로 결정 났다.
은호는 은지에게 듣기 싫은 말이 나올 것 같을 때마다 아주 유용하게 ‘마법의 단어’를 애용했다.
방송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은지의 ‘주둥이 교정’ 특훈은 계속됐다.
창석의 예상대로.
아니. 오히려 예상치보다도 효과는 훨씬 뛰어났다.
은호가 은지의 타이밍을 130% 정확하게 잡아냈기 때문이었다.
창석은 잘됐다고 생각했다.
30%의 초과한 남발은 잊은 채.
그 30%로 인해, 불어올 폭풍은 전혀 모르는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좋은 결과에만 눈이 멀었다.
그동안 은지는 할 말이 틀어막힐 때마다 차츰 이름 모를 ‘게이지’가 한 단씩 쌓여 갔다.
작은 수류탄 생산을 멈췄더니 미사일이 생성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 사실을, 은지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로.
* * *
어느새 시간은 흘러 ‘같이 쫌 살자’의 첫 촬영 날이 다가왔다.
「“진짜 모르고 만나야 조금 더 현실감 있는 반응이 나오지 않겠냐.”」
창석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명인 PD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촬영 당일까지도 스태프와 PD 외 출연자들은 누가 출연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누가 나올까.”
“에이슬이 나오겠지.”
은호가 중얼거리자, 은지는 당연한 것 아니냐며 말을 덧붙였다.
“……걔 말고, 내가 그걸 몰라서 말했겠냐.”
“어머, 난 몰라서 그런 줄 알았지.”
“…….”
은지는 최근 욕을 줄이는 만큼 은근히 돌려 ‘까는’ 레벨이 올라갔다.
“그래. 이 오빠가 눈치가 부족했네.”
“……?”
“우리 호박이 여기까지 이해하려면 조금 더 익어야 하는데 말이야.”
싱긋, 은호가 가식이 듬뿍 담긴 미소를 짓자 은지는 턱을 두 개로 만들며 질겁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은지의 레벨이 올라간들 말로는 아직 은호에게 무리였다.
한편, 평소와 다름없이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기와 현우는 뿌듯하게 웃었다.
‘많이 발전했네.’
적어도 이제 물건이 날아다니거나 하는 일은 눈에 띄게 줄었으니까.
슬기와 현우, 두 사람만큼은 은지가 나름대로 성장을 하기는 했다는 걸 크게 체감하고 있었다.
리얼 버라이어티라 걱정이 많았는데, 한결 걱정을 덜었다.
그동안, 현우가 운전하는 밴은 서울역 구석에 멈춰 섰다.
“어흐, 추워.”
은지는 차에서 내린 그 순간, 이를 덜덜 떨며 말했다.
“그러게.”
뒤이어 차에서 내린 은호도 추운 건 마찬가지인 듯 은지의 말에 가볍게 맞장구를 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쌀쌀한 날씨였다.
하지만 몸에 직접 닿은 바람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찼다.
따뜻한 차 안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더 추위를 강하게 느끼는 듯했다.
‘해라도 쨍쨍하면 좋았을 텐데.’
가뜩이나 하늘까지도 곧 비나 눈이라도 올 듯 안개가 잔뜩 낀 흐린 날이었다.
미리 촬영 안내를 받은 만큼 은호와 은지는 태연하게 따라붙은 카메라맨과 함께 촬영지로 향했다.
“쟤들 이응 남매 아니야?”
“헐! 맞아!!!”
카메라가 비치는 곳에는 은호와 은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메라맨 너머로는 호기심에 이끌린 구경꾼들이 놀랄 정도로 굉장히 많이 모여 있었다.
“이응이다!”
개중에선 은호와 은지를 알아보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았다.
“은호야!!!”
“하핰.”
목청껏 내지르는 부름에 못 이긴 듯 은호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꺄아아악!!!”
“은지야! 사랑한다!!!”
그때였다.
역사에 우렁찬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은지는 추위에 끼고 있던 팔짱까지 풀며 양손을 번쩍 들어 그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와아아아!!!”
기뻐하는 팬들의 반응에 은호와 은지는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후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촬영 중인 만큼 팬들과 긴 인사를 나눌 수는 없었던 점은 다소 아쉬웠다.
그렇게 도착한 촬영 장소.
웬 간이 테이블 위에 구멍이 뚫린 네모난 하얀 상자가 놓여 있다.
“……?”
은호와 은지는 갸웃거리며 네모난 상자를 이리저리 바라봤다.
손을 대지는 않았다.
경고를 받을 것 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면에 앉아 있는 유 PD의 눈빛이 수상하달까.
꼭 누구 하나 걸리기를 바라는 미끼를 놓은 듯한 강태공의 분위기를 띠고 있어서였다.
“어! 누구 또 온다!”
인파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그 소리에 은호와 은지도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는 곳에서 물결을 닮은 펌이 들어간 것 같은 밝은 갈색 단발머리의 한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잔머리 같은 느낌의 앞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질까.
여자는 양손으로 이마와 앞머리를 붙잡으며 철통 방어에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왔네, 그분이.”
“…….”
마이크를 설치하는 동안인지라, 아직 목소리가 들어가는 상태는 아니었다.
이때다 싶었는지 은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은호는 그런 은지를 무시하며 에이슬에게 간단히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아, 안녕하세요!”
은호의 인사를 받은 에이슬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라도 겪은 것처럼 이마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오는 의문의 손님은 에이슬뿐만이 아니었다.
“오, 벌써 많이 모여 있었네.”
에이슬의 뒤에서 누군가 은호와 은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에이슬과 은지는 놀랐고, 은호는 무뚝뚝하던 얼굴에 갑자기 굉장히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형!”
“우리 막내!”
은호가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다가갔다.
서승연은 들고 있던 가방까지 내던지며 은호에게 팔을 벌렸다.
“아……!”
하지만 서승연의 상상과 달리 은호는 가뿐하게 승연을 무시하더니 곧장 태현에게 향했다.
“뭡니까? 출연하면 출연한다고 미리 말 좀 주시지!”
“서프라이즈.”
태현이 웃으며 말한 그때였다.
“이 자식, 넌 형은 없는 사람 취급이냐?”
서승연은 무시당한 분을 담아 은호의 목에 헤드록을 걸었다.
이어서 서승연이 주먹으로 은호의 정수리를 꾹 누르자 버튼이라도 되듯 은호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미안해, 안 미안해, 인마!”
“하하핰, 죄, 죄송해요. 악!”
서승연을 무시한 건 놀리기 위해 일부러 그랬던 건지, 은호는 눈물이 찔끔 맺힐 정도로 아픈 와중에도 낄낄거렸다.
‘인사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 낯설기만 한 듯, 에이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중간에 서 있기만 했다.
에이슬은 혹시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었는지 은지를 돌아본 그때였다.
‘어……?’
에이슬은 은지의 진심이 스친 표정을 애써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상황, 선배님도 처음 겪으시는 건가?’
* * *
최태현과 서승연이 등장하자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지면서 그런 형들을 반기는 이은호.
그런 은호를 은지는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까지 잘 알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이 기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굳이 이름을 붙여 보자면, ‘시원섭섭’한 그런 기분일까.
톡신 선배들 틈에서 이은호는 내가 있는데도 ‘막내’라고 불린다.
[은호 ― 이은지가 있는데 왜 제가 막내입니까…]
거기서 관계가 단절된 기분이 들었지만, 이은호가 반박하니까, 그땐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은호는 어느샌가 ‘막내’라는 호칭을 그냥 받아들인 듯 보였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
나도 모르겠다.
이은호는 내 친오라비니까?
하나뿐인 내 가족이니까?
넌 저 그룹이 아니라 나랑 그룹인데, 저기서는 이은호의 행동이 꼭…….
‘나 같아.’
이은호는 소름 돋을 정도로 낯설었다.
내 앞에서 이은호는 항상 어른인 척만 해 댔으니까.
하지만 지금 은호는 태현과 승연의 등장 이후, 진짜 막내가 된 것처럼 형들에게 투정을 부렸다.
“형, 출연은 언제부터 결정한 거예요?”
“너희가 이름 바꿨다며. 그때부터.”
“아. 하핰.”
서승연의 헤드록에 걸려 끌려오면서도 은호는 계속 웃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은지, 하이.”
은지는 사실 같은 단톡방에 있음에도 은호만큼 톡신 멤버들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회사 동료와 지인 정도는 되지만, 성별 탓일까.
은호처럼 형, 동생 하는 그런 사이까지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어쩐지, 유쾌하지 않다.
그때였다.
은지는 순간 등 뒤로 미세한 인기척을 느꼈다.
‘지금 촬영 중인데 어떤 새끼가…….’
은지의 예상대로 등 뒤로 큰 그림자가 스멀스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에 빠져 있다고 한들, 이 정도도 눈치 못 챌 만큼은 아니었다.
은지는 당장이라도 반격이 가능한 자세를 취하며 몸을 돌려 뒤에 선 존재를 확인했다.
“와악! 은, 은지 씨.”
“…….”
은지가 몸을 돌리자, 뒤에는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익숙한 사람이 심장 부근을 붙든 채 놀란 한숨을 흘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 있었는데…….
“류석현 선배님?”
그때였다.
은호의 말에 은지는 순식간에 머릿속 폴더에서 ‘체인지 파트너’ 프로그램의 MC였던 사람을 떠올려 냈다.
“아!!!”
은지가 뒤늦게 알아채던 그때, 태현과 승연은 은호와 함께 은지 곁으로 다가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내가 여기 MC인데? 하하.”
류석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한 명이 아직 안 왔네.”
“누가 또 와요?”
은호는 손가락으로 인원을 셌다.
총 여섯 명.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종이봉투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바쁜 발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