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26)
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오후 6시 57분.
은정은 들뜬 기분으로 창 너머의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쏟아질 것 같더니, 하늘도 이응이들의 컴백을 반기듯 오늘 오후가 되자 날씨가 맑아졌다.
곧 겨울이 올 건지 쌀쌀한 바람에 뼈가 살짝 시린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 은정의 옆자리에 막 주문한 메뉴가 나온 듯 휘핑크림이 화려하게 올라간 카페모카 한 잔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올려진 쟁반이 놓였다.
“시작했어?”
“아직. 빨리. 앉아.”
커피는 은정이 샀다.
이유는 은정의 노트북이 불안하더니만 결국 최근 저승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이응의 복귀 소식을 들었고, 피시방에서는 집중이 되지 않기에 덕질 메이트인 신일의 도움을 받았다.
신일은 고작 화면을 같이 본다는 이유로 받기만 한 게 미안했는지, 커피를 챙겨 오는 건 자신이 하겠다며 가지고 온 참이었다.
물론, 연인은 ‘절대’ 아니고, 순수한 덕질 메이트인, 친구 사이다.
관계를 증명하듯 신일은 노트북으로 이응의 오튜브 채널을 틀어 두고 휴대폰으로는 NRY 홈페이지에 뜬 은지의 프로필 사진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와.”
시종일관 모든 일에 흥미 없고 기운 없던 신일은 은지의 사진과 영상을 볼 때면 애정이 깊다 못해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옆자리에서 들린 감탄 소리에 은정이 호기심을 느끼며 물었다.
“뭐 보냐?”
“은지.”
“그럼 그렇지.”
은정은 웃으며 다시 화면을 돌아봤다.
“59분이다! 으아.”
은정은 손을 깍지를 꼈다가 풀었다가 하며 긴장한 마음을 달래려 애를 썼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야, 야. 신일아, 이거 봐.”
은정이 웃으며 가방에서 손을 빼내자, EG 봉이 나타났다.
“하하, 본격적이네.”
신일이 은정의 준비성에 감탄하던 그사이, 영상이 떴다.
“아.”
그때였다.
은정은 EG 봉을 꺼내면서도 화면에는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는지, 곧장 무선 마우스에 손을 올리며 본능에 가까운 속도로 영상을 재생했다.
[E-UNG(이응) ― 저주(Curse) MV]
묵직한 현악기의 연주가 시작되고, 화면 속에는 밤하늘 중심에 종이 상자 위에 그려진 가짜 달이 실에 매달려 있다.
뿌우-!
장난스러운 트럼펫 연주와 함께 화면이 아래로 향하며 달과 마찬가지로 실에 연결된 알록달록한 종이 패널들이 화려한 서커스단으로 나타났다.
저글링을 하는 광대와 외발 타기를 하며 아슬한 줄을 타고 건너는 광대.
우리에 갇힌 호랑이를 꺼내고 있던 광대까지 등장하면서 종이 패널로 만들어진 서커스단의 공연이 시작됐다.
베이스가 트럼펫에 맞춰 둥둥거리며 흥분을 고조시키던 그때.
딱!
검은 재킷을 걸친 검게 칠한 손톱이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손을 튕기자, 투두둑.
서커스단과 연결된 실이 일제히 끊어졌다.
화려한 서커스장에는 이제 쓰러진 종이 패널들밖에 없었다.
짝, 짝, 짝, 짝
일정한 남자의 박수에 맞춰 음악은 천천히 새로운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를 시작하는 악기들은 이전과 다르게 베이스와 드럼, 스냅으로 이뤄져 있었다.
“어, 이거!”
그때였다.
화면에 나타난 익숙한 검은 편지 봉투.
은정이 알고 있는 봉투였다.
은호의 편지가 들어 있었던 그 편지 봉투였으니까.
반가운 마음에 은정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 버렸다.
“쉿.”
신일이 조용히 하라는 경고를 보냈다.
은정은 ‘앗, 미안.’이라며 소리 없는 사과를 전한 뒤 다시 화면에 빠져들었다.
붉은 왁스를 가르고
도착한 초대장
색은 검정
아무것도 아무 일도
은호는 노래할 때 자주 쓰던 간드러진 미성(가성)이 아닌 평소 말할 때의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세상이 장난 같아
내 현실이 저주 같아
낮은 목소리 탓인지, 조금 전 실들이 끊어지고 고요해진 서커스단처럼 굉장히 우울한 분위기의 노래인 것 같았다.
이어서 사라졌던 트럼펫이 폭발하듯 제 소리를 내기 전까진 그랬다.
트럼펫과 동시에 새하얀 빛이 쏟아지는 풍경 속에서 화려한 눈이 뜨였다.
화면에 전환되자 찰랑거리는 큐빅으로 만들어진 줄이 흔들리고 이어서 하얀 드레스 차림의 은지가 나타났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허리를 시원하게 드러낸 드레스에 신일은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 저 주세요 저주
(나쁜 꿈 싫은 꿈)
세상 사랑스러운 미소로 웃으며 은지가 노래하자, 코러스로 우울한 은호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하지만 은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노래를 이어 갔다.
응응
그럴 때도 있지
시종일관 맑은 은지의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은지의 화면과 대비되는 컴컴한 풍경에서 은호의 눈이 뜨였다.
주문을 외워 가져가라 말해
붉은 눈매와 함께 반짝 붉었던 눈동자는 이내 다시 제 색을 되찾듯 갈색을 띠었다.
나 주세요 저주
(싫은 꿈 그런 꿈)
응응
넌 그냥 꿈을 꿨지
흑백밖에 없는 세상이 사라지고, 은호와 은지는 의상이 바뀌었다.
그럴 때도 있어
그럴 때도 있지
나무 아래를 거니는 새파란 한복 차림의 은지와 이어서 부채질을 하는 늘어진 선비 같은 차림의 은호가 나타났다.
눈을 뜨는 매일
은호가 눈을 뜰 때면 화면이 여러 차례 바뀌며 다양한 세계를 오갔다.
그중에는 TIME 앨범의 뮤직비디오 장면에서 촬영했던 은호의 정면 모습들도 있었다.
마지막에는 ‘호냥’ 모습의 은호를 끝으로 은호는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착한 놈은 상을 받고
신선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안겨 드는 한복 차림의 여자 실루엣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악한 놈은 벌을 받고
사람을 죽인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쥔 채 당황하고 있던 남자를 호랑이로 보이는 실루엣이 갑자기 나타나 집어삼켰다.
이어서 화면은 전환되어 하얀 배경에서 은호의 노래에 ‘그렇지!’라는 듯 은지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활짝 웃었다.
한 발짝 멀리, 대각선으로 나눈 흑백의 배경.
은호는 검은 배경에서 하얀 배경에 선 은지를 따라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은호의 눈이 뜨였을 때, 시선은 여전히 냉정하고 싸늘하기만 했다.
흑백 논리로 나누기엔
색이 너무 많아
은호의 눈빛이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를 말하듯, 조금 전 보였던 실루엣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복 차림의 은지는 싫은 표정을 드러내며 신선 같은 존재에게 안겨 있었다.
이어서 피가 튄 듯 곳곳이 붉게 물든 한복 차림의 은호가 웃으며 손을 떨고 있었다.
그때, 다가온 호랑이에게 은호가 피에 절은 채 웃으며 말했다.
‘왜 이제 왔어.’
‘늦었잖아.’
은호가 웃자, 호랑이는 그림자로 변하며 은호를 집어삼켰다.
그러니 저 주세요 저주
하얀 배경의 은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비슷한 훅 부분이 반복됐지만, 장면은 그러지 못했다.
나쁜 꿈 싫은 꿈
(응응 그럴 때도 있어)
은호의 과거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반복됐다.
대부분 장면에서 은호는 지켜보기만 하거나, 사건의 주동자가 되는 등 ‘나쁜’ 역할로만 나타났다.
그때마다 동시에 그 시간의 은지도 함께 비추는 것 같았다.
은호가 씁쓸하게 곧 울 듯한 눈을 하며 말했다.
주문을 외워 사라지라 말해
자비 따윈 바라 않아
은호의 말에 대답하듯 은지가 코러스를 얹었다.
(사과조차 원치 않아)
은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쉽게 말하지 말라는 듯, 경고의 눈으로 은지를 바라보는 은호.
은호는 끝까지 대꾸하며 은지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어딘가 비틀린 듯한 미소였다.
하나를 넘으려니
또 하나가 짓눌러
호환을 당한 첫 죽음을 앞둔 장면.
일어나 달리려니
또 하나가 짓눌러
여러 번 생을 반복한 이후의 술에 취해 눈을 감은 죽음.
모든 죽음에서 은호의 곁에는 항상 먼저 눈을 감은 은지가 있었다.
다다른 결승점
트로피는 없어
‘결승점’이라는 단어에 맞춰 다시 흑백의 배경이 나타나며 은호는 은지를 바라봤다.
난 항상 겁이 나
감으면 사라질까
저주받은 내 앞날처럼
‘저주받은 내 앞날처럼’
찰나에 지나간 장면에, 호랑이였던 검은 그림자가 은호에게 사납게 일렁이며 어떤 이야기를 하는 듯 보였다.
미친 척 웃던 은호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져 갔다.
승자를 말하기엔 끝점이 달라
닿을 끝이 달라
너는 너 나는 나
우린 너무 달라
쉽게 말하지 말라는 듯, 경고의 눈으로 은지를 바라보는 은호.
세상이 장난 같아
누가 말해
현실이 지옥이래
은호의 앞에는 연기와 같은 실루엣이 되어 붉은 눈을 빛내는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은호는 그에게 말하듯 웃으며 노래를 이어 갔다.
그럼 말해
난 이 지옥이 딱이라고
연기를 거둬 내며, 은호는 검은 배경을 지나 흰 배경으로 나아가며 노래를 이었다.
내 현실이 저주 같아
(그러니 저 주세요 저주)
나쁜 꿈 싫은 꿈
(응응)
한편, 은지는 끝까지 고집스럽게 제 의견을 밀어붙였다.
그럴 때도 있어
끝까지 그러지 말라 경고하듯 은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주문을 외워
가져가라 말해
싫은 꿈
그런 꿈
끝내 은지의 고집에 져 버린 듯 은호는 포기한 것처럼 한결 기운이 빠진 나긋한 목소리로 노래를 이었다.
한편, 어쩐지 우울하던 처음보다는 편안함이 한 스푼 더해져 있는 느낌이었다.
검은 배경과 함께 은호의 모습이 재가 되듯 흩날려 간다.
응
넌 그냥 꿈을 꿨어
사라져 가는 은호를 보며, 은지가 노래했다.
그간 홀로 고생한 너를 위해 나
가진 짐 나눠 지고 함께 설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우리가 살아가게
모든 게 사라지고, 새하얀 풍경에는 피처럼 붉은 물이 일렁이는 욕조가 나타났다.
(그거면)
응
은호의 목소리에 대꾸하듯 은지는 욕조 끝에 선 채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잠시 후, 은지는 눈을 감은 채 몸을 돌리며 푹신한 침대에 눕듯 몸을 던졌다.
흰 타일로 만들어진 거대한 욕조 속 붉은 물이 화려하게 폭발하듯 튀며 화면으로 쏟아졌다.
붉은 파도가 화면을 뒤덮은 이후.
붉은 물결 위로 한복 차림의 두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마당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은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은호.
은지가 못난 그림을 자랑하자, 은호는 입꼬리가 길어지더니 이내 이마를 짚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과거의 일을 보여 주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붉은 물결은 곧 그림자라도 드리우듯 서서히 검게 변해 갔다.
다시 화면에 은지가 나타났을 땐 상사화로 빼곡하게 장식된 어느 방 안이었다.
은지는 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은호 앞에 섰다.
한편, 은지의 옷 끝자락에는 검은 얼룩.
얼룩은 드레스에 서서히 번져 가며 은지를 좀먹어 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얼룩이 옷을 넘어 피부를 모두 집어삼켰을 때.
새까매진 은지는 입을 열어, 노래를 마저 이었다.
그것만
나는 바라
노래가 끝난 뒤.
뮤직비디오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노래가 사라진 자리에는 슬라임이 꿀렁거리는 것 같은 소리만 남았다.
새하얬던 은지의 의상은 파인 왼 허리와 화려했던 큐빅 줄 장식들이 모두 사라졌다.
드레스 또한 오른쪽 어깨는 여전히 드러냈지만, 허벅지 절반을 가리는 단순한 디자인의 원피스로 바뀌었다.
“아…….”
변할 은지의 의상을 기대하고 있던 신일은 조금 아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그때였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검은 물질이 파도처럼 퍼져 가며, 상사화 모양의 자수가 새겨진 쉬폰 원단이 자라났다.
나타나는 쉬폰 원단은 은지의 왼 어깨에서부터 끌릴 듯이 긴 드레스의 형태로 변했다.
“와.”
신일의 표정은 ‘이거지!’를 말하듯 다시 환해졌다.
그리고 영상의 마지막 장면.
“헉…….”
영상의 마지막에는 은지가 이전의 선한 미소가 아닌, 정반대 분위기의 사악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끝났다.
선일은 클로즈업으로 잡힌 은지의 미소에 조용히 심장 위로 손을 올리며 가쁜 숨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