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24)
도진이 NRY 엔터테인먼트에 입사 후, 경력직이라고는 하나 턴업과는 다른 회사인 만큼 적응하는 기간을 갖기로 했다.
현재 NRY 엔터테인먼트의 매니저는 현우뿐이기에 신입의 선임은 자연히 현우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곧 나올 신곡 <저주>의 뮤직비디오 촬영 날.
슬기가 밤샘 작업을 하며 제작한 은호와 은지의 의상들이 빛을 보는 날이었다.
은호는 맨살에 정장 재킷을 걸친 뒤 촬영장으로 향했다.
정장 재킷의 깃 부분엔 슬기가 손수 붙였던 검은 타조 깃털들이 은호의 움직임을 따라 고상하게 흔들렸다.
깃털 위로 흩뿌려진 굵은 글리터와 은호의 머리칼에 흩뿌려진 반짝이가 촬영장에 화려하게 켜진 조명 빛을 받자 고급스럽게 반짝였다.
붉은 느낌의 메이크업이 된 은호의 눈매 끝.
오른쪽 눈의 애교살 아래 뺨에는 검지 손톱만 한 새까만 눈물 모양의 보석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은호 씨, 이쪽으로 잠시만 와 볼래? 이것 좀 봐 줘.”
“늦어서 죄송합니다.”
“뭐, 됐어. 오래 걸린 만큼 예쁘네.”
“예쁘다뇨…….”
“관능적이라고 하기엔, 내 눈엔 창석 오빠가―.”
“아, 네. 그래서 뭘 보라고 했죠?”
신혼부부의 닭살 돋는 애정 표현을 차마 맨 귀로 듣고 싶지 않았던 은호는 철수 PD의 말을 싹둑 자르며 물었다.
철수 PD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은호에게 그림으로 가득한 콘티 용지를 내밀었다.
은호가 진지하게 회의를 나누고 있는 그동안, 은지는 아직 의상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 * *
깔끔하게 틀어 올린 채 비녀를 꽃은 고상한 머리.
하지만 차분한 머리와 다르게 오늘 은지가 입을 의상은 오른쪽 어깨가 시원하게 드러나며, 왼쪽 갈비뼈부터 골반까지 타원형으로 과감하게 파낸 하얀 드레스였다.
처음 오늘 입을 드레스를 마주한 은지는 생각했다.
‘한 달 내내 떡볶이, 잘 참았다.’
어떤 의상을 입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밥 외에 빵도, 사랑하는 떡볶이도 끊고 PT도 하루 세 번이나 받았다.
사실 박 대표는 그렇게 힘들게 관리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은지가 고개를 저었다.
‘카메라가 얼마나 부어 보이게 나오는데……!’
회귀 전 기억이 있던 은지는 데뷔 당시 그때와 같은 수모를 다시 당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딱히 수모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회귀 전 데뷔 당시 은지는 박 대표의 ‘괜찮아.’라는 말을 믿어 버렸다.
뒤늦게 카메라에 비친 제 모습을 TV로 접한 은지는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숨이 턱 틀어막혔다.
카메라는 냉정했다.
‘다들 멋있었다고 말했지만…….’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내 모습이, 상상 속의 내 모습보다 부족했던 이유가 컸다.
미운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이라 아직은 어색한 시선 처리부터, 긴장한 나머지 가사를 까먹어서 급하게 애드리브로 넘어가는 모습도.
오히려 그 부분으로 더 많은 반응을 끌어내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연습했던 모습 그대로 100%를 선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여러 방면에서 열심히 관리했다.
기억이 돌아온 이후로는 뮤직비디오 촬영이 있다고 하면, 그때 생각이 나서 더더욱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건 그 결과였다.
남들이 뭐라든.
내가 노력해서 내가 도달한 내 목표치.
그래서 더 좋았다.
드레스 하나만 봤을 땐 앞도 길이가 길어 보였는데.
막상 입고 나니 키 탓인지 허벅지 절반을 겨우 가릴 길이였다.
하지만 반전으로 뒤는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언밸런스 형태의 드레스였다.
‘좋아. 완전.’
사락.
은지는 거울 앞에서 몸을 돌려 보며 모습을 확인했다.
은지의 움직임에 따라 긴 드레스의 끝이 바닥에 끌리며 허리춤부터 투명한 큐빅으로 이뤄진 줄들이 걸음마다 화려하게 찰랑였다.
“마음에 들어?”
“X나요.”
“하하하하.”
슬기의 물음에 본의 아니게 욕을 섞어 가며 격하게 기쁜 마음을 표현해 버렸다.
하지만 슬기는 기분이 나쁘기보다 뿌듯하기만 한 듯, 은지의 드레스 끝자락을 매만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입은 거 보니까 밤새 뜯어고친 보람이 있네. 메이크업도 물에 젖어도 안 질 정도로 튼튼하게 했어.”
슬기는 작품 같은 은지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의도적으로 드러낸, 갈비뼈부터 골반 부분 중심에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이는 11자 복근까지.
은지가 열심히 관리한 만큼 드레스의 신비한 분위기 또한 강렬했다.
어딘가 나른하게 풀어진 듯한 은호와는 또 다르게 관리된 매력이 있었다.
짧게 흘러갈 장면이긴 하지만, ‘변하다’라는 단어를 크게 부각하려고 슬기 나름 더더욱 화려하게,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만들기 위해 뽑아낸 작품이었다.
“자. 이제 마무리로…….”
은지의 메이크업까지 완벽하게 끝마친 뒤.
슬기는 은호의 깃에 빼곡하게 검은 타조 깃털을 달았다면, 은지의 비녀 주변에는 후광처럼 보이게 하얀 깃털을 꽂았다.
“끝! 와! 퍼펙트다, 퍼펙트. 정말!”
슬기는 차마 팬심을 감추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며 은지를 칭찬했다.
은지는 뿌듯한 표정으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더니, 맨발에 은색 끈을 휘감은 듯한 9cm 글레디에이터 힐에 올랐다.
이후 은지는 당당한 걸음으로 촬영장으로 향했다.
탁, 탁, 탁, 타닥.
구두 굽으로 낼 수 있는 또각거리는 소리를 이용해, 은지는 <저주>의 훅 부분의 박자를 만들고 흥얼거렸다.
“저 주세요 저주, 응응 그럴 때도 있지.”//기울임
흥얼거리며 복도를 지나 도착한 촬영장.
은지가 문을 열자, 거대한 크로마키 장벽 아래 해골, 거미줄, 붉은 조명, 관, 캐노피가 걸린 검은 침대 등.
꼭 핼러윈이나 유혹적인 악마들 하면 떠오르는 장식들이 가득했다.
“와.”
은지는 곳곳에 장식된 붉은 상사화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갔다.
신기한 마음에 다가가서 봤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니 꽃들은 모두 기대와 달리 조화였다.
“에이.”
만화에서만 보던 꽃을 실제로 볼 수 있나 싶어 기대했건만.
하지만 실망감과는 별개로 은지는 상사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야, 이은지.”
“엉?”
은호가 촬영장 구경에 푹 빠진 은지를 불러 세웠다.
“이게 뭔데?”
“오늘 촬영 콘티.”
은호는 종이를 여러 장 내밀었다.
오늘 뮤직비디오 촬영 장면 그려진 그림 콘티였다.
가만히 종이를 살피던 은지는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긴 그 순간.
“이…… X새끼가…….”
은지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어졌다.
어쩐지, 아침부터 수상한 점이 많았다.
슬기 언니가 갑자기 수건을 안 챙겨 왔다며 회사로 돌아갔던 일.
「“메이크업도 물에 젖어도 안 질 정도로 튼튼하게 했어.”」
조금 전에 흘러가듯 했던 그 말도!
단순히 비가 오는 신 정도라고 생각했건만…….
‘머리 검은 놈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이은호한테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은지가 은호에게 받아 든 콘티 종이의 그림에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깔끔하게 올린 머리를 풀며 붉은 물에 풍덩 빠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잘했지?”
뻔뻔하게 웃는 은호의 저 약 오르는 입꼬리를 맨손으로 김치를 찢듯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오늘 옷도 겁나 이쁜데, 왜 꼭―!”
“오, 그러게, 넌 모르겠는데 옷은 확실히 이쁘네.”
“X쳐!”
그때였다.
“아, 이거…… 설마.”
‘듀오’였던가.
은지는 문득 은호가 검은 물에 빠졌던 뮤직비디오가 떠올랐다.
“검은 물 빠졌던 거, 너, 너, 너!!!”
“오. 맞아. 그거야. 오마쥬 했지.”
“오마쥬는 얼어 죽을! 니가 그때 당했으니까 나도 겪으라고 복수하는 거잖아!”
“오, 잘 아네. 능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잖아.”
은호가 비열하게 웃자, 은지는 질겁하며 소리쳤다.
“아아악!!! 이은호 개싫어! 진짜!”
은지의 비명에 촬영을 준비하던 스태프들이 동시에 은지를 돌아봤다.
하지만 옆에 선 은호를 본 순간.
‘아.’
돌아본 스태프들은 일제히 이해했다는 듯 다시 본인의 업무에 집중했다.
물론 그중 상황을 모르는 몇몇은 ‘안 말려도 되는 건가?’라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중엔 오늘 두 사람의 촬영에 처음 참여하는 도진도 마찬가지였다.
* * *
턴업 엔터테인먼트에 있을 때.
‘가요뱅크였던가?’
아니, 인기뮤직이었던가.
아무튼.
복도에 틀어진 TV에 우리 회사 가수 앞에 E-UNG가 나온 적 있었다.
동료와 함께 보고 있을 때였는데.
「“쟤들, 왠지 가수나 아이돌보다 얼굴은 배우 쪽 같지 않냐?”」
그때 녀석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땐 딱히 저 남매에게 관심이 없었을 때라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젠 좀 알겠다.’
턴업 엔터테인먼트에도 연예인은 있다.
하지만 턴업은 하이틴 느낌의 귀여운 이미지에 집중하는 기획사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여자 아이돌들도 160대 초반 정도의 작은 키들이 대부분이었다.
외모 또한 이은지처럼 강한 인상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면접 날 업계에서 ‘이응 남매’라고 불리는 두 사람을 처음 봤을 때, 이은호는 ‘오, 실물 X나 잘생겼다.’ 정도였다.
한편, 이은지는 ‘예쁘다’보다는 화장하지 않은 민낯임에도 불구하고 ‘와, 되게 사납게 생겼다.’라고 생각했었다.
두 사람이 본업에 들어간 지금.
도진은 그때의 생각이 조금 갱신됐다.
처음 은호가 등장했을 땐, ‘와, 저러니까 연예인 하지.’라며 감탄했다.
이후 은지가 촬영장에 들어왔을 때.
도진은 잠시 숨을 멈췄다.
“왐…….”
입을 열었을 땐 자신도 무슨 의미로 흘렸는지 모를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여신 같다.’
조화인 상사화를 바라볼 때만 해도 여전히 감탄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감탄은 은지가 은호를 향해 입을 연 순간, 환상과 함께 박살 났다.
“이…… X새끼가…….”
와장창.
말 그대로 환상을 깨부숴 주는 한마디였다.
이어서 은호에게 으르렁거리는 은지를 보며, 도진은 눈을 끔뻑였다.
“아아악!!! 이은호 개싫어! 진짜!”
은호의 여유로운 대꾸에 은지의 급발진까지.
‘아. 두 사람 이런 남매구나.’
‘얘들도 실제로는 사이가 가까운 게 거짓말이진 않을까.’ 하는 그런 호기심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턴업에서 활동 중인 여자 아이돌들 중 대부분이 쇼윈도 친구들이었다.
카메라가 꺼지고, 팬들이 없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거리를 둔다.
거리만 두면 다행이지, 같은 그룹 안에서도 기 싸움이 장난 아니었는데…….
그거 말리느라 스트레스받던 것이 턴업을 관둔 이유 중 일부이긴 했다.
거기에 비하면 이은호, 이은지.
저 두 사람의 싸움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적어도 뒤에서 다른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아!”
그때였다.
은지가 은호와 투덕거리다가 갑작스럽게 다가온 스태프와 살짝 부딪쳤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 습니다.”
은지가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 그 순간.
스태프는 모자챙 부분을 누르며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대충 대꾸한 뒤 멀어졌다.
그동안 은호는 지나간 스태프를 싸늘한 눈길로 쫓았다.
“거봐, 좀 조심하라니까.”
이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은지를 돌아보며 농담 섞인 말을 던졌다.
“이은호 니 때문인 거잖아.”
“하하. 예이.”
은지가 투덜거리는 동안 은호는 그런 은지를 지나치며 말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감독님이 나 찾으시면 말 좀 해 줘.”
“똥 싸러 가냐?”
“오냐.”
도진은 눈치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적어도 은호가 간 곳이 화장실이 있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은 대번에 알아챌 수 있는 정도로.
은호가 움직이자, 도진은 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배님.”
“네, 말씀하세요.”
“촬영장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