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13)
예고
“은호야.”
“네.”
은호를 부르는 태현의 부름엔 여러 감정이 담긴 탓일까.
소리가 무거웠다.
은호 또한 생각이 많은 듯, 대답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약봉지를 바라보는 눈은 건조했다.
태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톡신, 이번에 7년 계약을 했는데…….”
“어, 그, 그거 저한테 말해도 되는 거예요?”
“뭐 어때.”
“아, 네…… 계약이 왜요?”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이게 우리 마지막이다?”
포도 주스를 입으로 가져가던 은호는 전기가 끊어진 로봇처럼 허공에서 하던 행동을 멈췄다.
“톡신을, 그러니까 형님이…….”
“응. 나간다는 거, 맞아.”
“그거…….”
은호는 차마 어떻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을 못 잡았다.
은호가 혼란스러워하는 한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태현은 평온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은호 너 ‘연결’ 프로젝트 책임자잖아.”
“그렇죠…….”
NRY 엔터테인먼트는 지금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책임지고 잘 해 봐.”」
「“예?”」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회사 내 모든 아티스트들의 세계관 콘셉트를 하나로 엮는 프로젝트명.
‘연결’.
박 대표의 결정에 따라 은호는 떠맡다시피 스토리 및 연출 기획에 큰 역할을 잡고 있었다.
“설마 이걸 저한테 말씀하시는 이유가…….”
“나는, 내가 나가도 톡신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거든.”
“……형님, 욕심이 많으시네요.”
“하하, 내가 그래.”
태현은 은호에게 자신이 나간 이후에도 톡신이 유지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말이나 되냐고.
“선배가 얼마나 중요한, 아니. 그 전에 톡신을 나가면 선배는 뭐 하실 건데요?”
은호의 질문에 태현은 여느 때보다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올드 카 좋아하는 거 알지?”
“네. 오늘 타고 온 차를 보고도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죠.”
“하하. 그렇지.”
태현은 잠시 웃다가 술기운에 풀린 눈으로 창 너머의 야경을 바라봤다.
“내가 관심 있는 일이 독일에서 적어도 몇 년은 배우고 와야 하는 일이라서.”
“뭔데요?”
“튜너.”
“네……?”
“자동차 튜닝하는 거.”
“아.”
정말 상상치도 못한 꿈이었다.
은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 되게 예의가 아닌 건 아는데. 형님, 커리어가 아깝지 않아요? 차라리 맡기고 사는 편이…….”
“글쎄, 커리어…… 음, 아깝나?”
당연한 소리를…….
“근데 나는 내가 직접 만들고 싶은걸.”
“…….”
“내가 타기만 할 거라면, 은호, 네 말도 맞지.”
이은지도 그렇고…….
왜 정상을 찍은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려고 하지 않는 걸까.
두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내가 정상을 찍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혼란스러웠다.
“참, 이건 애들한테는 비밀인데.”
“세상에, 여기서 비밀로 할 게 또 있어요?”
은호는 ‘그, 그만’이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태현은 은호의 눈빛을 보란 듯 웃으며 무시했다.
톡신의 역사는 화려하다.
조직폭력배가 운영하던 소속사를 터뜨리고 나와, 악으로 버텨 정상에 섰다.
톡신은 역사였다.
10년이 넘는 시간.
그들을 보고 가수의 꿈을 키웠다며 말하는 가수 및 아티스트들이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화려한 커리어를 뒤로 하고 어떻게 보면 전혀 관계없는…….
“난 내 작품을 내가 타고 다니는 걸 넘어서,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여 주고 그러고 싶은 게 꿈이야.”
꿈.
그 한 글자가 가진 무게 때문에 은호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은지가 생각났다.
화랑 씨 곡이 우리 곡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였다.
은호는 아쉬운 마음에 은지한테 물었었다.
‘이번 생에 첫 1위가 네가 부른 곡이 아닌, 작곡한 곡인 게 아쉽지는 않냐’라고.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은지는 원래 ‘작곡가’가 아닌, 작곡가 및 가수로서 1위에 자리했었으니까.
나는 이 자리가 어울리는 사람이지만, 은지는 정상에 있던 녀석이었으니까.
궁금해서 물었었다.
그때, 은지는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딱히? 됐어. 난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 대가리 싸매고 고민하는 ‘부담스러운 1위’보다 지금처럼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게 더 좋아.”」
퍽이나 이은지다운 답변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은지의 표정이 생각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사납게 생긴 애가.’
회귀 전엔 항상 의자에만 앉으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게 혹시 부담감에 고생했던 모습인 걸까.
「“우리 팬들 만나는 건 좋은데, 역시 노래는 힘들다. 역시 난 그냥 골방에 박혀서 곡만 만들고 싶다앙.”」
「“니가 배가 처불렀구나. 누군 그 자리 가 보고 싶어서 쌔가 빠지게 연습하는데.”」
「“아핰핰, 하긴, 그러게. 그런가 봐. 으아! 내가 배가 불렀나 보다!”」
회귀 전에 나눴던 오래된 대화였다.
흐린 기억이지만, 어쩐지 찝찝했던, 기지개를 켜며 외치던 은지의 그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은지는 옛날부터 작곡은 즐겁지만, 노래는 역시 ‘잘 모르겠다’라고 할 때가 많았다.
상경하면서 노래하고 싶다고 했던 건 나였고, 은지는 작곡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은지는…….
“그러고 보니까 은호야, 넌 어때.”
“네? 뭐가요?”
훅 들어온 태현의 목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은호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
“아,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뭐라고 하셨어요?”
“넌 어떠냐고.”
“꾸, 꿈 같은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 너희 남매는 회사에서도 일중독으로 유명하잖아.”
“아, 그렇죠.”
“바라는 게 있을 거 아니야.”
바라는 거?
내가 바라는 건 아무래도…….
“1위……?”
“1위?”
“네.”
태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너 1위 바라는 거치고는 딱히 음원 순위에 신경 안 쓰잖아.”
“……제가 그랬나요?”
은호가 진심으로 놀라며 되묻자, 술기운이 올라 들뜬 듯 태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 1위를 바라는 놈들은 말이야. 더 독해. 그, 곡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욕심이 눈에 보이거든.”
“저희는 그런 욕심이 없어 보여요?”
“응. 전혀.”
“아…….”
은호는 살짝 충격을 받은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어느새 은호가 먹던 샐러드에는 고기만 사라져 있었다.
“너, 너 그거, 풀도 다 먹어라.”
“아, 먹을 거예요.”
잠깐 고민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파고 들어온 태현의 잔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태현은 다시 은호의 욕심에 대해 말을 이었다.
“너희 남매는 욕심의 방향이 달라.”
“순위가 아니면 어디 방향인데요?”
“그냥, 노래하는 거?”
아.
은호의 눈썹이 들썩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 자신보다도 나를 더 잘 본 느낌이랄까.
“예찬이가 너희랑 같이 곡 작업 했던 날. 나보고 그랬어.”
“뭐라고요?”
“그냥 음악에 X친 애들이라고.”
하하핰.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지금껏 나는 1위를 바란다 했지만, 정작 순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노래하고 싶었고, 노래했다.
은지가 만든 곡에 비록 가사를 쓰는 일은 어려웠어도, 우리의 곡을 직접 만들어 가는 일이 즐거웠다.
내가 손대지 못하는 곳은 은지의 힘으로, 은지는 항상 이 중에 고르라는 듯 원하는 취향으로만 이뤄진 ‘보기’를 만들어 주니까.
그냥 그 과정들이 하나하나 모든 게 좋았다.
‘…….’
아이러니하게도 여기까지 깨닫고 나니까, 어쩐지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껏 ‘1위’를 위해 앞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거니까.
그렇다고 지금부터라도 잡자고 생각하자니…….
‘꼭 그래야만 할까?’
의문이 든다.
지금도 좋아서.
지금 이미 너무 좋은데.
“왜 1위를 바란다고 생각했어?”
그때 태현은 멈추지 않고 다섯 병째 와인의 코르크를 뽑으며 물었다.
와인 잔에 와인을 따르는 손놀림이 전보다 굉장히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 혀, 형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이것만 마시고 어차피 그만 마실 거였어.”
“아…….”
아무리 봐도 그만 마시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말리기엔 이미 태현이 잔에 한가득 와인을 따른 뒤였다.
“그러니까 1위를 바란 이유는…….”
일단 물은 질문에 답이나 할까 싶어서 입을 열었는데, 그때였다.
“형님!”
그러게 그만 마시시라니까……!
결국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태현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은호가 다급하게 한 손으로 태현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빼앗고, 다른 한 손은 태현의 머리를 받쳐 들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뇌진탕 행이었다.
‘와, 씨. 놀라라.’
하지만 완벽한 방어는 못 됐다.
화려하게 퍼진 와인이 그릇 곳곳에 튀어버렸다.
그래도 다 엎진 않은 게 어디야.
은호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깨끗한 자리에 와인 잔을 먼저 내려 뒀다.
그다음엔 태현이 박을 뻔한, 양념만 남은 스테이크가 담겨 왔던 종이 상자를 옆으로 치워 냈다.
그 이후에서야 은호는 잠들어 버린 태현의 머리통을 천천히 테이블에 내려 뒀다.
“제가 형님 구한 줄 아세요…….”
이미 취한 사람한테 말해 봐야 소귀에 경 읽는 것만도 못할 테지만, 간이 떨렸던 조금 전을 생각하니 한마디는 하고 싶어서 소심하게 말을 흘렸다.
“하…….”
은호는 방금까지 식사하던 테이블을 가만히 바라봤다.
‘……역시 내가 치워야겠지.’
밥까지 사 주신 마당에 치우는 건 마땅히 내가 해야 할 것 같았다.
언제 흐트러졌는지.
은호는 거슬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린 뒤, 긴 팔 무지 티의 소매를 대충 걷어 올리며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종이봉투를 챙겨 왔다.
양념이 묻은 건 따로 빼서 싱크대에서 다 씻어 낸 뒤에서야 차곡차곡 종이 봉투에 담아 넣었다.
비싼 집은 이런 건지, 음식물은 다행히 버리는 곳이 싱크대와 연결되어 있어서 편하게 버릴 수 있었다.
‘음.’
그때였다.
은호는 마지막 남은 자신이 먹던 샐러드 그릇을 집어 들더니 싱크대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은호야, 너 그거, 풀도 다 먹어.”」
조금 전 태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형님.’
웬만하면 편식은―나름― 안 하려고 하지만, 고기는 환상적인데 샐러드에 들어 있는 그 이상한 붉은 상추 같은 게 너무 쓰고 맛이 없어서…….
은호는 식탁에 엎어져 잠든 태현의 눈치를 보다가 은근슬쩍 남긴 풀떼기들을 음식물 버리는 곳에 함께 털어 넣었다.
이후에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분주하게 정리했다.
청소가 끝나니, 남은 건 엎어져 잠든 태현과 많이 흘렸음에도 절반 이상 남아 있는 와인 잔.
“이건…….”
은호는 와인 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 뒀다.
‘이건 내일 선배가 알아서 하시겠지.’
이제 태현이 남았다.
‘옮겨야 하나…….’
고민만 했다.
은호는 주변을 둘러보다 소파에 걸린 담요를 발견했다.
미관상인지는 몰라도 후배로서 이거라도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냥 간단히 어깨에 걸어 드리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청소도 다 했겠다.
「“이따, 너 저기 방에서 자.”」
게임을 막 끝마쳤을 때 태현이 방을 알려 주긴 했는데, 은호는 개인적으로 거실이 더 마음에 들었다.
‘야경에 둘러싸인 채 잠드는 경험은 쉽게 할 수 없으니까.’
은호는 가벼운 마음으로 소파에 몸을 뉘었다.
중간에 놓인 TV가 살짝 풍경을 가리긴 하지만, 창이 넓어 보이는 면적이 더 커서 괜찮았다.
그렇게 은호는 그날 태현의 집에서 외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