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09)
“아니, 심혼, 사손, 또 뭐더라? 서, 설복? 가약? 가약은 또 뭐야?”
『약속…….』
“……갑자기 화나네. 약속같이 편한 단어도 있는데, 왜 굳이 가약이라고 하는 거야?”
은지는 발끈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품 안에 포근하게 안은 연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라비가 너랑 한 약속을 귀하게 여길 줄 아니까, 단순히 약속이라고 하기엔 소중하잖아.』
“뭐, 그, 그래.”
은지는 낯간지러운 이야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듯 급하게 이야기를 돌리며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도 안배라든가, 뭐 껍데기는 우리 육체 뭐 이런 걸 말하는 거고, 위? 이건 천국 같은 곳인 거야?”
『천국, 응. 맞지. 하늘에 있으니까.』
“착한 사람들이 가는 천국이 진짜 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천국은 그냥 혼들이 사는 곳이야.』
“아, 그래. 어, 음, 그건 알겠어.”
사실 모르겠다.
대충 넘기려고 대답한 건데, 눈치를 챈 걸까.
연탄은 어쩐지 뾰로통해 보이는 표정으로 은지의 품에서 고개를 떨궜다.
“삐졌어?”
『아니. 나는 여기서 나중에 때 되면 전해 주려고 공부한 건데…….』
“이게…… 공부한 거였어?”
『응. 엄청 열심히.』
연탄이 칭찬해 달라는 듯 머리를 손바닥에 비비적거리며 답했다.
“안 하면 어떻게 말하길래……?”
『음, 이렇게?』
‘오히려 공부를 안 하면 더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마음에 물었는데, 은지는 듣자마자 생각을 접었다.
괜히 이야기 중에 ‘수백’, ‘수천’ 년의 세월을 논한 게 아닌 듯 연탄은 한글인 것 같으면서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있어?』
연탄은 조금 기대감이 어린 눈빛을 은지에게 보냈지만, 은지는 오히려 어려운 단어로 했던 이야기가 낫다는 걸 인정하면서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공부 진짜 열심히 한 거였네.”
『응.』
“고, 고생했네…….”
사실 말했던 것처럼 아예 못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부분부분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고, 내가 봤던 것도 있었기 때문인지 받아들이기에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긴 했다.
생각할 것이 많아진 탓인지, 은지는 ‘변태 자식’이라며 화냈던 건 까맣게 잊어버린 채 연탄의 분홍 젤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 * *
연탄과 은지가 긴 대화를 나누던 그동안.
은호는 겉모습은 추억의 각그랜X인 척, 내부는 최신식 기술을 둘둘 말고 있는 태현의 차를 타고 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아파트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와…….’
차에서 내리자 주변엔 생전 처음 보는 외제 차들이 즐비했다.
장롱면허인 은호로서는 여기서 운전대는 잡아 보는 것조차 숨통이 턱턱 막힐 것 같은 그런 풍경이었다.
“뭐 해. 이리 와.”
“형, 저 진짜 여기 와도 되는 거 맞아요?”
“못 올 이유가 뭐가 있다고.”
태현은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웃어넘기며 은호를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밀었다.
새까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깔끔한 나무로 만들어진 내부가 드러났다.
회귀 전 기숙사를 떠나 이사했던 아파트도 나름대로 좋은 곳이었다.
다만, 여기는 그 ‘격’이 다르달까.
“형님.”
“어.”
“혹시…… 여기 얼마인지 여쭤도 됩니까.”
태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억……?”
“응. 아, 뒤에 ‘0’ 하나 더 붙여.”
와, X친…….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아득한 액수다.
회귀 전 당시 이은지 통장을 사용했다면 겨우 살 수 있었을까?
아니지. 지금은 적어도 그때보다 몇 년 전이니…….
그때면 지금 가격은 무슨, 훨씬 더 뛰고도 남았을 테니까.
‘못 산다. 절대 못 사.’
새삼스럽지만, 톡신의 위치가 느껴지는 액수였다.
태현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숫자를 세다 ‘헉’ 하는 은호가 웃긴 듯, 피식 웃으며 일반 아파트 층이 아닌 ‘PH’칸의 ‘2’를 눌렀다.
펜트하우스 2층.
매서운 속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문이 나타났다.
태현이 들고 있던 지갑을 슬쩍 가져다 대자, 묵직한 문이 가볍게 열렸다.
어? 뭐야.
‘내부는 생각보다 작은데?’
태현의 집에 처음 딱 들어섰을 때.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 그땐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중간을 가리고 있는 커튼이 벽이 아니라 거실을 가리고 있는 줄은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또 닫아두고 가셨네.”
태현은 느긋하게 복도 옆, 벽에 붙은 리모컨 같은 것을 간단히 조작했다.
지이이이잉.
조용한 기계 소리를 따라 커튼이 걷히자 숨겨져 있던 넓은 평수의 거실이 펼쳐졌다.
“와.”
은호는 얼어붙었다.
이 정도 크기의 거실은 생전 처음 봤다.
거실에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와 있음에도 공간이 널찍하게 남아돌았다.
과거에 에이슬이 머물던 호텔보다도 월등히 넓었다.
경악하며 놀라는 은호가 웃긴지 태현은 차 키와 지갑들을 대충 테이블에 내려 두며 큭큭거렸다.
“너 리액션 이렇게 큰 애였냐.”
“아니, 형님. 이걸 보고 어떻게 리액션을 안 합니까?”
그런 태현에게 은호는 억울한 듯 물었다.
“그런가.”
“그런가라뇨. 저 지금 형님들이 옛날에 살았던 그 옥탑방에 사는 애라고요.”
“하하. 그럼 이거 보여 주면 더 놀라겠네.”
“뭔데요?”
뭐가 더 있어?
은호가 호기심을 가지자, 태현은 보란 듯 리모컨을 조작했다.
“혼자 있을 땐 오래 걸리기도 하고, 번거로워서 잘 안 여는데―.”
태현이 건조하게 웃으며 리모컨을 한 차례 더 조작한 그 순간.
조금 전 거실을 가린 커튼이 걷힐 때보다 조금 더 분주한 소음이 났다.
그마저도 신경을 써야 겨우 들릴 정도이긴 했다.
한편, 은호는 어디가 조작되고 있는지를 살피다 입을 떡 벌렸다.
“거실 전부 통 창문이었어요?”
“아, 왼쪽은 베란다라 문 있어.”
거실 전체를 둘러싸고 있던 회색의 커튼이 멀리서부터 걷히는 소리였다.
“와, 와! 와!!! 미쳤다, 진짜.”
은호는 은지와 함께 있을 때만큼이나 격한 반응을 드러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은호는 멋진 경치를 좋아했다.
영감에 좋은 영향이 오니까.
물론, 태현의 아파트는 한강 쪽 방향이 아닌지라 한강 뷰는 아니었다.
하지만 커튼이 덮고 있던, 줄지어 이어진 창들이 몽땅 드러났을 때.
그 비싼 한강 뷰가 아쉽지 않을 정도로 태현의 거실은 숲과 도시 뷰가 한눈에 펼쳐지는 경이로운 절경을 담고 있었다.
“와, 이걸 눈 아깝게 왜 안 보고 살아요?”
“난 딱히 이런 거에는 관심이 없어서.”
“근데 여기를 산 거예요?”
어째 조사라도 하는 느낌이지만, 진심으로 궁금해서 알고 싶었다.
게다가 톡신 선배님들하고는 곧 발표될 뮤직비디오 때문에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겪어 온 과거에 대해서 이제 톡신 선배님들이 대표님보다도 더 자세하게 아는 정도의 관계라고 한다면, 설명이 쉬울까.
적어도 이 정도 질문은 할 수 있는 사이라는 이야기다.
“난 이쪽을 잘 몰라서, 그냥 구해 주는 대로 산 거야.”
“누가 구해 줬는데요?”
“오래 알고 지낸 부동산 잘 아시는 분이 있잖아.”
“누구요? 아.”
단박에 누군지 알았다.
“와, 진짜. 대표님 최고다.”
이 아파트는 대표님이 직접 구해 줬다는 의미였다.
“구해 준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냥 가지고 있던 거 나한테 팔았던 거였지만…….”
“…….”
그러고 보니 내가 살던 아파트도, 그땐 관심이 없어서 못 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괜찮은 입지와 야경을 가지긴 했었다.
그리고 그것도 대표님이 구해 주셨던 매물…….
새삼스럽게 속물 같긴 하지만, 대표님한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오, 형님이 해 주시는 거예요?”
“음? 내가 왜?”
태현은 덤덤한 표정 그대로 말을 이었다.
“은호야, 미리 말하지만 난 여자한테밖에 관심 없다.”
장난인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덤덤한 태현의 말투는 실없는 이야기에도 무게를 실었다.
곧 이어진 바람 새는 웃음소리가 없었다면 은호는 태현이 진심으로 불편해서 그런 말을 한 줄 알 뻔했다.
순간 태현의 대답에 혼란스러웠던 은호는 이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 저 진짜 오해한 줄 알고 놀랐잖아요!”
“하하.”
“전 남자든 여자든 줘도 사양이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형님.”
“넌 이제 20대 초반 아니냐.”
“맞죠.”
“근데 벌써 여자한테 크게 덴 것처럼 말하네.”
“하하. 뭐…… 그랬죠.”
잠시 귀신이라도 지나간 건지, 넓은 거실이 고요해졌다.
“저, 그럼 밥은 제가 직접 해 먹으면…….”
“됐어. 시킬 거야. 손님이 무슨 요리냐.”
은호는 아쉬운 혀를 차며 주방을 돌아봤다.
태현의 주방은 블랙과 레드로 마치 바 느낌의 깔끔한 분위기였다.
은호는 비좁은 지금 집에서도 바쁘지 않을 땐 종종 음식을 하는 처지라 그런가.
특히 큰 식기 세척기로 추측되는 저거.
설거지에서 해방되고 싶은 작은 소망이 섞인 부러움이었다.
사려면 살 수는 있지만, 그냥.
나나 이은지를 위해 돈을 쓴다는 건 좀 아까워서 사는 것을 미루고 있는 물건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게다가 활동하면 집에 그다지 오래 있지도 않으니까.
“그래도 고급진 주방 한번 써 보고 싶었는데, 그건 좀 아쉽네요.”
“재료가 있어야 쓰지.”
무슨 말인가 싶던 그때, 태현은 냉장고 위치를 가리켰다.
은호는 호기심에 냉장고를 열어 보고 3초간 얼어 있다 다급히 다시 닫았다.
“형님…….”
“집에서 요리 안 해 먹는 거 티 나지.”
“아니, 그래도 냉장고에 술이랑 물만 채워 두는 건 좀, 인간적으로 실격 아닙니까?”
“그거 내 거 아니야.”
“그럼요?”
“애들 거.”
‘애들’이라는 말에 은호는 잠시 갸웃했다.
“설마 톡신 선배님들이요?”
“어.”
톡신을 말하는 태현 특유의 무감각한 얼굴에 질린다는 표정이 훤하게 드러났다.
보아하니, 맏형이라는 이유로 많이 시달리셨던 모양이다.
“아무튼, 밥은 근처에 패밀리 레스토랑 배달하는 곳 있는데 거기 맛있어.”
“사 주시는 건가요.”
“은호 너, 은근히 얼굴에 철판 두껍다.”
“칭찬이죠?”
“하─. 그럴 때 너 진짜 예찬이 동생 같다.”
“오, 예찬 선배 닮았다는 거면 칭찬 맞네요.”
“칭찬 아니야.”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이죠. 참고로 전 고기면 다 좋습니다.”
“웃긴 놈이야. 하여간.”
뻔뻔한 은호의 대답에 태현은 덤덤한 말투와 달리 피식피식 콧바람이 자주 새어 나왔다.
웃고 있는 거였다.
이후 태현은 주문을 위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은호는 태현의 집을 구경했다.
“형님, 여기만 문이 다른데 여긴 무슨 방이에요?”
“어. 안 그래도 배달 시간 좀 걸린다는데, 거기서 놀고 있어.”
“……?”
어디서 놀라는 건가 싶었는데, 하나만 생긴 게 다른 문이었던 방문을 연 그 순간.
“……형님, 혹시 무슨 작업장 돌리세요?”
“야, 넌 작업장이라니. 하하.”
오늘 처음으로 태현은 크게 웃음이 터졌다.
“아니, 혼자 사시는 것치고 컴퓨터가 너무 많잖아요.”
“어이가 없어서 웃기네. 오해하지 마. 애들 PC방이야.”
“아하.”
애들 PC방이라는 말에 톡신에서 자연히 ‘포르미카’ 게임을 열심히 영업하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형님이 멤버 형들 자리 다 만들어 두신 거예요? 다정하시네요.”
“내가 미쳤다고……. 내가 만들어 둔 게 아니라, 해외 갔다 왔더니 저들끼리 아지트 지어 놓은 거야.”
은호는 애잔하게 태현을 바라봤다.
본의 아니게 오늘 톡신 그룹에서 태현 선배의 집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훤히 알게 됐네.
“형님, 힘내세요.”
“은호야.”
“네.”
“입꼬리나 내리고 위로해.”
“아, 들켰네. 죄송합니다. 하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