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03)
“당신이 없는 곳에서 그 상대가 이슬 양의 견고하던 벽을 몽땅 부숴 버리고 이슬 양도 무너진다면.”
덤덤한 어석배 대표의 표정 너머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생각들이 들어찼다.
지금껏 그에게 이 정도로 대놓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단순한 창석의 질문 하나하나에 어석배의 견고했던 가치관이 순식간에 착각이 되어 부서져 갔다.
소중하기에 아끼려 했다.
아끼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더 큰 아픔을 겪는다는 건, 어석배에겐 예상하지 못한 범주의 이야기였다.
한편.
두 사람 사이에 어정쩡하게 선 아르바이트생은 숨통이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고기를 구워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이럴 거면 그냥 저는 나가 있으라고 해 주면 안 될까요,
‘흐엉. 사장님, 나 좀 살려 줘…….’
* * *
외전: 빈자리
‘미친 놈이 술 처먹고 운전대를 왜 잡아!’
주의하며 달리던 은지의 매니저는 평소대로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평소대로였다면, 그러고 은지와 함께 한마음처럼 투덜거리며 지나쳤을까.
한 사람의 변덕으로 시간에 촉박하게 쫓기지 않았다면.
매니저는 전방을 보며 음주 운전 차량을 피할 여유가 있지 않았을까.
은지는 적어도 생명은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은지의 사고는 음주 운전자의 탓이 당연했다.
다만 거기까지 도달하기 전.
사고만 나지 않았더라면 사소했을 변동 사항이 하나 있었다.
에이슬이 결혼과 이혼을 겪을 정도로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오랜만에 은지와 에이슬은 우연히 스케줄이 겹쳤다.
‘지금까지 이은호랑 한 약속도 잘 지키고 있으니까…….’
원래 은지의 스케줄은 엔딩을 장식하는 만큼 앞선 순번이었던 에이슬보다는 여유로웠다.
에이슬은 그게 못내 못마땅했다.
그래서 부려 본 작은 심술이었다.
심술이라는 못난 씨앗이 만든 결과는 참담했다.
“사……고? 이은……지가?”
소식을 전해 들은 에이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거, 나, 나 때문이야? 설마, 나 때문에…….”
은지의 사고 소식에 에이슬은 자책했다.
이렇게 되라고 그랬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 버렸다.
나 때문이다.
‘다 나 때문에.’
후회했다.
비록 큰 상처를 주고 떠났지만, 사랑했던 이은호가 무너지는 소식을 들을 때면 더.
“이슬아!”
“삼촌, 나…….”
“이슬아, 왜 이러는 거니, 네 탓이 아니라고 했잖아!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진 않아!!!”
“하지만……. 나, 나, 나…… 어떡해야 해? 삼촌, 나, 오빠한테, 오빠한테 미안해서 어떡해야, 은호 오빠한테 미안해서…….”
술에 손조차 대지 못했다.
에이슬은 죄책감 자신을 공격했다.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민할 정도로 은호 못지않게 상태가 나빴다.
게다가 은호가 쓰러졌다거나, 피를 흘렸다거나 나쁜 소식이 들릴 때면 다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에이슬의 상태 또한 망가졌다.
에이슬은 스스로 재차 되뇌고 또 되뇌었다.
자신은 은호에게 그리고 은지에게.
끝까지 악연이고, 악인이고, 악당이었다고.
‘왜, 나는 대체 왜 은지 언니한테 심술을 부렸던 걸까.’
‘대체 나란 년은 어디서부터 망가진 걸까.’
은호와 은지를 만난 시간을 뒤엎고 싶었다.
그 생각은 DI 뮤직의 어석배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에이슬이 자신을 스스로 죽여야 죄책감을 덜어 낼 정도로 무너지고 박살이 나고서야, 어석배 대표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고 인정했다.
몰랐다.
돈과 힘은 있었으나, 자신은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무력했다.
이슬이가 스스로를 공격하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이었다.
결국.
이슬이의 엄마.
누나가 거듭 이슬이를 지켜 달라며 부탁했음에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멍청하게도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걸, 이슬이에게 원하는 모든 걸 쥐여 줘도 소용이 없게된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고서야 깨달아 버렸다.
흐느끼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랑하는 조카를 보며, 어석배 또한 가슴을 후벼파이는 기분이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돈과 힘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돈과 힘이 있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는지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래서 마냥.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누구에게 빌지도 몰라서 그저 빌고 또 빌었다.
절대 이뤄지지 않을 소원인 걸 알면서도 잘못됐던, 잘못했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길 끊임없이 바랐다.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었다.
에이슬과 어석배의 시간은 그렇게 은호와 함께 멈췄다.
멈췄던 두 사람의 시계가 다시 움직인 건 아이러니하게도 은호가 다시 음악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니가 떠나고 혼자 남은 우리 집에서
나는 오늘도 내일도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건 아니었다.
은호가 살아났음에도 에이슬과 어석배에게는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은호가 다시 시작한 노래는 결국 끝없이 고통스러웠던 시간과 잃어버린 유일한 가족, 이은지를 그리워하는 이야기였으니까.
네가 먼저 떠난 그곳은 어때
만개한 그 벚나무 품은
은호는 항상 발표하는 앨범에 은지를 향한 그리움과 그 추모의 마음을 실었다.
남은 것은 네가 남긴 노트 한 권
그것만이 내게 너를 기억하게 해
살라는 동생의 유언 아닌 유언을 지키려고 은호는 이를 악물며 살아남으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었다.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몸을 희생해 가며 열심히 활동했다.
보고 싶다
동생아
그 마음이 노래에 담긴 탓일까.
여럿을 울렸다.
은호가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나아가려 하면 할수록 은호의 노래를 들은 에이슬은 더욱더 깊이 가라앉았다.
은호의 노래를 듣기 힘들어도 들으려 했다.
은호의 아픔을 대신 아파할 수는 없지만 못해도, 자신 때문이니까.
자신은 행복해선 안 된다며 에이슬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실제로 에이슬은 여러 번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까지 위험했었다.
어석배 대표는 자신이 가장 자랑하고 믿었던 돈과 힘으로 정작 이슬이를 아슬하게 세상에 묶어 두는 것밖에 못 했다.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했건만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에이슬과 어석배 대표를 좀먹었다.
많은 바람이 있었다.
은호와 박창석 대표.
에이슬과 어석배 대표.
그 외에도 은지와 은호와 얽히고설킨 수많은 인연이 바랐다.
은호가 아픔을 딛고 일어나길 바랐고, 은지의 명복을 빌었다.
누군가에게 망각은 축복이었다.
아픔조차 잊고 나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은호에게는 아니었다.
은호는 아픔을 딛고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은지를 잊고 싶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믿었던, 은지는 오랜 시간 함께한, 가족을 넘어 인생의 동료였으니까.
그래서 은지의 노트를 읽고 또 읽었다.
선명하게 기억하려고.
절대 잊지 않으려고.
망각을 포기한 은호가 은지를 잃은 아픔을 이겨 낼 방법 따위는 없었다.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시 한번 기회가 있었으면.
꿈처럼 그것만 바랐다.
* * *
“갈 수 있어도 이승에 남아 있는 녀석이나 보낼 생각이 없는 녀석이나, 고집들이 대단해.”
그림자는 옥탑방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건만, 그림자 끝에 앉아 있는 것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새하얀 아이스크림 하나를 물고 있는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밤하늘을 바라봤다.
때로는 작은 것에게 베푼 친절이 많은 것을 뒤흔든다.
그리고 시간은 아무리 뒤흔들어도 반복하는 성질을 띤다.
이 시간 역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죽든 살든, 누가 기도를 하든 말든.
시간은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 녀석은 오로지 자신을 건드린 인과에게 더한 시련을 선사한다.
인과율에 손을 댄 대가로 시련이 방문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간이 빈자리를 채워 넣으려 할 때 누군가는 희생해야 할 것이다.
그게 누가 될까.
‘그래도…….’
적어도 너는 살아남을 거야.
너만은.
* * *
느티나무
족히 수백 년은 산 것 같은 거대한 느티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눈을 감았다 뜨자, 이내 눈앞에는 익숙한 차 안의 풍경이었다.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귀가 아린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닳는 소리에 몸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고무가 타는 듯한 지독한 냄새가 났다.
그 순간.
쾅!
무언가가 강하게 시선 앞에 들이닥쳤다.
삐이이―.
지독하리만큼 시끄러운 이명에 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은호!”」
한 번.
마치 바로 옆에 있는 듯 은지의 비명이 들렸다.
‘안 다쳤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숨을 헐떡이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와중에도 은호는 은지를 찾기 위해 주변에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차가운 쇳덩이들 사이 질척이는 물줄기가 닿았다.
자세히 보자, 붉은 물줄기는 내 몸에서 나오고 있는 피였다.
내 피라면 됐어.
이은지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니까.
‘어디 있어. 이은지.’
그때였다.
“이은호!!!”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은지의 목소리가 닿았다.
‘나 여기 있어. 여기─.’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야, 이, X 자식아 일어나!!!”
그때였다.
지금까지 흐릿했던 감각들이 순식간에 현실이 되어 닥쳐왔다.
“커헉. 야, 너…….”
“그러게, 말로만 말로 할 때 발딱발딱 일어나던가.”
“오빠 명치를 X발 그냥 쌔리 밟아 버리는 동생 새끼가 어딨냐.”
“여기! 있다! X자식아!”
은지는 말에 힘을 실으며 어디서 꺼내 온 건지도 모를 베개들을 미친 듯이 던져 댔다.
날아드는 베개에 정신이 혼미하던 그때였다.
눈앞에 은지의 이마가 갑자기 크게 보였다.
뻑!
‘퍽’도 아니고, 진짜 ‘뻑’ 소리가 났다.
은호는 붉어진 코를 붙들며 버럭 소리쳤다.
“이 가시나가 아침부터 돌았나!”
“아침은 X랄, 새벽이다!!! 돌았기는 X발, 니가 돌았겠지!!!”
“왜, 왜 이래?”
은호는 소리치는 은지를 보고 순식간이 이성을 되찾으며 침착하게 물었다.
은지는 오늘따라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니가 처먹었지!”
“뭘.”
“내 아이스크림 8개!!!”
“뭔…….”
뭔 개소리야, 미친 X아.
입은 열지 않았지만, 은호의 시선이 말을 대신했다.
“그것보다 넌 갑자기 왜 새벽에 아이스크림을 처먹겠다고 난리야.”
꿈이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거(?) 하나 찾겠다고 피를 보면서 왠지 ‘고생을 했다’라는 감정은 기억이 난다.
“아니, 당장 먹으려는 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돼지야.”
“X쳐, 미역 줄기 닮은 자식아.”
미역 줄기…….
“이게 오빠한테!”
“물 마시려고 냉장고 열었더니 어제 퇴근하면서 내가 아이스크림 쟁여 둔 게 싹 사라졌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찾냐고. 나 운동 더 하기 싫어서 유제품 간식 잘 안 먹는 거 알잖아.”
“잘 안 먹는 거지, 아예 안 처먹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이 집에서 냉장고를 열 사람이 너 말고 누가 있냐고! 범인이 하나니까 내가 너한테 X랄 하는 거 아니야!”
그 순간 알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한밤중에 베개로 ‘뚜까’ 맞았는지.
“연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