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02)
솔직히 창석은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대화가 한마디도 없어서 숨통이 죄진 않을까, 걱정이 많았었다.
하지만―인정하긴 싫지만― 의외로 창석은 어 대표가 자신과 동류(同類)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가게에 도착한 뒤, 식사하며 오가는 술잔 사이.
“누님이 해 주려던 모든 것을 제가 줘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자식의 교육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 * *
소고깃집에서 값비싸고 도수가 강한 안동 소주를 곁들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상당히 깊은 주제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사실 창석은 정보를 얻으려고 일부러 더 술잔을 기울였다.
덕분에 살짝 취기가 오른 어 대표의 입에선 개인적인 가정사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이슬 양은…….”
“이슬이는 세상을 떠난 제 친누이의 딸아이입니다.”
“아…….”
“누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전 원래 이 자리보다는 그 아래에서 일했었습니다.”
어석배는 본래 대표직이 아니었다며 가정사의 운을 뗐다.
일을 시키면 그 일을 처리하는 행동 대장의 역할에 더 가까웠다고.
“그,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누님인데 어떻게 성이……?”
현재는 엄마의 성씨를 물려받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 시기로는 특별한 사유가 없이는 불가능하던 때였다.
순수하게 궁금한 마음에 물은 박 대표의 질문에 어 대표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이슬이의 아빠는, 외국인이었습니다.”
“아.”
“이슬이를 가진 누님을 두고 먼저 떠나 버린 놈팡이였죠.”
“……아.”
“그래도……. 이슬이는, 그 작은 것이 얼마나 예쁘던지…….”
술에 취한 건 확실한 듯, 어석배는 우수에 잠긴 채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이슬이가 한글을 떼고, 조금 컸을 때였습니다.”
“예…….”
‘거기까지는 궁금하진 않은데’라고 생각했지만, 창석은 차마 입 밖으로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슬이가 가수가 꿈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그렇군요.”
“누님은 이슬이의 꿈을 듣더니 발판을 미리 다져 놓아야겠다고 당시 사명을 ‘더 운 아이’에서 ‘DI 뮤직’으로 바꿨었죠. 본격적으로 음악 쪽으로 발을 뻗기 위해서였습니다.”
콜록.
‘회, 회사명을 바꿨다고?’
하마터면 독한 안동 소주로 사레가 걸려, 얼굴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눈물, 콧물 다 뽑을 뻔했다.
놀란 이유는 사명을 바꾸는 건 상상 이상으로 자본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Necessary라고 까리하게(?) 영어로다가 사명을 지으려다 고민 끝에 결국 NRY라고 만들었던 이유도 돈 때문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사명이나 마크를 바꾸는 데에는 그만큼 더 어마어마한 액수를 투자해야 한다.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몽땅 교체해야 하니까.
‘그런데 다 큰 것도 아니고 고작 꼬마 아가씨 꿈 하나에 사명을 갈아엎다니…….’
절대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어 대표는 이야기하다 잠시 숨을 멈췄다.
“뭐, 그 과정 중에 아슬했던 일도 있었지만, ‘누구’ 덕분에 무난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였다.
어 대표 눈동자에서 과거를 찾던 빛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의미심장한 이채를 띠었다.
창석은 순간 느껴진 섬찟한 기운에 흠칫 근육이 땅겼다.
고개를 들자, 어 대표는 창석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창석은 어 대표의 이야기가 어떤 시기를 말하는지 알았다.
톡신을 빼내던 그때.
어 대표는 전 대표가 수작을 부리던 그 당시를 말하고 있었다.
사명을 교체한다면 법적으로도 굉장히 다양한 부분의 점검이 필요하다.
‘만약, 그때 당시 사명을 교체하기 위해 걸리는 흔적들을 정리하던 시기였다면?’
전 대표가 물밑에서 수작질로 겨우 청소한 구역을 더럽힌 격이었다.
그대로 법인 변경 절차를 진행했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긴 구멍 탓에 DI 뮤직은 여러모로 큰 위기를 맞았을 수도 있었다.
창석은 은은한 빛깔의 도자기 잔 속 물결치는 소주를 바라봤다.
이제야 조금은 DI 뮤직 측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이 이해된다.
“알고 계셨군요.”
“알다마다요.”
“은지의 곡은 명분이었군요.”
“이번 지원은 그때의 보답이기도 하지만, 시작은 이슬이의 관심부터였긴 했습니다. 때마침 찾아보니 얽혀 계시기도 했고…….”
어 대표는 뒷말은 알고 있지 않냐는 듯, 예의상의 미소를 띠며 말을 아꼈다.
이건, 그때 본의 아니게 준 도움이긴 하지만 ‘고마웠다’라는 단순한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보답일까.
아니면, 이 후원을 받고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지내라는 ‘경고’일까.
박 대표의 감각에 붉은 등이 켜졌다.
궁금증보다 훨씬 강한, ‘더 들어선 안 된다’라는 의미의 본능적인 경고등이었다.
똑똑.
그때였다.
때마침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직원의 노크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오늘 박 대표가 온 이 식당은 특수 부위는 직원이 익혀 주는 형식의 고급 식당이었다.
지금까지 익혀 먹은 것은 꽃등심살과 살치살 등 안심과 등심 정도의 부위로.
다음은 직원이 특수 부위를 구울 차례였다.
박 대표로서는 아주 좋은 타이밍에 직원이 온 것이라 하늘이 도운 기분이었다.
어 대표가 꺼낸 주제는 듣는 귀를 조심해야 할 이야기인 만큼, 여기에서 끝내야 할 것이다.
“안창살과 부챗살입니다.”
직원이 나무집게를 이용하여 마블링과 맛깔스러운 붉은 기가 맴도는 소고기를 불 위에 올렸다.
치익.
입안에 침이 고이는 맛있는 소리를 내며 살짝 익힌 소고기는 박 대표와 어 대표의 앞으로 놓였다.
“…….”
어 대표는 이야기를 멈춘 이후.
생각을 알 수 없는 굳은 얼굴로 소고기를 음미했다.
묵묵히 독한 안동 소주를 들이켜며 식사는 계속됐다.
“누님이…….”
“예.”
다행히, 박 대표의 예상대로 주제는 다시 어 대표의 사적인 가족사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으로 몸이 나빠졌습니다.”
“저런.”
“DI 뮤직으로 사명이 변경되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던 시기였죠. 누님은 저를 믿었고, 회사의 대표직을 승계한 제겐 책임져야 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회사와 조직.
그리고 친누이가 그토록 아꼈던 자식까지.
“누님이 해 주려던 모든 것을 제가 줘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
어 대표는 이어서 놓인 다음 부위를 음미한 후, 잔에 반쯤 남은 독한 소주를 단번에 입안에 털어 넣고 이야기를 이었다.
“그게 누님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저한테 믿고 맡긴 보답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했지요.”
“…….”
“이슬이는 고생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자라도록 해 주고 싶었습니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다라…….
조용히 듣기만 하던 창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아니, 과할 정도로 유토피아적인 이야기다.
‘고생을 모르고 행복만 알고 자란다면 좋긴 좋겠지.’
하지만 행복하기만 한다면, 그건 과연 좋은 걸까.
박 대표는 은호와 은지를 떠올렸다.
꼬질꼬질하고 경계심 강한 길고양이 같던 두 꼬맹이.
어릴 적부터 많은 고생을 했던 녀석들이 소원을 말하라고 했을 때, 두 사람이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생존할 수 있는 안전한 식사.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듯, 고생을 알기에 그만큼 행복에 대한 귀함을 깨닫는다.
“거기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
“때로는 떠먹여 주는 것보다 스스로 이겨 내야 배우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박 대표가 한마디를 얹자, 어 대표는 느리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덧붙였다.
“스스로 이겨 내기 위해선 실수나 실패를 해야 한다는 말인데, 글쎄요.”
이번엔 박 대표가 어 대표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든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돈도, 힘도 있으면서 실수를 인정하는 건 멍청한 겁니다.”
박 대표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돈과 힘만 있다면 실수를 해도 소리 없이 수습하는 것쯤은 일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걸로 수습하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해결이 안 된다면 그건 돈이나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만큼 키우면 문제없을 일이고요.”
아, 이거였나.
창석은 기묘하게 느껴지던 어 대표와의 거리감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던 건지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사상이었다.
실수로 삐끗한 순간, 많은 것들이 무너진다.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말이다.
카메라 앞에서 몇 번이고 재단되고 또 재단되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더더욱 그 영향이 막대하다.
“당신조차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긴다면 어쩌시려고.”
격해진 감정을 감추기가 힘들었는지, 박 대표는 아주 조금 말이 강하게 나갔다.
한편, 어 대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박 대표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했다.
“그땐, 제 목숨으로 감당해 주면 됩니다. 그러라고 누님이 이 자리에 나를 두신 거니까.”
울컥.
술 때문인 걸까.
박 대표는 격해진 나머지 ‘X친 것 아니냐’라는 말이 목울대까지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애써 어금니를 악물며 욕을 참았다.
박 대표는 콧김에 가까운 한숨을 흘리며 감정을 가라앉히고 다시 말을 이었다.
“떠나신 누님의 생각을 저는 모르니까 함부로 말을 얹기는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대표님이 이슬 양에게 바람직한 어른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군요.”
이런.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진심이 터져 버렸다.
어 대표의 미간이 언짢은 듯 비틀렸다.
이미 이렇게 이야기가 나온 이상 박 대표는 그냥 참는 것을 포기하고 냉정하게 할 말을 이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아니, 이미 아시겠지요.”
“…….”
“저 또한 은호와 은지, 두 녀석을 거둬 키운 입장입니다.”
역시나 은호와 은지의 과거를 알고 있는지 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제 입장이지만, 어 대표님의 교육관은 제 가치관 아래에선 방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하.”
어디 더 떠들어 보라는 듯, 어 대표의 눈빛이 살벌했다.
하지만 박 대표 또한 그에 못지않게 상당한 눈빛으로 어 대표를 마주하고 있었다.
“인간은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고, 부모의 역할을 맡은 이상 자식의 사회화 교육은 필수입니다.”
“……사회화?”
“기본적인 예절과 대화라는 것을 하는 방법은 부모의 역할을 받은 자로서 똑바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죠. 대표님의 방식대로 이슬 양이 자란다면 고생은 모를지언정, 절대 인간적으로 바르게 자라지는 못할 겁니다.”
박 대표는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슬 양은 고생을 몰랐던 만큼, 견고했던 만큼 더 크게 상처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상처는 물론이거니와, 무너진 이슬 양에게 가장 잘못한 존재는 바로 당신이 될 겁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래요.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슬 양을 지키겠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렇게 당신이 떠나 버리면 남은 이슬 양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어 대표님이 누이분을 위해, 이슬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만약 이슬 양에게 올인하고 싶은 상대가 생겼을 때는요?”
“…….”
창석은 회귀 전 은호와 에이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른다.
하지만 은호와 은지를 다루는 존재답게 이 정도의 예측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