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93)
모든 직원이 떠난 NRY 엔터테인먼트 사옥.
지잉.
문자가 왔다는 진동에 창석은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것도 잠시.
문자를 보낸 주인공을 확인하자, 박 대표의 입꼬리가 늘어졌다.
‘자기♥’
헤벌쭉.
감출 수 없는 기분을 귀에 걸릴 것 같은 입꼬리가 증명하고 있었다.
[자기♥ ― 오빠 언제 와?]
[나 ― 애들이 또 일을 늘려 놔서 많이 늦을 것 같아요.]
― 야식으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자기♥ ― ㅋㅋㅋㅋ 이긍~]
― 먹고 싶은 거 음…]
― 오빠가 해 주는 김치찌개?]
[나 ― 가면서 재료 사 갈게요 ㅎㅎ]
[자기♥ ― 언능 일 끝내시고 오셔요]
[나 ― 네~ ]
― 전하께선 푹 쉬고 계시옵소서]
[자기♥ ― ㅋㅋㅋㅋ 알겠어요~]
철수와의 깨 떨어지는 짧은 깨톡 이후.
창석은 퇴근을 앞당기기 위해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빠른 손길로 편지를 스캔 후, 흑백 반전, 은호가 지워 달라던 ‘ㅅ’ 부분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지우개의 투명도를 높여 대충 톡톡 두드려 주기는 했다.
은호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어색해한다.
하지만 저렇게 쓰려고 노력해 본 것을, 관심 있게 보는 팬이라면 어떤 의미로 남겼는지 알지 않을까.
사람을 경계하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두 사람과 처음 만났을 적이 떠오른다.
경계심 가득한 길고양이 같던 둘도 이젠 어릴 적에 비해선 아주, 아주, 아―주, 순해진 편이었다.
창석은 이런 사소한 것이 장하고 대견해서, 은호가 발전했다는 증거와도 같은 ‘ㅅ’ 남겨 뒀다.
‘귀엽기도 하고.’
창석은 완성된 편지를 바라보다, 곧 훈글 창으로 눈을 돌렸다.
재미없는 시간이었다.
한참 동안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은호가 이야기했던 검은 봉투에 붉은 왁스 실링.
게다가 기왕이면 EG 마크를 넣고 싶어서 금형까지 진행해야 했다.
창석은 요청서를 작성 후 파일과 함께 보영이 퇴근 전 잡아 둔 거래처에 긴 메일과 함께 파일을 전송했다.
“끄으으아.”
창석은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자리를 정리했다.
시간은 다들 퇴근하고도 두 시간이 꼬박 넘어간 시간이었다.
“또 일이 늘어나 버~렸구~나♪”
창석은 음률이 섞인 혼잣말을 하며 흥얼거렸다.
한편, 곧장 퇴근하기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회사 바닥을 쓸고 간단하게나마 대걸레로 닦은 뒤, 모든 휴지통을 비웠다.
이런 잡일까지 다 직접하고 나서야 창석은 슬슬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직원들은 모두 6시 정각에 떠났건만.
창석이 회사 문을 잠갔을 땐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직원이 생기긴 했지만, 수십 년간 혼자 해 오던 이 버릇이 금세 고쳐질 리 없었다.
‘아마…….’
은호와 은지의 일중독의 시작도 사실 이런 자신의 모습에서 시작되었던 건 아닐까.
창석은 자신은 오래 일을 해도 자식 같은 이 남매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만나던 순간부터 어지간히 고집이 세던 녀석들이 뜻대로 따라 줄 리가 없었다.
일전에 일정 하나를 끝마치면 무조건 휴식하기를 약속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약속을 밀어 보려고도 했다.
실제로 그러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요 녀석들이 이젠 혼날까 봐 숨어서 일을 한다.
그게 문제였다.
은호는 거짓말을 잘 안 하다 보니
휴대폰을 멀리 두던가, 연락이 되어도 대화 주제 자체를 피했다.
한편.
은지는 입을 열면 들킨다는 걸 본인도 아는지.
일부러 모른 척 쓸데없는 딴소리를 하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일 수도 있지만, ‘끝까지 숨겼다’라는 점이 문제였다.
거짓말은 좋지 않다.
특히 연예계에서는 더더욱.
어떤 이슈가 터졌을 때, 사측에서 대응이 늦어지면 마른 장작에 던진 담뱃불이 불을 옮기듯 그 여파가 무섭게 번져 간다.
그래서 신뢰는 유지해야 좋은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거기다 은호와 은지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아닌 만큼, 창석도 아직 은호와 은지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런 차에 자칫 일이 터져 버리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사태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서였다.
창석은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서야 했다.
「“대신!”」
「“네!”」
「“지금 준비하는 것들이 끝나고 난 뒤나 아니면 정말 힘들 때.”」
「“끝난 후나 힘들 때!”」
은지가 창석을 따라 외쳤다.
「“그땐 무리하지 말고 쉬는 거다.”」
「“네.”」
「“숨기지 말고!”」
「“네…….”」
「“헤헤…….”」
「“웃지만 말고 어서 약속해. 은지도.”」
「“네~에.”」
새롭게 다시 약속하던 당시 일이었다.
톡신 녀석들과 가까워진 이후.
제 잔소리를 요리조리 피할 줄 알게 된 녀석들인지라, 창석은 다른 방식을 떠올렸다.
그게 바로 이 방법이었다.
「“손가락 걸어.”」
박 대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은호는 예상치 못한 방식인 듯 옅은 웃음을 띠었다.
은지 또한 눈동자가 감춰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얌전히 두 사람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딱 대. 사인, 복사, 붙여 넣기.”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회사 복도 중앙에서 셋이 꼼지락꼼지락.
서로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사인을 하고 손바닥은 겹쳐 밀며 복사, 손뼉을 치며 붙여 넣기를 했었다.
「“약속했다잉.”」
「“네! 하핰, 재밌다.”」
「“네.”」
이 유치한 방식이 의외로 은호와 은지에게는 놀랍게도 지금까지 중 가장 잘 먹히는 약속 방법이었다.
* * *
살려 주세요
리얼 예능에서 종종 리얼이 아닌 때도 있다.
바로 오늘 같은 날.
“어디 가?”
은지가 커다란 나비 모양 머리핀으로 대충 긴 머리를 집어 올리며 간단히 짐을 싸고 있었다.
“캠핑이나 갈까 해서.”
“갑자기?”
“이렇게 갑자기 출발해도 갈 수 있는 곳이 있대.”
“어딘데.”
“안 멀어. 같이 갈래?”
“그래.”
척 봐도 굉장히 딱딱한 대화가 오갔다.
이 장면을 볼 시청자분들 중 눈치챈 분들은 몇이나 있을까.
그렇다.
협찬이다.
광고다.
‘캠핑장.’
한번 가 보고 싶긴 했었다.
전처럼 낚시터 끌려가거나 그런 게 아니라, 뭐랄까.
정말 내가 쉬고 싶어서 가는 그런, 진짜 휴식을 할 수 있는 곳.
사실 그동안에도 갈 기회는 많았다.
대표님한테 캠핑에 ‘ㅋ’만 말해도 바리바리 챙겨 오실 게 눈에 훤하니…….
하지만 나는 캠핑장 텐트를 직접 치고 세팅하고 이런 건 취향에 안 맞아서…….
……라고 핑계를 대지만 취향이고 자시고 그냥 귀찮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협찬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글램핑이라고 했던가?’
고급스러운 텐트와 내부는 일반 집처럼 써도 될 것 같은 곳―사진으로만 봄―이었다.
기대는 되네.
‘어릴 때 기분 나겠다.’
* * *
이은지와 폐가에서 숨어 살던 그 시절.
폐가에는 마당이 있었다.
거친 흙 틈에는 꽤 큼지막한 돌도 있었고 담벼락 근처에는 주먹만 한 돌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은지랑 난 운 좋게 빈 생일 케이크 상자 속에서 촛불을 켜는 데 쓰라며 넣어 둔 성냥 2개를 발견했다.
한창 추워지기 시작하던 때라, 최대한 폐가에 불씨가 옮겨 붙지 않도록 안전하게 담벼락 근처에서 불을 피우기로 했다.
은지랑 같이 돌을 주워 와서 블럭 놀이를 하듯 작은 화로를 만들었다.
장작이 필요해서 온 동네를 두 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전단지, 나뭇가지, 담배꽁초 등 탈 것 같은 물건들을 이것저것 주워 왔다.
그리고 기대하며 불을 붙였다.
치익.
성냥이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성냥을 어른들이 쓰는 것만 봤지.
직접 켜 본 건 처음이라 어린 난 놀란 마음에 성냥을 던져 버렸다.
다행이라면 우리가 만든 그 화로에 정확하진 않아도 아슬하게나마 들어갔다.
그리고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따뜻했다.
아주 잠깐.
시작은 배운 적도, 알려 주는 이도 없기에 ‘균형’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 문제였다.
대충 쌓아 올린 돌들은 때를 다한 듯 와르르 쓰러졌다.
젖어 있던 게 문제였을 수도 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비가 왔었으니까.
“어, 어어!”
설상가상.
놀란 나머지 남아 있던 성냥 하나를 물웅덩이 속에 떨어뜨려 버렸다.
다시 불이 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젖은 성냥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먼저 불을 붙였던 종이와 나무들도 비로 인해 젖어 있긴 매한가지.
조금 있던 젖지 않은 전단지가 재가 되자 불씨는 환상처럼 꺼져 버렸다.
그날은 나보다 한참이나 작았던 시절의 이은지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그냥 모든 게 서러웠다.
그땐 내가 왜 우는지도 몰랐다.
젖은 성냥에 불이 안 붙는 게 속상해서.
젖은 물건에 불이 옮겨 붙지 않는 게 속상해서.
열심히 쌓아 올린 공든 돌화로가 무너져서.
화로가 무너지면서 튀어 오른 돌에 발등이 까져서.
비가 오고 난 뒤, 찬바람이 뼈가 시리게 추워서.
그냥 그땐 모든 것이 서러웠다.
“하하.”
그땐 그 시절이 정말 슬프고, 아프고, 괴로웠는데 뒤돌아보면 나한테는 추억―추억이라고 표현하긴 뭐하지만―이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는 비극이지만 멀리서는 희극이라는 그 말처럼.
이젠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추억이었다.
“왜 웃어?”
짐을 싸던 은지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캠핑하니까 우리 어릴 때 생각나서.”
“응? 어떤 거?”
“불 피우잖아.”
“불? 아, 아. 폐가?”
기억하는 건가?
무언가 떠오른 듯한 반응에 갸웃거리며 은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맞다. 거기 폐가 마당이었나? 담 쪽에서 되게 오래 나뭇가지랑 전단지 모아 와서 불 피우려고 둘이서 끙끙댔었지. 하핰.”
“맞아.”
“근데 막, 하필 주워 온 장작이 싹 다 젖은 거라 불도 안 붙고, 그땐 그걸 몰라서 왜 안 붙냐고 오빠 울고―.”
“뭐야, 너 왜 기억하고 있냐.”
“그땐 좀 또렷하게 기억나. 그때 우리가 쌓아 놨던 그 미니 돌담 무너지면서 오빠 발에 상처 났잖아.”
“맞아.”
“거기다 성냥 하나 남은 거 물 고인 데 떨어져서 그거 다시 주워서 켜 보려고 했는데 불 안 붙어서 울면서 화내고. 하하핰.”
“너 왜 이렇게 잘 기억해. 하하.”
“맞지?”
“어, 난 너 그때 어려서 기억 못 할 줄 알았어.”
“오빠가 운 일이 많이 없잖아. 그래서 그런가 봐.”
추억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했다.
사실 둘이 있었다면 더 떠들었겠지만, 지금은 수많은 카메라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걸 은지도 알고 있는지,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나중에 이야기하세’라고 무언의 대화를 걸어왔다.
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후.
은지는 추억에 잠긴 눈으로 가방을 보더니, 그때 생각이 나는지 피식 웃으며 짐을 마저 챙겼다.
나도 은지를 따라 주섬주섬 물건을 운동 가방에 챙겨 넣었다.
물건이라고 해도 갈아입을 한 벌과 종이비누,
냉장고에 있는 주스 하나.
놀랍게도 이게 끝이었다.
미용 용품이야, 이은지가 본인 알아서 다 챙기지 않을까.
‘뺏어 써야지.’
그리고 가면 웬만하면 필요한 건 팔 테니까.
솔직히 짐이 많은 것 자체가 번거로워서 ‘가서 살래’라는 생각이 제일 컸다.
최근에 너무 일에 쫓겨서 그런가.
솔직히 긴 휴식은 아니고 아주 조금만, 여유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것도 좋지만, 좋은 공간에서, 그런 것들.
감성적인 배경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최근 다음 앨범을 준비하며 가사를 너무 쥐어 짜내다 보니 이젠 더 나올 것도 없는지, 떠올리는 것마저도 힘이 들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