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92)
은호가 제안한 손편지 아이디어는 포장까지 들어간 마당에…….
냉정하게 생각해선 회사의 처지에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었다.
오로지 팬들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계획이긴 했다.
‘회사 이미지도, 팬들에게도 꽤 좋은 이벤트가 될 수 있긴 하겠지.’
현재 포스터 포장이 늦어진 관계로 상자가 두 개로 나뉘어 배송될 예정이니, 일정상으로도 문제는 없다.
다만, 박 대표가 반대한 이유는 그런 예산과 관련된 문제에서 하는 걱정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박 대표와 은호와 은지의 관계는 단순히 일반적인 대표와 연예인이 아니다.
그보단 가족에 가까운 사이니까.
‘나쁘지 않아. 계획 자체는 꽤 마음에 들기도 해.’
그래서 박 대표는 더더욱 쉽사리 입 밖으로 ‘OK’를 말할 수 없었다.
일반적인 앨범 활동 이외에도 은호와 은지가 본인들 스스로 만들어 버린, 숨 막히는 일정 때문이었다.
은호와 은지는 E-UNG의 활동 공백을 길게 가지는 걸 싫어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전생에 일, 정확히는 음악 못하다 죽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집착하는 모습이었다.
그 결과.
현재 두 사람은 첫 미니앨범이 나오고, 활동하면서 동시에 다음 앨범 준비에 정성을 쏟고 있다.
현 앨범 활동에 더해 다음 앨범 준비.
작사, 작곡, 녹음.
자체 제작인만큼 가장 바쁜 건 곡을 쓰고 가사를 쓰는 은호와 은지였다.
심지어 여기에 일상이라고는 하나 일이기는 매한가지인, ‘등본상 혈육’ 프로그램 촬영까지.
심지어 매주 빠지지 않는 PT나 피부과 관리, 데뷔 이후 계속 다니고 있는 보컬 수업과 댄스 수업까지.
여기에 손편지까지 추가한다?
“안 돼.”
박 대표는 두 사람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뻔히 알기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왜 편지야?”
이유가 있긴 했지만, 은호는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이건 회귀 전 일이었으니까.
솔로로 활동하던 그 당시.
많이는 아니었지만 적지 않게, 팬분들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힘든 그 시절에도 한두 장의 편지가 오기도 했다.
나쁜 편지도 적진 않았지만, 열기 전 혹시 팬분의 편지일까 해서 항상 작은 기대를 했다.
그 ‘기대’하던 그 짧은 시간이 좋았다.
당시에는 모든 게 힘들어서 감사한 마음보다 내 힘듦이 더 컸었지만, 지금은 행복해서일까.
그때가 종종 떠올랐다.
조금 더 고맙다고 표현하지 못한 그런 아쉬움이 남았다.
보내 주셨던 팬분들의 편지는 아직도 봉투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글씨체로 썼는지까지 기억이 난다.
힘든 와중에도 감사했던 그 마음은, 정말 진심이었다.
덕분에 편지를 받을 때의 그 설렘들은 하나같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마침 팬 사인회 당첨권은 따로 보내야 하니까.
그냥.
그때가 생각나서 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렇게 말했다간 센터에 끌려갈 게 뻔하니…….
“편지 받고 기분 안 좋은 사람은 없기도 하고, 이번에 선주문도 엄청 많았잖아요.”
“그랬지.”
“팬분들한테 고맙다는 의미에서 작은 이벤트라도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은호는 적당히 돌려 말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기 바빴다.
“그래, 은호야. 네 말대로 프린팅을 하고, 당첨자의 이름만 쓴다고 치자.”
“좋아요.”
“……은호야, 팬 사인회 당첨자가 200명인 걸 알고 하는 말이지?”
“오.”
박 대표의 이야기에 오히려 은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300명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100명 줄었네요.”
“허.”
허허.
박 대표는 살짝 머리가 어지러웠는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네 계획대로라면 그 200명의 이름을 다 네가 손수 쓰겠다는 말이잖아.”
“그렇죠.”
“그 시간은?”
“차로 이동할 때나, 밥 먹을 때나 틈틈이 쓸게요.”
“혼자 그걸 다?”
혼자서 하겠다고 했다간 무조건 반대할 것 같은 분위기.
은호는 힐끔 눈치를 보다, 은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은지도 글씨체가 저보다 구리긴 하지만…….”
“뭔, 뭔 소리야! 와, 갑자기 이렇게 깎아내리기 있냐?”
“왜, 사실인데.”
“헛소리하지 마. 내가 너보다 백 배는 더 나아! 지렁이만도 못한 인간이.”
“헛소리는 자기가 하고 있으면서 누가 누구보고…….”
“니가 헛소리하는 거라고!”
“응. 아니야. 누가 봐도 내가 낫거든.”
“회사다. 싸우지 마라.”
박 대표가 경고하자, 반박을 못 한 은지는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었다.
은호는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은지한테는 더 약이 오른 것 같았다.
“재수 없어, 이은호.”
“응, 너도.”
“웩.”
은호가 눈웃음을 짓자, 은지는 질겁하며 팔뚝을 털어 냈다.
“그만.”
“…….”
“…….”
은호와 은지는 갑자기 드리워진 그림자에 입을 닫았다.
박 대표는 보살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은호와 은지는 이게 마지막 경고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긴 회의 결과.
손편지는 쓰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괜찮은 이벤트라고 생각한 직원들의 결정이 컸다.
“일단, 손편지를 쓸 거면 여기서 당장 써.”
“아.”
“엇.”
은호는 ‘아, 그렇겠네요.’ 의미의 짧은 소리를 흘렸다.
한편, 은지는 조금 당혹스러운 듯 박 대표의 눈치를 봤다.
“택배 이미 포장 중이라 할 거면 빨리 보내야 해서 지금 써야 진행할 수 있어. 왜, 은지는 못 하겠어?”
“아뇨! 할 수 있어요.”
“그래.”
창석은 A4 용지 여러 장을 복합기에서 꺼내 와, 은호와 은지에게 각자 건넸다.
“한번 써 봐.”
“네.”
“으음, 네.”
은호는 술술 써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안녕하세요. 은지예요.」
한편 은지는 이 이후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 때.
박 대표는 중간 체크 겸 은지의 편지와 은호의 편지를 거둬들였다.
“오호.”
박 대표의 입에서 여러 의미가 담긴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은호는 글을 잘 쓴다.
글은.
문제는…….
“얘들아.”
“네?”
“지렁이가 친구 먹자 안 하더냐.”
“…….”
“이야, 이렇게 쓰려고 해도 힘들겠다.”
내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글씨로 손편지 제안을…….”
박 대표의 장난 섞인 놀림에 은호와 은지는 재빠르게 본인들이 쓴 편지를 채 갔다.
줄이 없어서 그렇다기엔 은호는 심각할 정도로 점점 시작점이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한편 은지는 자음과 모음이 대충 바늘을 흩뿌려 둔 듯, 절대적으로 본인만 알아볼 것 같은 글씨체였다.
은호라고 또 잘 쓰는 건 아니었다.
은지와 정말 비슷한데, 조금 더 정리된 정도…….
딱 그 정도.
“기훈 씨.”
“네!”
“거기 자 4개랑 스카치테이프 가져와 봐.”
“네.”
박 대표의 명령에 기훈이 얼마 지나지 않아 15cm 자 4개와 스카치테이프를 가지고 왔다.
박 대표는 책상에 자를 테이프로 세로로 하나 붙인 후, 아래에는 A4 용지를 깔았다.
“여기 맞춰서 써.”
가로로 둔 자는 한 줄을 넘길 때마다 내리는 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글씨체는 어쩔 수 없어도 각은 맞춰야지.”
“……그렇게 별로예요?”
은지가 갸웃거리며 물은 그때였다.
박 대표는 조용히 A4 용지 하나를 꺼내, ‘안녕하세요. 박창석입니다.’를 썼다.
그리고 은호와 은지에게 내밀어 보였다.
“와…….”
“그러네요. 지렁이 맞네요.”
은지는 감탄하다 입을 닫았다.
은호는 순순히 인정했다.
“대표님, 학교 다니실 때 글쓰기 연습이라도 하셨었어요?”
“했지. 그땐 다 했어.”
감탄이 나올 만도 했던 것이, 박 대표의 글씨체는 ‘한글’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정석’의 그 글씨체였다.
다시 편지를 써 내려가는 두 사람.
은호는 술술 썼지만, 은지는 두 줄 쓰고 멈춰 버렸다.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은호가 쓴 걸 커닝하려고까지 하자, 박 대표는 은지의 종이를 빼앗았다.
“훔쳐볼 거면 그냥 포기해.”
“아. 쓰, 써 볼게요.”
박 대표의 도발에 입술이 톡 튀어나오긴 했지만, 은지는 다시 종이에 집중했다.
“다 썼냐.”
“네.”
“끙.”
“은호야, 넌 참…….”
박 대표는 은호의 편지를 읽으며 짧은 감탄을 흘렸다.
가사야, 잘 쓴다는 건 알았다지만…….
“글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고, 5분 남짓한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쓴 편지치고는 나쁘지 않은, 적어도 박 대표의 기준에서는 예상보다 아주 잘 쓴 편에 속했다.
은호는 예상치 못한 칭찬이 민망했는지, 목덜미를 감싸 쥐며 말했다.
“그냥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 쓴 거예요.”
시뻘겋게 변해 가는 은호의 귀를 보며, 박 대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 짜슥. 숫기가 그렇게 없어선. 귀 떨어지겠어.”
“아, 안 떨어져요.”
은호는 펜을 쥐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귀를 가렸다.
하지만 이미 벌겋게 끓고 있는 반대쪽 귀는 여전히 노출된 채였다.
“그, 글씨는 최대한 신경 썼는데 실수한 부분이 있어서 다시 쓸까요.”
“어디?”
“마지막에…….”
박 대표는 지워진 ‘ㅅ’을 보며 미소를 띄웠다.
“됐어. 이 정도면 잘했다.”
“그래도 실수인데 새로 쓰는 게…….”
“어허, 종이 아까워.”
“…….”
은호는 눈빛으로 ‘이제 와서요?’라며 물었지만, 박 대표는 의미심장한 웃음만 지었다.
“두 장인데, 뒤에라도 다시 쓸래요.”
“안 돼. 이게 너다워.”
“아, 설마 그거 그대로 보낼 건 아니죠? 가려 주세요, 진짜.”
“뭐, 가리긴 가리마.”
“그 찝찝한 대답은 뭡니까?”
“하하하하.”
박 대표와 은호가 투덕거리는 그때였다.
은지는 은호가 글을 잘 쓴다는 칭찬에 질투인지 승부욕인지, 조금 전보다 더 열을 내며 편지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열을 낸 탓일까.
은지의 편지는 박 대표가 절반을 읽은 순간.
“기각.”
“아아아! 열심히 썼는데에에!”
“열심히 쓰기만 했지. 이건 팬분들한테 하는 말이 아니잖아. 그냥 문장 채우기지.”
은지의 입술이 오리처럼 나왔다.
턱에는 호두 하나가 만들어졌다.
박 대표는 그런 은지는 보며 황당하면서도 못 산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넌 신이 실수한 수준으로 작곡에 재능을 때려 맞았으면서 은호 재능이 그게 그리 질투가 나더냐.”
“눼.”
“하하하하.”
입술이 툭 튀어나와선, 그럼에도 솔직하게 답하는 은지 탓에 혼내려고 이야기를 꺼냈던 박 대표는 차마 뒷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하여간 둘 다 못 말려. 어쨌든, 편지는 은호 걸로 보내자.”
“아, 대표님.”
“왜.”
“편지 혹시 색 반전해서 검은 편지로 보낼 수 있어요?”
“왜?”
“가사…….”
“가사?”
박 대표가 궁금해하자, 은호는 당황하며 입을 닫았다.
“아니에요. 그냥, 그, 검은 편지 봉투에 빨간색 왁스로다가 옛날 편지처럼 보내면 좋을 것 같아서요.”
“또 뭐 짜고 있구만.”
“하하…….”
은호는 말을 아끼며 웃음으로 상황을 얼버무렸다.
“알았다. 그렇게 작업해서 보내마. 대신 급하게 작업하는 만큼 중간에 완성된 걸 보여 주는 건 못 한다?”
“아, 급하니까 그건 어쩔 수 없죠.”
“그래.”
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호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만큼, 박 대표 또한 어딘가 수상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