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83)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숍으로 가는 길.
은호는 긴 시간
깨톡을 통해 예찬에게 전해 들은 프러포즈 ‘썰’을, 은호는 날이 밝고 정신이 들자마자 은지에게 풀었다.
이야기를 들은 은지는 나직이 속삭였다.
“X친, 찢었다.”
“찢긴 갑자기 뭘 찢어! 하하.”
“어떡해, 나도, 나도…….”
나도?
“나도 결혼할 때, 프러포즈 그렇게 할래. PD님 X나 멋있어……!”
은지가 눈을 반짝이며 외치자, 은호가 웃으며 답했다.
“연애부터 안 하냐? 너 연애 해 본 적도 없잖아.”
“연애 해 봤거든! 그리고 PD님도 연애 안 하고 결혼하잖아!”
“두 분은 엄청 오래 알고 지냈잖아. 게다가 PD님은 너처럼 모솔은 아니야.”
“뭔, 나 모솔 아니야!”
은호가 의심하며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아니야?”
은지의 눈이 바쁘게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이유는 이어진 대답으로 알 수 있었다.
“나름대로 연애 해 봤거든! 인터넷상이긴 했지만…….”
“인…… 뭐?”
은지도 자신은 없었는지 연애 경험을 밝히면서도 차츰 목소리가 작아졌다.
은지가 속삭인 말에 은호는 마치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황당해졌다.
그것도 잠시.
“……하, 하하핰!”
은호가 꺽꺽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우럭 대가리야!”
“하하하하핰, 야, 씨, 너 같으면 안 웃겠냐, 아하핰!”
차로 이동 중이라 은지의 고백을 본의 아니게 앞자리에 앉아 있던 현우와 슬기도 들어 버렸다.
“푸흡.”
“언니!”
현우는 어금니를 악물며 애써 웃음을 참았지만 슬기는 참지 못했다.
하하하하.
밴 안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웃지 마! 다들 웃지 말라고! 나, 나는 나름 진지했어!”
“아하하하핰!”
은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소리쳤다.
하지만 웃음이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자, 은지는 완전히 토라진 듯 입이 댓 발 나와선 은호를 무섭게 노려봤다.
후에 찾아올 보복이 무섭긴 했는지, 은호는 은지를 달래기 위해 사과하려고 했다.
“미안, 야 근데, 으흑.”
하려고는 했다.
“앀. 미치겠네. 하하하핰.”
웃음이 안 멈춰서 성공은 못 했지만…….
그런 은호의 반응에 은지가 씩씩거리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웃든지 사과를 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해, 망할 해산물 자식아!”
“하하하핰, 호박아, 너도 나 놀린 적 있잖아.”
은호는 어릴 때 만든 아이디에 걸렸다가 은지가 깔깔거렸던 그 일을 들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 듯 은지는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렸다.
은지가 삐친 채 창밖을 보고 있던 그때.
그런 와중에도 슬기와 현우와 은호는 노력은 해봤으나, 웃음을 멈추진 못했다.
밴 내부에서는 은지를 제외한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도착한 셀라스 숍.
은호와 은지는 제각각 다른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 * *
스타일링을 받는 동안 차 안에서는 그렇게 웃으며 놀렸지만, 은호는 ‘결혼’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많아졌다.
‘저 왈가닥이 결혼이라…….’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 그림이다.
애초에 이은지가 연애라니…….
‘어우.’
그건 떠올리는 것조차 속이 안 좋아서 재빠르게 집어던져 버리고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내가 결혼…….’
문제는 그 방향이 삐끗한 것 같다.
더 상상이 안 가는 분야였다.
은지를 놀리긴 했지만, 나 역시 정상적인 연애 경험은 없었으니까.
‘말이 연애지…….’
어이슬과는 그냥 노예 생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이슬한테 악감정은 없다.
놀랍게도 없다.
다만, 그냥.
일전에 다칠까 봐 셀라스 숍 앞에서 잡아 준 적은 있었는데…….
걔랑은 그렇게 마주친 일이 인연의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정도.
딱 그 정도 생각만 있었다.
‘연애나 결혼이나, 역시 나는…….’
잘 모르겠다.
철수 PD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와, 대단하다.’
이은지는 무슨 환장의 나래를 펼치는 것 같았는데, 나는 딱히 이야기를 들은 후기는 그게 끝이었다.
‘이은지가 평범한 가정이라…….’
하하.
저 성격을 다 받아 주면서도 이은지한테 밀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잘해 주는 그런 놈이 어디 있으려나.
꼭 그런 사람을 만나라는 강요는 아니었다.
그냥, 은지의 보호자였던 오빠로서 기왕이면 그런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 정도.
한편, 이은지는 평범한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이번 생은 그냥 이은지가 후회 없이 행복했으면 한다.
바라는 건 그것밖에 없다.
나는 지금이 살아온 모든 시간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니까.
* * *
지잉―.
곧 마무리를 앞둔 그때였다.
“저, 잠시…….”
주머니에 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진 듯.
은호는 스태프분께 잠시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때였다.
휴대폰을 확인하던 은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은지!”
급한 연락이었는지, 은호는 담당하던 스태프가 잠시 도구를 챙기러 간 사이 은지를 불렀다.
“뭐.”
드라이를 받고 있던 은지가 멀지 않은 곳에서 대답했다.
“그, 우리 클라우드에 축가로 뽑을 만한 곡 있어?”
“축가?”
“어.”
“대표님 결혼식 때 부르려고?”
“어. 그, 예찬 선배가 축가 같이 녹음하자고 하셔서.”
“오! 좋아!”
“추천하는 곡 있으면 번호 좀.”
“음, 90번대 쯤에서 몇 개 있었던 것 같은데, 근데 됐어.”
“어?”
“이따 녹화 끝나면 새로 뽑자.”
“…….”
신곡을 또 뽑겠다는 말에 은호는 살짝 흠칫했다.
“안 그래도 PD님 이야기 듣고 떠오른 멜로디 있거든.”
“……그, 래. 기념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받아들였다.
* * *
결혼식
깔끔한 정장 느낌의 베이지색 턱시도를 걸친 박창석 앞.
똑 닮은 외모의 새하얗게 바랜 머리칼이 눈에 띄는 노인이 서 있다.
창석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외국에 계셨었다.
갑작스럽게 준비하게 된 결혼인 만큼 상견례도 영상통화로 간단하게 진행했다.
그만큼, 정말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었다.
하지만 박창석의 부모님 아니랄까.
두 분은 놀라울 정도로 냉소적인 분들이었다.
“석아.”
“호텔에 들렀다가 오셨어요?”
“당연한 거 아니냐.”
창석의 아버지 박청룡은 근 몇 년 만에 아들을 만났다.
“넌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보다 머리가 더 벗겨진 거 같냐.”
“오랜만에 본 아들한테 머리 이야기부터 하는 건 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미역 같은 거 잘 챙겨 먹어.”
“……안 그래도 그때 말했던 애들 중에 하나가 수시로 제품이나 탈모에 좋은 것들 문자로 자주 보내 줘서 이것저것 잘 챙겨 먹고 있어요.”
“오! 고 녀석들도 오늘 와?”
“당연하죠. 곧 올 겁니다. 아들놈보다 어째 그쪽에 더 관심 있어 보이십니다?”
“그럼, 징그러운 너보다야, 어떻게 보면 내 손주 새끼들 아니냐.”
청룡의 진심 섞인 농담에 창석은 소리 내 웃으며 눈을 돌렸다.
곁에는 고급스러운 푸른 원단으로 잘 짜인 한복을 차려입은 심순자 여사. 박창석의 어머니가 계셨다.
눈가에 주름이 있긴 하지만 관리를 잘하신 듯 심순자 여사는 곁에 있는 청룡보다 족히 일곱은 어려 보이는 동안이었다.
심순자 여사의 비녀에 말려 있는 새하얀 머리칼이 그녀의 푸른 한복과 함께하니 고고한 분위기가 배가 되었다.
“평생 장가 안 갈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더니, 어디서 저런 고운 아가를 데려왔어.”
“하하.”
“그리 좋으냐.”
“예. 좋아요. 하하.”
창석이 실실 웃으며 대답하자, 어머니가 피식 웃으며 창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마누라한테 잘해. 네 아빠처럼 나이먹고 구박 안 당하게.”
“어허이, 내가 뭐!”
“시끄럽소, 용꼬리.”
“저, 저, 여편네, 용 꼬리라니 남편 이름으로 말하는 꼬락서니 보소……!”
그때였다.
순식간에 창석의 어머니를 기준으로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순자가 웃으며 청룡을 바라봤다
“여, 편? 여보, 방금 뭐라 하셨소?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말해 줄래요?”
청룡은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미, 미안하오, 심 여사.”
“내 비행기에서도 경고했는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에, 에이, 심 여사아~. Joke, Joke.”
“Joke는 무슨 얼어 죽은 Joke.”
“여, 여보오~ 내가 미안하오.”
박창석은 투덕이는 부모님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하시네요.”
“여전하기는, 여전하면 아직도 저가 내 꼭대기인 줄 알지. 자꾸 저러면 오지에다 던져 버리고 올 거다.”
“하하, 집 가는 길에 오지가 있어요?”
창석의 어머니는 굳은 얼굴로 창석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땅덩이가 넓은 나라는 도시에서 벗어나면 널린 게 오지야. 기사한테 부탁하면 노인 하나 버리고 오는 거야 쉽지.”
“여보오…….”
청룡이 화난 순자를 달래려고 조심스럽게 순자의 손을 쥐려던 그때였다.
순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청룡의 손을 부채로 내려치며 몸을 입구 방향으로 돌렸다.
그때였다.
“어머, 고와라.”
순자는 언제 기분이 나빴냐는 듯 밝게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 도착한 듯.
막 예식장에 들어선 쌍둥이처럼 똑 닮은 남매 때문이었다.
“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매는 창석을 발견하자 놀란 눈과 동시에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와! 대표님 대박!”
“오…….”
박창석을 향해 다가오는 은호와 은지를 보며, 순자는 놀란 눈으로 다시 박창석을 돌아봤다.
창석은 마침 잘됐다며 다가온 은호와 은지를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 돌려세웠다.
“어? 왜요?”
“아, 안녕하세요.”
은지가 갸웃거리는 동안 은호는 눈치껏 일단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허이고…….”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뒤따라 감탄을 터뜨렸다.
“너희들 할머니, 할아버지시다.”
은호가 놀라던 그때였다.
“우와, 안녕하세요! 이은지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은호입니다.”
“어머어머…….”
어디선가 철썩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아파, 엄마, 아파!”
순자가 감탄하며 창석의 어깨를 팡팡팡팡 내려치는 소리였다.
“너는 이런 애들을 데리고 있으면 사진이라도 줘야 할 것 아니니, 세상에. 그래서 애들은 모델? 아니면 배우?”
“둘 다 아니고, 가수예요. 남매로 아이돌 시키고 있어요.”
“어머나. 세상에나, 보석이 따로 없네. 저런데 노래까지 잘해?”
“춤도 잘 춰요. 작곡도 얘들이 다 하고, 은호는 작사도 잘하고…….”
박창석은 어머니에게 은호와 은지의 능력을 자랑했다.
“네가 사람 보는 눈은 날 닮아서 잘 보기는 하는구나.”
“하하.”
창석의 자식 자랑에 순자가 자연스럽게 본인 자랑으로 넘어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랑은 좋지만, 은호와 은지는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었다.
창석은 한참 동안 은호와 은지 자랑을 하다,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은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철수가 너희 기다리고 있더라. 들어가서 이야기하고 있어.”
“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은호와 은지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곧장 신부 대기실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이따 보자, 우리 손주들.”
“……네.”
“이따 봬요! 할머니!”
“아이고, 이쁜 것들.”
태연하게 인사 후, 등을 돌린 은호는 목 안이 뜨거웠다.
손주.
모르는 단어는 아니었지만,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여서 그런가.
은호는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끅! 흐으.”
한편,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에 은호가 돌아본 그때.
옆에는 턱에 주름진 복숭아 씨앗 하나를 만들며 울먹이는 은지가 있었다.
“화장 번진다. 이은지.”
“끅, 워터프루프라 안 번지거든, 멍충아.”
“누가 누구보고, 하하.”
신부 대기실에 들어서기 전, 은호와 은지는 언제 울었냐는 듯 젖은 눈가를 손끝으로 깨끗하게 훔친 뒤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