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80)
E-UNG의 이번 ‘TIME’ 앨범은 전곡 뮤직비디오가 있다.
이 말은 곧 당연히 비용이 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은호가 걱정했던 것에 비해 박 대표의 생각보단 그리 큰 비용이 들지 않았다.
박 대표가 톡신을 키우던 오랫동안 쌓아 온 노하우 덕분이었다.
배경 돌려 막기 같은 사소한 잔머리를 쓴 행동들이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수천만 원을 오가곤 하니까.
그 ‘노하우’에 크게 이바지하는 건 당연하게도 김철수 PD였다.
김철수 PD는 필요한 장면을 잘 촬영한다.
배경을 지능적으로 연출할 줄 아는 기술 있는 PD였다.
그런 ‘때우기’ 식 촬영을 했을 때, 가장 중요한 건 편집이었다.
편집에 공을 들이면, 촬영 당시에는 비용이 덜 들었을지언정 없던 퀄리티도 생겨난다.
같은 배경도 어떤 조명을 썼는가.
어떤 효과를 줬는가.
같은 배경이 성이 되기도 하고 무덤가가 되기도 하는 등 천차만별의 연출이 가능하다.
다만, 여기서는 김철수 PD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이때 필요한 존재가 바로 롱잉 프로젝트 팀.
김철수 PD가 길렀다는 후배의 회사.
실력 하나는 확실한 데다 속도 또한 지금껏 함께 작업해 온 그간 많은 팀 중 빠른 편에 속했다.
대중들의 반응 또한 이곳에서 작업한 작품을 유독 긍정적으로 보는 듯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는지, 김철수 PD는 젖은 단발머리를 털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촬영장 안에 들어섰다.
“좋은 점심입니다!”
“오셨습니까!”
“자자, 시간 없으니, 얼른 준비하고 들어갑시다!”
시간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오늘 오후까지 촬영을 마치고, 적어도 오늘 저녁 전까지는 롱잉 프로젝트 팀에게 파일을 넘겨야 제한된 기간 안에 맞출 수 있으니까.
벼락치기도 하루는 있건만, 이건 그것보다도 심한 수준이었다.
‘은호 씨가 장면을 지능적으로 잘 따 놨어.’
그럼에도 이런 촬영이 가능한 건 은호가 보낸 그 제안서 덕택이 컸다.
은호는 구상해 둔 장면을 복잡한 포인트 없이 전달하는 바가 한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표현해 뒀다.
철수 PD의 촬영 방식을 많이 고려한 듯 고민한 흔적이 제안서에서부터 드러나 보였다.
사흘.
은호가 세계관과 함께 'Red'의 뮤직비디오 스토리를 짜 오기까지 걸린 시간.
‘Same day, Same time’이 발표되고 사흘이 더 흐른 날.
‘Red’의 뮤직비디오 촬영 날이었다.
제안서를 재구성해서 콘티를 제작해야 하는 입장이었던 철수 PD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자신까지 배려해 준 은호가 고마웠다.
거기다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은호가 반드시 촬영을 원하는 장면들은 인원이 대거 필요하지도 않았다.
“언제부터 있었어?”
“이제 막 준비하고 나온 거야.”
철수 PD가 스태프들을 정리하고 돌아왔을 때,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지예찬이 촬영장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섹시’.
은지가 그 단어를 괜히 말했던 건 아닌 듯, 지예찬은 붉은 망사 셔츠만 걸친 차림이었다.
은호나 은지에게선 볼 수 없었던 하늘하늘한 체형 너머로 민망한 꼭G`s의 실루엣이 비쳤다.
어쨌든, ‘섹시’라는 단어와는 아주 정확하게 맞아 들었다.
은호와 은지는 ‘Same day, Same time’ 스케줄 탓에 오늘 ‘Red’ 뮤직비디오 촬영장에는 조금 늦게 도착할 예정이었다.
“오랜만이야, 마녀.”
“넌 나이가 몇인데 유치하게 아직도 마녀라고 하냐.”
지예찬이 요염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이런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철수 PD에게는 조금의 자극도 없는지, 그녀는 자연스럽게 의상을 무시하며 대답했다.
지예찬은 예상한 반응인 듯 장난스럽게 철수에게 대꾸했다.
“유치하게 살아야 젊어진다잖아.”
“……네가 말하는 거 보면 좀 신빙성 있는 것 같긴 하네.”
철수 PD는 흘러내리는 앞머리가 거슬렸는지, 검은 플라스틱 머리핀으로 앞머리를 고정하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넌 아직도 팀장님 옆에 붙어 다니고 있었네.”
“야, 말을 해도…… 붙어 다니다니.”
지예찬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자, 철수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발끈하며 대꾸했다.
“이쯤 되면 그냥 고백하지.”
“남의 연애사에 신경 끄시지?”
“왜, 팀장님도 애인 없는 지 10년 넘었잖아.”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넌 네 연애나 걱정하세요. 곧 마흔이 결혼은 언제 하려고?”
“아직 몇 년 더 남았잖아. 그리고 난 아직 일이 더 좋아서 딱히? 100세 시대인데 80대에 하지, 뭐.”
철수 PD가 홧김에 대꾸하려고 했지만, 상대는 천하의 지예찬.
아직 20대라고 해도 믿을 법한 액면가.
‘돈이 없는 놈도 아니고…….’
뒤틀린 성격마저도 지예찬의 팬들은 좋아하니, 철수는 할 말이 없었다.
철수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털며 만만한 사람을 돌아봤다.
지예찬이 있다면 항상 있는 존재.
철수 PD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영희야!”
“허억.”
멀지 않은 곳에 허벅지끼리 사이가 나쁜 듯 양다리를 쩍 벌리고 꾸벅꾸벅 졸며 앉아 있는 영희.
철수가 소리치자, 영희가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넌 매니저라는 놈이 촬영장에서 졸고 있고, 잘하는 짓이다.”
“아, 누나, 형한테 털리고 나한테 화풀이해 뿌네.”
“네가 매니저니까 네가 받아, 인마.”
영희는 험악해 보이는 외모로 순박한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근데 누나는 인제 왔나?”
“먼저 왔었거든. 잠깐 회의하느라 촬영장에 늦게 온 것뿐이야. 그것보다 저 성격 예민한 인간―지예찬― 다음 스케줄 언제야.”
“흐암.”
영희는 묵직한 몸을 일으키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대답을 기다리던 철수는 기다리다 못해 재촉하듯 통통하게 튀어나온 영희의 배를 중지로 쿡 찔러 넣었다.
“억, 오, 오늘은 없어.”
“없어?”
“행님이 이응이네랑 촬영한다꼬 통째로 비아 났다.”
“지예찬이 은호랑 은지 어지간히 좋아하는갑네. 20분 뒤부터 촬영 들어갈 거야.”
“예이.”
신별 촬영 순서는 보통 영상에 배치된 신 순서와 다른 경우가 많다.
지예찬이 촬영하는 신 또한 마찬가지로.
20분 뒤, 촬영이 시작되고 지예찬은 기도하는 모습을 취하며 촬영을 이어 갔다.
지예찬의 촬영을 마칠 무렵.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촬영장에 우렁찬 인사가 울렸다.
은호와 은지의 등장에 여러 시선이 한곳에 날아들었다.
“왔어?”
“세팅하고 오느라, 죄송합니다.”
“괜찮아. 마침 예찬이 촬영 다 끝났으니까. 바로 들어가면 돼.”
“네!”
“어머, 근데 은호 씨 오늘…….”
“네?”
은호는 앞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붉은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그 귀는 뚫은 거야?”
“아뇨. 귀찌입니다. 뚫는 건 좀 무섭더라고요. 하하.”
은호가 검은 귀찌를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웃자, 붉은 눈동자가 눈웃음에 가려졌다.
붉은 눈은 렌즈였지만, 풀 세팅을 마친 은호에게는 왠지 원래 제 눈이라고 해도 믿을 것처럼 잘 어울렸다.
철수 PD는 이후 뒤늦게 들어온 은지를 돌아봤다.
“세상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 남매는 볼 때마다 비주얼이 기가 막히네…….’
은지는 은호와 같은 붉은 렌즈를 착용하고 있었다.
의상은 평소 편안한 분위기가 아닌 화려한 붉은 레이스가 돋보이는, 목을 감싸는 터틀넥 디자인의 검은 드레스였다.
이어서 붉은 반짝이가 콕콕 박힌 검은 나비 장식의 비녀까지.
은지의 손톱에도 비녀와 비슷한 입체적인 나비 장식까지.
은지는 어깨를 드러낸 오프 숄더 부분을 제외하면 평소보다도 노출이 전혀 없는데도 고혹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슬기는 감탄하는 철수 PD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철수 PD가 그런 슬기와 눈을 마주치자 따라서 엄지를 세웠다.
은호의 의상도, 은지의 의상도 오늘 작품은 슬기가 삼 일 내내 밤샘해 가며 직접 수선한 디자인이었다.
슬기는 밤샘한 보람을 은호와 은지의 완성된 비주얼에서 느끼고 있었다.
* * *
이후 ‘Red’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날.
이번 뮤직비디오는 E%들에게도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기 충분했다.
둥― 둥둥
둥― 둥둥
베이스와 베이스 드럼이 교차하며 중독적인 묵직한 리듬이 흘렀다.
화면 속에는 성스러운 분위기의 빛 아래 새하얀 사제복 같은 차림의 지예찬이 무릎을 꿇은 채였다.
아이의 웃음 같은 장난기 가득한 멜로디.
단순한 C 메이저 코드로만 이뤄져 있어 밝지만, 은근히 흘러나오는 은지 곡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오히려 묘한 분위기를 드러냈다.
벗어나려 했지만 늦었나
첫 만남이 실수였나
지예찬이 노래를 멈춘 그 순간.
화면이 암전되며 붉은 조명 아래.
지예찬은 맨살이 비치는 얇은 붉은 망사 와이셔츠에 검은 가죽 바지를 차림으로 몸을 일으켰다.
두 번은 그러지 말아
후회하기엔 이미 늦은
그때였다.
지예찬이 고개를 든 순간.
화면에 잡힌 지예찬의 얼굴과 목 곳곳에는 번진 붉은 립스틱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사이렌이 번쩍이듯, 화면이 붉게 깜빡이며 지예찬 앞에 검은 드레스 차림의 은지가 나타났다.
은지는 굳은 얼굴로 손을 뻗었고, 지예찬은 무릎을 꿇으며 은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듯 보였다.
하지만 손이 닿기 전.
은지는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지예찬의 뒤로 다가갔다.
은지의 화려한 손이 지예찬의 가슴을 쓸며, 그의 목을 감싸 쥐었다.
은지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끈적하게 단어를 읊었다.
Red
지예찬은 생기를 잃은 눈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은지의 손을 받아들였다.
눈을 뜨니 비치는 moon Light
내가 짜 둔 계획이
네 등장 하나에 무너졌어
하루에 수십 번 달라지는 너
그게 날 미치게 만들어
곧 은지의 모습이 그림자로 사라지고, 수많은 여인들의 손이 뻗어 와 지예찬을 뒤덮었다.
나 나나 나 red Light
나 나나 나 red Night
‘Red Light’에 맞춰 사이렌이 반짝이고, ‘Red Night’에 맞춰 붉은 달이 화면을 메웠다.
나 나나 흐트러졌어
너라는 작은 변화 하나조차
끊어 내지 못해
어느새 침대에 누워있던 지예찬이 입을 벌려 노래했지만, 목소리는 은지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Red’를 말하던 은지처럼, 이번엔 지예찬의 목소리가 끈적하게 단어를 읊었다.
Reset
화면이 회전하듯 바뀌며 풍경 또한 바뀌었다.
검은 화면에 문이 열리자, 붉은 눈을 한 깔끔한 차림의 은호가 나타났다.
Closet 속 숨겨 둔
위스키를 one shot
찰나 같은 red Sunset에 취해
은호는 손을 뻗어 화면을 쥐었다.
다음 장면에서 은호가 꺼내 든 건 고급스러운 위스키 병이었다.
은호는 깨끗한 둥근 얼음이 담겨 있는 글라스 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운 후, 곧장 입가로 잔을 가지고 갔다.
가사와 정확히 들어맞는 장면이었다.
눈을 뜨니 비치는
moon Light
이어서 푸른 하늘에 은호가 병을 든 채 해를 가리자, 병을 치워 냈을 때 창밖의 하늘은 노을이 지고 있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커튼을 치고 손을 튕기자, 다시 커튼을 열었을 땐 이번 역시 가사에 맞춰 달빛이 들어찬 밤하늘로 시간이 바뀌어 있었다.
은호는 웃으며 밤하늘에 떠 있는 반짝이는 별을 따, 화면에 비췄다.
다가오는 밤을 위해
마시고 달려
미워해도 미련하게
번쩍인 화면은 잠시 후.
어느 그림을 감상 중인 은지로 바뀌었다.
은지는 몸을 돌리며 화면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건 날 미치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