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179화 (179/309)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79)

뮤직비디오

깨끗한 피아노 연주에 베이스 드럼이 얹어지며 재즈팝 분위기의 노래가 시작됐다.

베이스 드럼이 등장하는 타이밍에 맞춰 밝은 하늘이 추락하듯 별 하나 뜨지 않은 검은 하늘로 바뀌었다.

검은 고양이 ‘호냥’이 화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얼룩 고양이 ‘지냥’의 손으로 유추되는 손이 호냥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손이 닿는 그 순간.

호냥의 시선에서 지냥이 부서졌다.

말 그대로, 부서져서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어둔 밤이 내려와

잡으라던 그 손

후회했던 그 손

놓치지만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호냥은 작은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화면이 어두워지고 다시 밝은 빛이 드리웠을 때, 얼굴을 가린 건 고양이 모습의 호냥이 아닌 은호였다.

화면이 서서히 올라가며 은호의 얼굴을 비췄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 틈으로 은호의 눈에 붉은 이채가 번뜩였다.

은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몽조차 되지 못한 기억이 더는 널 시리게 하지 않게

맨살에 걸친 검은 재킷.

발목이 드러난 검은 슬랙스와 검은 구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와중에, 색을 가진 건 은호의 손에 쥐어진 흐트러진 꽃다발뿐이었다.

꽃을 든 은호는 그늘을 벗어나, 새하얀 배경에 들어섰다.

두 번 놓지 않을게

다신 잃지 않을게

은호가 정면을 바라보자 새하얀 배경 중심에 놓인 검은 침대 하나.

검은 침대를 둘러싼 붉은 캐노피가 바람에 살랑였다.

어느새 침대 옆으로 다가온 은호는 붉은 장막 같은 캐노피 너머를 보며 노래를 이어 갔다.

곤잠 깨우지 않게

같이 가

화면이 바뀌었다.

달을 향해 지냥이 손을 뻗고 있던 팔.

화면 속 손은 자연스레 가로등 불빛을 향해 뻗은 사람의 팔로 바뀌었다.

Same day Same time

Same day other crime

은지의 샛노란 눈동자가 가로등의 빛을 받아 토파즈처럼 반짝였다.

한편, 은지는 팔을 걷어 올린 검은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에 맨발 차림.

싸움이라도 벌인 건지 은지의 입가에는 핏자국이 딱지처럼 메말라 붙어 있었다.

험한 일을 겪은 듯 검은 셔츠에는 중간중간 단추가 없어서 맨살이 비쳤다.

나서야 했던 새벽길에

걸어야 했던 새벽길을

쓰레기 더미 위에 늘어져 있던 은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털고 일어나서 걸었다.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한낮처럼 밝은 조명이 즐비한 시내.

은지는 씁쓸한 시선으로 그 풍경을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허락되지 않은 날

떨어졌던 그 손

잃었었던 그 손

덤덤하던 은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났다.

곧 은지는 눈에 눈물을 한껏 머금은 채 노래를 이어 갔다.

커져 버린 꼬맹아

기억하니 그날을

I would do the same again

시내를 거닐던 은지는 한 상가의 유리창 너머, 진열장에 시선을 뒀다.

마네킹에 걸쳐 있는 어깨가 드러난 흰 블라우스와 짧은 하얀색 미니스커트.

마네킹에는 발에는 검은 하이힐이 신겨져 있었다.

멈춰 있는 몸이 고여 있는 맘이

놓아지지 않으니까

유리창을 향해 손을 뻗은 은지는 너덜거리던 검은 와이셔츠를 벗고 어깨가 드러난 흰 블라우스로 갈아입었다.

맨발이었던 발에는 검은 하이힐을 신었다.

I would do the same again

그 시절 미련했던 서로가

거칠었던 어린 숨과

흔적뿐인 가치가

마네킹에 걸려 있던 하얀 미니스커트는 잠든 듯 쓰러진 사람 더미에 던져 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화면이 바뀌고, 은호는 일전의 ‘이 길 위’, ‘해가’의 뮤직비디오 속 술병이 뒹구는 풍경 속에 놓여있다.

Same day Same time

Same day other Crime

붉은색을 짙게 띤 보랏빛 조명 아래.

나태하게 늘어진 은호는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검은 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서야 했던 새벽길에

걸어야 했던 새벽길을

주문처럼 은호가 가사를 속삭이자, 검은 문이 열리며 은지가 들어섰다.

Same day Same time

꿈만 꿨던 Prime

부족했던 Cash

놓지 못한 Wish

은호와 은지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은호는 손을 내밀었고, 은지는 경계심을 띤 채 손을 붙잡았다.

처음의 깨졌던 장면이 겹쳐, 서로의 손이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 은호의 손이 은지의 손을 낚아챘다.

악몽조차 되지 못한 기억이

더는 널 시리게 하지 않게

같은 가사였지만, 천장이 없는 고음이 이어졌다.

앞서 잔잔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격렬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은호에게 손을 붙잡힌 순간.

은지의 샛노란 눈동자가 물감이 번지듯 붉게 물들었다.

두 번 놓지 않을게

다신 잃지 않을게

……

나서야 했던 새벽길에

걸어야 했던 새벽길을

앞서 나온 가사와 같았지만 다른 분위기 탓일까, 달라진 코드 때문일까.

그 시절 미련했던 서로가

거칠었던 어린 숨과

흔적뿐인 가치가

Same day Same time

꿈만 꿨던 Prime

부족했던 Cash

놓지 못한 Wish

일전엔 그것을 씁쓸히 바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 은호와 은지가 함께 부르는 노래는 그것을 쟁취하겠다는 욕망이 어려 있었다.

붉은 장미 꽃잎이 폭발하며 화면을 덮었다.

순식간에 검게 말라붙은 장미 꽃잎은 바스러지고, 은지는 입을 열어 속삭이듯 뱉었다.

same again

한 번 더.

기분 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화사하던 은지 미소가 서서히 사악하게 물들었다.

Same day Same time

Same day Same dream

은지는 검은 레이스 베일을 뒤집어쓴 남자의 손을 잡고 무대 위에 올랐다.

나서야 했던 새벽길에

걸어야 했던 새벽길을

은호는 같은 레이스 베일을 뒤집어쓴 여자를 에스코트하며 은지를 뒤따라 무대 위로 올랐다.

무대 위에서 춤을 이어 가던 두 쌍의 커플.

Good Night

은호와 은지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 그 순간.

은호와 은지의 붉은 눈이 빛난 순간, 검을 레이스의 베일을 뒤집어쓴 남녀는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은호와 은지는 가루가 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춤을 멈추고 씁쓸히 무대의 중앙에 섰다.

다음 날

우리가 다시 웃으며 만날 수 있게

둘은 각자 다른 방향의 팔을 돌리며 허리를 숙였다.

거울처럼 똑같은, 신사적인 인사를 마친 순간.

화면이 갈라지고 은호와 은지의 입술을 비췄다.

Good Night

두 입술이 똑같이 인사를 건넨 그 끝에서야 노래가 끝났음을 알리듯 화면이 검게 변했다.

치직―

그때였다.

화면에 노이즈가 일어나며 조금 전에 사라진 검은 레이스 베일을 쓴 남녀를 다시 비췄다.

두 사람은 자신의 눈을 가린 베일을 걷어 냈다.

베일을 걷어 내자 나타난 얼굴은 갈색 눈동자의 평범한 은호와 은지였다.

[징하다 징해 이응이들 얼굴만 어메이징한 줄 알았는데 연기력 뭐냐고ㅠㅠㅠㅠ]

└지지 눈빛 변할 때 소름 쫘규ㅠ

[랑이가 지지 손 낚아채는 거 나만 심쿵?]

└현실>촬영 끝나자마자 손 박박 닦았을 듯ㅋㅋㅋㅋ

└아ㅋㅋㅋㅋ 디럭스 비북에 이거 촬영본 있을까?

└ ㅁㅊ 이거 생각 못했다

└ 헐 아 디럭스 살걸 헐

[지지랑 랑이는 석기 시대에 태어나도 연예인 했을 것 같다...]

└지지야 내 열매 다 가져가 ㅠㅠㅠㅠㅠ

└내가 가진 가죽 다 줄겤ㅋㅋㅋㅋㅋ

└맘모스 뿔도 받냐ㅋㅋㅋㅋ

└이응이들 콘서트 티켓 조개 껍데기 120개!

└민물 바닷물 노상관?

└엌ㅋㅋㅋㅋㅋ

[랑이 어깨는 태평양이고 얼굴은 조막만 한데 몸은 듬직하고]

└팩트 지지가 더 듬직함

└이거 ㄹㅇㅋㅋㅋㅋㅋ

[이번 뮤비 컨셉 미친 거 아니냐고 내가 붉은 눈 흑발 좋아하는 거 어케 알고 ㅠㅠㅠㅠ]

└이응이들 원래 흑발인데?

└그래서 사랑해

└ㅋㅋㅋㅋㅋㅋㅋㅋ

[뮤비 내용 내 나름대로 해석해 봤는데 호냥이가 악마가 되면서 지냥이를 인간 세상에서 찾았고, 지냥이는 힘들어서 타락한… 포기]

└아 더 해 줘!!! 더 해 줘!!!

[아래에 해석하다가 포기한 이퍼 이해해ㅋㅋㅋㅋ 나도 해석하려고 몇 번이나 돌려보고 있는데 걍 쩔어 정신 차리고 보면 해석이고 모고 푹 빠져서 봄ㅋㅋㅋㅋ]

└공감ㅋㅋㅋㅋㅋㅋ

└진짴ㅋㅋㅋㅋ

└나도 뮤비 해석 해 보겠다고 계속 다시 돌려보는데 영상미 미쳤고 지랑이 얼굴도 미쳤고 분위기 미쳤고 감탄만 하다가 다시 틂ㅋㅋㅋ

[이퍼들아!!! 이거랑 이 길 위랑 해가 뮤비에 랑이 눈 색 보면서 같이 봐봐 ㄱ꼭 봐!!!!]

└헐 뭐야

└왜 뭔데? 나 봐도 모르겠어 ㅠㅠㅠㅠ

└랑이 눈 색이 처음에 소파 장면에서는 이번에 은지랑 같은 노란색인데 나중에 뒤편에서 빛 따라 붉은색 노란색 섞이면서 깜빡거려!!!

* * *

“이걸, 3일 만에 짰다고……?”

“예? 아, 네.”

소식을 듣고 NRY 엔터테인먼트에 찾아온 지예찬은 은호가 가지고 온 서류를 읽어 내려가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세계관 자체는 그저께 다 썼는데, ‘Red’ 뮤직비디오 제안서로 정리하느라 좀 늦었어요.”

함께 은호의 서류를 살피던 박 대표.

“박 팀장님, 무슨 괴물을 기르고 계신 거예요…….”

지예찬이 넌지시 던진 장난 반, 진담 반인 농담에 박 대표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고양인 줄 알고 길렀더니 호랭이 새끼들이었어. 그나저나 이 이야기는 어떻게 나왔냐.”

박 대표가 은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그게, 선배님들하고 저희하고 콘셉트가 꽤 겹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래?”

“네. 특히 감정을 다루는 분위기가…….”

은호의 설명에 지예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톡신은 TaKa 엔터테인먼트에서 활동하던 당시.

간단히 설명하자면 톡신은 독이 때로는 약에 쓰이듯, 욕망에 물들어 죄를 버리고 선해져 가는 이야기의 세계관을 그렸다.

하지만 은호가 가져온 세계관은 당시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나빠지네?”

“네.”

“착한 게 이미지적으로는 더 좋지 않아?”

“착하다는 게 항상 좋은 건 아니잖아요. 반대로 나쁘다고 무조건 악한 것도 아니고…….”

지예찬이 의문을 띠며 물은 질문에 은호가 웃으며 말꼬리를 늘였다.

‘…….’

지예찬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지예찬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람을 볼 때 감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탐지견’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같이 지내서 좋은 사람’, ‘곧 사고 하나 칠 것 같은 사람’ 등 사람을 잘 구분하는 편이었다.

지금껏 그에게 은호는 박 대표의 아이들이란 것을 제외하면 ‘눈치 좋은 후배’, ‘실력 좋은 후배’.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그 가치가 조금은 달라졌다.

‘은호가 정말 많이 억누르고 살았고, 살고 있구나.’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재미있었다.

은호가 가지고 온 이야기는 사람은 크고 작은 욕망이라는 놈을 품고 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그건 이야기 꾼인 은호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예찬이 봐 왔던 은호는 나태하지 않다.

하지만 본인의 내면엔 바쁘게 달려온 만큼 나태하게 늘어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한다.

한편, 은지는 거칠지만 거칠기에 더더욱 미움받지 않으려 친절하다.

그러나 은호의 이야기 속 은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시기한다.

그래서 더 높은 자리를 위해.

더 많은 것들을 가지기 위해.

더 완벽한 곡을 만들기 위해.

욕망에 이끌려, 능력을 발현한다.

세계관에서의 은호와 은지는 그렇게 기재되어 있었다.

지예찬은 이어서 다음 페이지로 보고서를 넘겼다.

그때, 지예찬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은호야.”

“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지예찬은 자신의 이름 옆에 쓰인 내용을 읽자, 픽 웃음을 띠며 물었다.

“나는 왜 이쪽이야.”

“아.”

은호는 난감한 듯 지예찬의 눈을 피했다.

한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은호 대신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은지가 말했다.

“아, 그건 제가 추천했어요!”

“은지가?”

“네!”

“왜?”

“톡신 선배님들 중에 선배님이 제일 섹―.”

놀란 은호의 손이 다급하게 은지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발.”

“아파…….”

은지는 얼얼한 입 쪽을 문지르더니 은호를 원망스레 돌아보며 소리쳤다.

“‘섹시’를 ‘섹시’라고 하지, 아니면 뭐라고 그래!”

은호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떨궜다.

한편, 지예찬은 웃으며 고개가 더 크게 기울어졌다.

‘섹……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