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75)
몇 년간 다니던 직장을 얼마 전에 퇴사했다.
「“하하하, 덕질을 위해 이젠 일까지 관뒀구나, 쭈.”」
슬기는 농담 섞인 장난을 치며 핀잔을 줬다.
일에 치이다 보니 내 시간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고3 때부터 일하며 한 직장에 오래 몸담고 열심히 해 온 결과는 나쁘진 않았다.
IRP 통장에 찍힌 두둑한 퇴직금이 그 증거였다.
‘이걸로 이젠 뭘 해야 할까.’
꾸준하게 모아 온 돈과 퇴직금이 모이자 생전 처음 받아 보는 큰 금액이 품에 안겼다.
남들은 큰돈이 생기면 일단 펑펑 쓰고 본다던데…….
난 그간 고생을 해 온 나날이 스쳐, 오히려 돈 쓰는 일이 더 어려웠다.
그래도 돈을 꼭 쓰고 싶은 곳은 있었다.
하나는 내 가수의 커스텀 마이크 선물이었고, 하나는 현실적인 문제와 가족들의 반대에 포기했던 내 ‘가게’였다.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일단 다 관두고 해내기보다 안정적으로 회사에 다니면서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고, 제과 제빵 기능사를 취득했다.
이후 투잡으로 빵 공장 단기 아르바이트도 뛰어 보고 지인의 가게에서 주말마다 일도 하는 등.
퇴사 전부터 족히 몇 년간 충분히 긴 시간을 두고 내가 이 길을 가는 게 정말 옳은지.
꿈만 좇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버티고 해낼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판단해 봤다.
지금이 바로 그 결과였다.
그리고 바로 오늘, 내 가게에 내 가수가, 내, 우리…….
정신이 잠시 아득해졌다.
“주연 씨!”
“언니! 어떡해!”
“하하하하하!”
정신을 바로 잡고 다시 눈을 떴을 땐, 괜찮냐며 바로 눈앞에서 똑 닮은 얼굴의 남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거 진짜…….’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심장에 안 좋다.
주연의 얼굴이 타오를 듯 붉어지자, 옆에서 깔깔거리던 슬기는 눈물까지 터뜨리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괘, 괜찮아요. 그게.”
“진짜 괜찮아요?”
그때, 주연의 이마로 화려한 손이 다가왔다.
촬영이 있었는지 아직 네일 팁을 제거하지 않은 은지의 손이었다.
은지가 주연의 이마를 짚으며 열을 확인하던 그때.
은호는 곁에서 걱정스럽게 주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어떡해. 너무 좋아.”
주연이 황홀하게 홀린 얼굴로 중얼거리자, 이내 슬기뿐만 아니라 은호와 은지마저 웃음이 터져 버렸다.
‘지금 당장 카메라 켜서 저 웃는 모습을 용량 터질 때까지 연속 촬영하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아, 주연은 뒤늦게 이성을 붙들어 맸다.
“죄송해요. 너무 좋아서, 아니, 너무 노, 놀라서.”
“촬영장에서 바로 오느라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는데 마침 같이 가고 싶다고 하시길래 같이 왔어. 나 잘했지?”
슬기가 주연에게 윙크를 보내며 묻자, 주연은 조용히 엄지를 치켜들며 답을 대신했다.
슬기가 CK E&M을 관뒀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땐 ‘왜?’라는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대기업이었으니까.
슬기는 항상 당당했고, 그 모습이 나는 부러웠다.
나는 당시 다니던 회사를 관두면 뭘 해야 할지 몰랐던 데다, 이 회사가 사라지면 왠지 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내 이야기에 슬기는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너 회사에서 무슨 세뇌라도 당했어?”」
요즘 취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라고 대꾸했지만, 슬기는 오히려 내 등짝을 내려찍으며 소리쳤다.
「“쭈, 요즘 세상에 직장인만 직업인 건 아니잖아.”」
「“이것저것 다 하고 싶으면 그냥 프리랜서로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그러면서 살면 돼.”」
실패가 무섭지 않냐는 질문에 슬기는 웃으며 말했다.
「“실패하면 어때서.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건데, 언제든 다시 일어나면 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난 고정적인 수입과 정착하지 못한 삶 같은 건 불안했다.
그래서 슬기가 대단하게 느껴졌었다.
슬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쭈, 나, 나 코디, 합격했어.”」
슬기가 한 아이돌 팀의 코디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와, 누구 코디로?”」
「“이응.”」
「“오―어, 뭐?”」
「“은지님, 은호님…….”」
「“엔, 에, 엔…….”」
「“응. 나 NRY 엔터테인먼트 붙었어……!”」
내내 홀린 듯 허공을 보며 대답하던 슬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혹시, 거기 월급, 얼마 받아?”」
슬기니까 묻는 개인적인 호기심이었다.
정말 정말 가까운 사이니까.
조심스럽게 묻자, 슬기는 소곤거리며 액수를 말했다.
그 액수를 들었을 때, 그제야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그러면서 살면 돼!’라던 슬기의 말을 이해했다.
억대 연봉과 같은 큰돈은 아니었다.
팬심을 공사 구분하라는 계약서를 썼다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
정착이고 뭐고, 가장 좋은 직업이 아닐까.
이런 친구를 둔 덕분에 내 최애 그룹이 내 가게에…….
“어? 오늘이 체인지 파트너 하는 날이었구나.”
그때였다.
은호가 체인지 파트너가 켜진 TV를 보고 있었다.
TV 앞 테이블에는 조금 전 대충 안주로 만들었던 식은 치즈 올린 감자튀김과 캔 맥주가 놓여 있다.
훅, 주연은 갑자기 부끄러워진 듯, 다급하게 테이블을 치우기 위해 반쯤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엇. 거의 손도 안 대셨던데 치우시려고요?”
은지가 아쉬운 듯 감자튀김을 보며 아쉬워하자, 주연은 본능에 가까운 몸짓으로 방향을 틀며 물었다.
“드, 드릴까요?”
“와, 네! 감사합니다!”
“잠깐 다 식어서 데워서 가져다 드릴게요!”
“괜―.”
은지가 손을 뻗으며 ‘괜찮아요’라고 말하려던 그때.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있던 감자튀김과 주연이 사라졌다.
‘만든 건 일단 나중에 내가 먹으면 돼. 아무거나 줄 순 없지.’
어느새 주방으로 들어온 주연은 양팔을 걷어붙이고 냉장고 속 재료를 살폈다.
이곳은 디저트 가게인지라, 냉장고에는 제과, 제빵 재료나 숙성 중인 반죽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료가 전혀 없는 건 또 아니었다.
주연이 일 끝나고 출출한 속을 달랠 겸, 그 외에도 이것저것 식사 대용 디저트 개발을 위해 준비해 둔 식자재가 가득했다.
주연은 팔을 걷어 올리며 단단히 준비를 마친 듯 콧김을 뿜으며 식칼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20분 정도 흘렀을까.
어느새 나란히 앉아 주연이 틀어 둔 체인지 파트너를 보던 세 사람은 주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동시에 그쪽을 돌아봤다.
“간단하게, 준비해 봤어요.”
“……간단한 거 맞아요?”
“와…….”
은호와 은지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고, 슬기는 주연이 무슨 생각인지 알고 있다는 듯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맥주, 드시나요?”
“와, 아, 근데 관리 때문에…… 게다가 이은호, 아니, 오빠는 술찌―, 악!”
“한 캔만 주세요. 은지랑 나눠 먹을게요.”
“왜 사람 발을 밟아!”
“내가 언제 그랬다고.”
“와. 내숭, 진짜!”
은호와 은지가 투덕거리던 그때, 슬기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두 분, 여기까지 와서도 그러시면 저 대표님한테 보고서 올릴 거에요.”
“자,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연 씨.”
슬기의 한마디에 은호와 은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졌다.
오튜브는 자주 챙겨 봤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은 처음인 주연은 당황스러워하다 이미 일상인 듯 평온한 슬기를 돌아봤다.
슬기가 코디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 역시 한때는 단순히 팬심으로 일을 하는 건가 싶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슬기가 그럴 친구가 아니라는 걸 알긴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팬=직원’이라는 건 절대 ‘좋은 직원’은 뜻하진 않으니까.
친구로서도, 팬으로서도 걱정이 없진 않았었다.
그러나 조금 전 투덕거리는 은호와 은지를 바라보는 슬기의 시선은 단순히 ‘팬’보다는 두 사람을 아끼는 ‘관리자’ 정도의 위치였다.
“너 진짜 일하는 거 맞구나.”
“응? 왜?”
“아니야.”
주연이 그런 슬기를 보며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후 은호와 은지는 맥주 캔 하나를 두 잔으로 나눠 마시며, 슬기와 주연과 함께 체인지 파트너를 시청했다.
TV에서는 히든 미션 중, 무서운 가발의 움직임에도 일말의 움찔거림조차 없는 은호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와…… 저걸 안 놀라?”
은지가 놀라며 혼잣말을 흘렸다.
촬영 당시 ‘그랬었다’ 정도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모습을 보는 건 또 달랐다.
“난 너처럼 겁쟁이가 아니거든.”
은호가 픽 비웃음을 띠며 맥주를 홀짝였다.
그때, 은지는 슬기와 주연을 힐끔 보며 은호에게 속닥거렸다.
“그거 먹고 또 옥상에서 ‘와~ 별이다, 별~’ 이 X랄만 하지 마세요, 술 찌질아.”
“야, 이은지.”
“뭐.”
“저거 봐.”
은호는 살짝 술기운이 오른 듯, 나른하게 풀린 눈을 한 채 TV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마침 TV에는 은지가 이제 막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하하하. 겁 진짜, 겁나 많아.”
은지의 나노 단위 걸음을 처음 본 은호는 은지처럼 감상을 말했다.
“아니, 인간적으로 저거에 안 놀라는 니가 더 이상한 거거든?”
발끈한 은지가 반박하던 그때였다.
“야, 저거 봐.”
은호가 TV를 가리켰다.
은지가 자연스레 낚여 화면을 본 그때.
흔들리는 가발이 섬뜩한 BGM과 함께 시청자들의 몰입을 위한 점프 스케어로 화면에 가득 들어찼다.
―으아악!
“으아악!”
화면 속 은지와 바깥의 은지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우렁찬 비명에 순간 주연의 가게가 쩌렁 울렸다.
슬기와 주연과 은호는 그 모습에 자지러지며 큰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진 은지의 욕설을 가린 TTS 탓에 웃음은 멎을 줄을 몰랐다.
“이은호, 이―!”
“하하하하.”
은호와 은지가 방금 일로 투덕거리며 싸우고 있을 때.
“그러고 보니까, 슬기야.”
“응?”
주연은 호기심에 슬기를 돌아보며 물었다.
“넌 은지님 처음 만났을 때 멋있어서 좋다고 했었잖아.”
“응. 그랬었지.”
“요즘은 어때?”
“요즘?”
“응. 아까 방송에서처럼 그런 이미지가 무너지는 모습을 이젠 가까이에서 다 봤을 테니까.”
“아, 하하……. 정말 많은 걸 다 봤지…….”
슬기의 웃음에는 왠지 뼈가 있었다.
이후 슬기는 잠시 곰곰이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여전히 멋있고 좋아. 무대 아래에서는 귀엽고, 작업할 때나 무대 올라갈 땐 멋있고, 가끔 좀 자주 말실수를 하긴 하지만 항상 솔직해서.”
“그래?”
“응. 그래서 더 좋으면 좋았지. 덜해지진 않는 것 같아.”
“부럽다. 이번 직장은 만족하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할 일이 좀 많긴 하지만, 직장 만족도는 200%야.”
슬기가 주연에게 맥주 캔을 내밀자, 주연은 가볍게 캔을 부딪쳤다.
“그럼, 우리 둘 다 성공했네.”
“그러게.”
내 가수가 있어서 설레기도 했지만, 작은 가게가 오늘따라 복작거려서 편안하고 포근한 그런 날이었다.
* * *
“헐.”
“갑자기 왜?”
“야, 너, 너 뒤에.”
“아, 하지 마! X친 새끼야! 같이 가!!!”
골목 멀리서부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거실에 대자로 뻗어 있던 사람의 형체가 샛노란 눈을 떴다.
“오늘도 시끄럽네.”
투덜거리던 형체는 서서히 크기를 줄이며 작아지더니 빛이 닿지 않는 거실의 한쪽 그림자에 섞여 들었다.
이후 창문 너머 새어 나오는 달빛에 몸을 드러낸 건 검은 고양이.
연탄이었다.
연탄은 한쪽 귀를 파닥이며 앞다리와 뒷다리를 시원하게 늘려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진동을 느끼자, 자연스레 현관문 앞으로 타박타박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