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40)
정확한 타이밍을 잴 수 있었던 그 ‘10초’는 다름 아닌 이번에도 서승연 선배가 준 팁이었다.
박 대표가 10초를 세는 동안.
할 말이 남아서 계속 이어 가긴 했지만 은호도 속으로는 따라서 10초를 세고 있었다.
그리고 은호가 입을 다문 순간, 눈치껏 은지도 동시에 입을 닫았다.
‘뭔데?’
‘웃어, 살고 싶으면 무조건 웃어.’
‘갑자기?’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무조건 ‘맞다’고만 해. 내가 X같아도 일단 그렇게 해.’
은지한테 급하게 눈으로 지령을 넘겼다.
다행히 이번엔 전달이 똑바로 된 듯, 은호와 은지는 가식적으로 어떻게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허, 참.
‘이놈들 봐라…….’
그런 남매를 바라보는 박 대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아…….”
박 대표가 한숨을 내쉬자 은호와 은지의 어깨가 동시에 눈에 띄게 들썩였다.
하하, 그 모습에 한 소리를 하려던 박 대표도 결국 웃음이 새 버렸다.
‘니들을 내가 어떻게 말리겠냐, 에휴.’
박 대표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무대에서는 지금처럼 큰 소리 낼 정도로 싸우지만 마라.”
“네.”
“네.”
“얼른 가서 연습이나 해. 그리고 은지는 방 청소해.”
“네에…….”
“가 봐.”
더도 말고 딱 여기까지만 바랐다.
더 해 봐야 이 말썽꾸러기들이 더 들을 녀석들도 아니었으니까.
잔소리가 더 길어지지 않아서인지, 은호와 은지는 환해진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밀지 마!”
“너나 밀지 마.”
문 앞에서 잠깐 투덕거리기는 했지만, 박 대표가 눈치를 주자 도망치듯 둘은 재빠르게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으휴.’
박 대표는 그 모습에 실실 웃으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곧 6월을 앞둔 5월 말 이한 대학교의 축제 첫날.
“신일아, 넌 구경 안 가냐?”
“나 과제 X나 밀린 거 알잖아. 약 올리냐?”
“하하. 그러게 그 교수님 수업 듣지 말라니까.”
“몰라. X발. 이미 들은 거 어떡하라고. 학점은 받아야 할 거 아냐.”
“쯧쯧쯧.”
룸메이트는 신일을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며 혀를 찼다.
신일은 그런 룸메이트에게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며 소리쳤다.
“아, 꺼져!”
“야, 같이 나가자. 유명한 애들 온대.”
“X랄. 어차피 첫날에는 신인이나 모르는 애들 오잖아. 됐어.”
“먼저 보고 있는 애들 말로는 남매 가수 왔다던데.”
“남매뮤지션?”
“아니, 걔네 말고.”
“걔네 말고도 남매 가수가 있음?”
“이응? 미음?”
“뭐야. 그 이상한 이름은, 안 가.”
“여자 X나 예쁘대.”
“안 간다고. 가수가 노래를 잘해야지 얼굴만 반반하면 뭐 하냐? 과제 할 거야!”
룸메이트는 처음부터 놀릴 생각으로 꺼낸 말인 듯, 신일이 화를 내자 오히려 더 키득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알았어. 과제 없는 나는 연예인 구경하러 간다, 새꺄.”
“빨리 꺼져!”
“하하하.”
3일간 이어지는 축제.
축제는 축제였지만 동시에 중간고사가 끝나고 기말 시즌 오기 전, 망할 과제 시즌.
특히 거지 같을 정도로 과제를 쏟아 내기로 유명한 교수의 수업을 듣는 신일은 더더욱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유명한 가수는 마지막 날에 오거나 중간에 오더라도 가장 늦은 시간에 온다는 것이다.
고로 지금 무대에 나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신인들.
‘차라리 지금 시간에 과제를 다 끝내고 늦은 저녁에 오는 유명한 가수를 보겠다!’라는 게 신일 나름의 계획이었다.
기숙사에서 운동장에 설치된 무대까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희미하게나마 스피커로 전해진 목소리가 아주 살짝 들려왔다.
―저희는 E-U,N,G! 이응입니다.
―E-UNG, 이응입니다.
“인사부터 오합지졸이네.”
안 가길 잘했다.
신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이른 시간에 온 첫 팀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신인이라 사람이 적은 탓인 건가.
이응 팀은 노래하기 전에 마이크를 쥐고 애들과 이런저런 소통하는 시간이 긴 것 같았다.
종종 둘이서 투덕거리며 싸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 드디어 노래를 시작하는 듯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멜로디가 흘렀다.
A4 용지에 긴 수식을 써 내리던 신일은 손을 멈칫하며 창밖을 돌아봤다.
“어, 이거…….”
숨 한 번 뱉기가 힘들어.
알고 있잖아 Last Day
아, 이거 그거다.
본가에 내려갈 때면 엄마가 저녁 시간마다 틀어 뒀던 막장 드라마의 OST.
회사 대표가 인격이 여러 개였다던가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거기서 들었던 노래였다.
오늘 온 애들이 부른 노래인지. 아니면 그저 유명한 히트곡을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높은 고음. 인상이 찡그려질 법도 하건만, 그러기에는 딱 아쉬움이 남는 정도에서 소리가 깔끔하게 떨어졌다.
거기다 이어서 들린 목소리는 조금 전 시원시원한 고음과는 또 다르게 굉장히 매력 있는 저음이었다.
‘노래는 잘하네.’
노래 자체는 솔직히, 정말 잘하는 축에 속했다.
그래서일까, 어떤 애들이 부르는 건지 아주 조금은 확인해 보고 싶은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과제를 버리고 뛰쳐나갈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터라, 신일은 다시 과제에 집중했다.
[야 얘네 X나 쩔어!!!]
[너 안 오냐?]
[야 진짜 대박이라니까?]
[안 내려오면 후회 각임 ㄹㅇ]
……집중하려고 했다.
같이 보러 가자고 장난치며 놀리기도 했던 룸메이트가 빨리 오라며 재촉하는 카톡을 쏟아 내기 전까진.
“귀찮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두 번째 곡이 이어질 때부터 신일은 과 점퍼를 걸치고 방을 나서는 중이었다.
* * *
“저희는 E-U,N,G!”
“E-UNG, 이은지.”
“이은호입니다.”
참 희한하다.
오늘은 딱히 틀리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일부러 맞추려고 해도 틀린다.
“여러분, 저희 알아요?”
“몰라!!!”
“알아!!!”
“지지야!!! 랑아!!!”
목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몇몇은 척 봐도 E%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직접 골랐던 3번 응원봉.
그리고 여러모로 사연이 많은 생선 가면을 쓴 검은 고양이와 호박 가방을 든 검은 얼룩 고양이 인형.
얼마 전 출시됐다던 굿즈들 덕분이었다.
「“셋, 둘, 하나 하면 생각나는 단어 말해.”」
캐릭터를 정할 때, 이은지랑 난 서로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단어를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걸 캐릭터에 넣자고.
‘괜히 그랬어.’
이은지가 뽑은 건 당연히 ‘우럭’, ‘해산물’이었고, 나 역시 ‘호박’을 뽑았다.
해산물은 너무 포괄적이라 우럭으로 가기로 했는데, 여기서도 막히게 됐다.
「“이은호 밖에서 가면 많이 쓰잖아.”」
「“내가 무슨 가면을 썼다고.”」
「“착한 척 매너 있는 척 가식 오지게 떨잖아. 그게 가면이지.”」
「“척이 아니라 착한 거거든.”」
「“X랄 염X X을 처 싸세요.”」
투덕거리면서 싸우기는 했지만, 이은지가 제안했던 가면이라는 소재 자체는 나쁘지 않아서 사용하는 쪽으로 이야기됐다.
그리고 난 당연히 이은지도 똑같이 호박 가면을 씌우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둘 다 얼굴에 쓰는 건 ‘별로’라며 딱 잘라 거절했고, 결국 결정된 건 호박 가방이었다.
그렇게 나온 두 고양이 인형은 생각보다 인기가 더 많아진 덕에 ‘이응’이라는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도 종종 초록창 같은 곳에서 구매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회귀 전에 이은지가 저녁 늦게 대학교에서 공연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물론 다른 대학교이기도 하지만…….
‘그땐 운동장을 넘어 건물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몰렸었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우리를 보고도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무대 위에서 운동장을 바라보자 몰려 있는 사람들보다 비어 있는 공간이 더 커 보였다.
이제 막 6시를 조금 넘어갈 무렵인 탓도 있었다.
‘이 학교에는 저녁에 또 다른 유명한 그룹이 온다고 했던가.’
미리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신인이니까.
……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하하, 모르는 분들이 더 많은 거 같네요.”
“아니야!!!”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한 말에 돌아온 우리 팬들의 외침이 씁쓸했던 마음을 위로했다.
그래서 이은지랑 난 우리를 소개하기에 가장 좋은 곡으로 첫 곡을 골랐다.
사람이 몰려야 놀든 말든 하니까.
톡신 선배님들과 함께했던 를 꺼낼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를 꺼냈다.
는 앞으로 우리 힘으로 넘어야만 할 히트곡 성적이기도 했으니까.
여러 의미가 합쳐져서 고른 곡이었다.
날 아프게 하지 말아
위한다면 움직이지 말아
연습을 거듭한 덕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서는 무대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곡을 떼창하는 이 관객들 덕분일까.
복합적인 이유로 아무튼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다는 건 확실했다.
평소보다도 더 높게 음정을 올리자, 이은지가 옆에서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이은지를 도발하듯 픽 웃어 보이자, 곧이어 내 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이은지가 밀고 들어왔다.
어디 해 보라는 듯 비켜 주자 컨디션이 좋기는 이은지도 마찬가지였는지 깔끔하게 고음을 찍었다.
“이번에는…… 여러분, 이거 다들 아시죠?”
“네!!!”
두 번째 곡은 아쉽지만 우리 곡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명한 곡인 만큼 분위기를 띄우기에는 충분했다.
흥이 격해지면서 이은지와 난 높이 있는 무대에서 뛰쳐나가 펜스 너머의 관객들과 손바닥을 맞추며 노래를 이어 갔다.
우리를 찍고 있는 대포 카메라에도 웃으며 포즈를 잡기도 했다.
그렇게 열창하고 무대로 돌아와서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을 끝냈을 때였다.
“와아아아아!!!”
가슴 떨리는 함성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들은 함성 때문인지 살짝 울컥했지만, 억누르며 기쁜 시간을 즐겼다.
“후! 너무 흥분했더니, 숨이 좀 차네요. 이제 마지막 곡을 하려고 하는데, 오…….”
노느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두 번째 곡을 마치고 운동장을 돌아봤을 때, 나는 조금 뭉클해진 기분에 말을 멈췄다.
어느새 사람들이 더 몰려온 운동장.
처음 시작 때와는 눈에 띄게 다를 정도로 그사이 관객들이 정말 많이 늘어나 있었다.
회귀 전 이은지의 인기에 비할 바는 못됐지만 분명 신인치고는 많은 수준인 건 분명했다.
“하하. 늦게 오신 분들, 안녕하세요! E-UNG의 이은호.”
“이은지라고 합니다.”
그때였다.
“야, 이은지.”
조금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서 마이크를 떼고 은지를 불렀다.
은지는 처음엔 갑자기 왜 부르냐며 투덜거렸지만 이내 내 제안을 듣더니 누구보다 반기며 말했다.
“오, 좋아. 완전 좋아. 근데 그래도 돼?”
“뭐, 해 보는 거지.”
짧은 회의를 마친 후에 마이크를 든 건 이은지였다.
이은지한테 분위기를 이야기한 쪽으로 잘 흘러가게 해 보라며 맡겼다.
적어도 공연 횟수로는 이은지가 더 많이 뛰어 봤으니까.
“저희 이번엔 홍보 겸 이번에 낸 신곡을 부르려고 하는데요. 근데 아, 이게 좀 가사가 쫌 그래서―.”
“가사 내가 썼거든.”
“아, 조용해 봐.”
가사에 대한 지적은 예상치 못했던 터라 마이크를 쥐고 반박했다.
하지만 은지는 들은 척도 안 한 채 눈을 빛내며 관객석을 둘러봤다.
“음, 어디 보자…….”
그러고는 누군가를 발견한 듯 또 한 번 무대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어딘가로 향했다.
“이은지! 어디 가!”
“기다려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