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39)
은호의 낮은 목소리는 은지와 비슷한 듯 조금 더 가벼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묵직하게 내려앉는 은지의 목소리와 잘 섞여 들었다.
우리 같이하던 여기에 멈춰서
우리 이 그림자가 해에 사라진 걸 믿자
가라앉아 푸르렀던 우리 새벽에도 빛이 들어와
은호와 은지는 동시에 입을 가렸다가 얇은 천이 휘날리듯 부드럽게 손을 빼냈다.
이구름의 지도로 10kg 모래주머니를 달고도 가벼운 것처럼 유연히 표현했던 만큼 무게가 사라진 지금은 그야말로 무중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이미 마침표를 찍어 버린 이별을 다시 이어 가 보자
네 아침이 내가 되길 빌고 빌어
기도를 올리듯 양손을 포개 올리는 듯하다가 손을 미끄럽게 흘려 나비를 만들고, 이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의 어깨를 털었다.
이어서 둘은 동시에 가볍게 몸을 돌려, 다시 정면을 보더니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며 어깨를 강하게 한 번 튕겼다.
아낄 게 더 많이
함께할 게 더 오래
그때였다.
은호와 은지는 안무를 멈추고 한쪽 어깨만 맞닿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있어
(그래서 우린 지금 여기 있어)
씁쓸한 음성과 함께 두 사람을 비췄던 조명이 꺼졌다.
다시 밝아진 화면에는 ‘The old days’ 붉은 책을 받아 든 손이 있었다.
손의 주인은 당장 책을 펼쳐 보려 했다.
그때.
그 손을 제지하듯, 책을 쥔 손의 손등 위로 또 다른 손이 덮어 왔다.
고개를 들듯 화면이 들렸다.
손등을 덮어 온 다른 손의 주인은 은호였는지, 화면 속 은호가 고개를 저으며 씁쓸히 웃고 있었다.
잠시 후, 은호는 막아서던 손을 천천히 거뒀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곁에는 은지도 함께였다.
은호와 은지는 책을 쥔 손의 주인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자신들의 손을 잡거나 다시 책을 확인하거나, 두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해 달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책을 받아 든 손의 주인은 책과 은호와 은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곧, 그는 책을 놓고 두 사람의 손을 택했다.
그래
나는 지금 여기 있어
멈췄던 노래가 다시 이어지며 마무리로 향했다.
왼쪽에는 은호, 오른쪽에는 은지의 손을 잡은 레이스를 쓴 여인이 밝게 웃으며 두 사람과 함께 같은 길을 걸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책은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바람에 풍화되듯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책의 흔적만 남은 먼지 더미 위로 구두가 발자국을 찍었다.
구두가 지나간 자리에는 ‘TIME’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곧 나올 앨범의 이름이자, 많은 의미를 담은 시간이라는 단어였다.
그때였다.
이 모든 게 이야기 속 하나였다는 듯 중간쯤 펼쳐진 거대한 책이 나타났다.
거기엔 멀어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이 사진처럼 담겨 있었다.
뒤 내용을 더 읽지 않을 거라는 듯이 책은 냉정히 덮였다.
거대한 책은 ‘The old days’와 똑같은 붉은 색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새겨진 제목이 달랐다.
[Our story]
그렇게 두 곡을 한 뮤직비디오에 담은 덕분에 약 6분에 다다르는 긴 러닝타임이 드디어 끝이 났다.
[마지막에 나온 Our story가 무슨 뜻인지 아시는 분.]
[우리 이야기라는 의미인 거 같은데]
[헐… 우리]
[책에서 살짝 울컥함…]
[ㄹㅇㅠ 책 주는 장면…]
[맞아 ㅠㅠㅠㅠ]
[그 눈 레이스로 가린 여자가 우리고 우리랑 같이 가고 있다. 이건가?]
[헐?]
[헐 이건가 보다]
[허류ㅠㅠㅠㅠㅠ]
은호가 숨겨 둔 메시지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긴 했다.
은호는 과거 이야기가 담긴 책을 E%로 추정되는 레이스 여인에게 건넸다.
알고 싶으면 언제든 직접 보라는 듯이.
레이스 여인이 당장 과거를 열어 보려고 하던 그때.
은호는 그녀의 행동을 약하게 막아서며 제안했다.
그렇게 재미없게 알기보다 우리를 따라오라고, 그럼 알게 된다고.
그때, 은지도 함께 손을 내밀었다.
은호의 뜻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여인은 책을 놓고 대신 은호와 은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과 함께 같은 길을 걸었다.
E%들에게 은호와 은지가 바라는 답이었다.
두 사람의 깊은 과거의 이야기가 담긴 책은 부스러졌다.
다만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저 시간이라는 힘에 깎이고 깎여 압축됐다.
그때의 괴롭던 기분만 떠올리며 살기엔 이미 다른 많은 시간과 경험을 했으니까.
그리고 우리 이야기라는 책이 덮였다.
책은 기록이다.
이은호, 이은지라는 이름으로도 책이 한 권 있었듯.
E-UNG라는 팀명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앞으로 E%와 함께하는 모든 일은 지나온 과거만큼이나 뜻깊게 기록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E-FAN의 반응은 여러모로 뜨거웠다.
나름의 해석을 해 내고 은호가 숨겨 둔 메시지에 감동하는 E%.
더 많은 메시지를 캐기 위해 재차 재생하며 놓쳤던 디테일을 살펴보는 E%.
물론 이렇게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듯, 일단 격하게 좋아하는 E%.도 있었다.
[랑이 상탈(상의 탈의)!!!]
[분위기 찢었다아아아!!!]
[저음 너무 좋아아악!!!]
[왜 다 소리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따라 지른다!!!]
그 외에도 아쉽게도 내용 자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눈과 귀는 즐거웠다는 E%들까지.
[내가 무슨 내용을 본 건지는 모르겠는데 눈은 행복했던 것 같다]
[영상미 쩐다]
[지지 언니ㅠㅠㅠㅠ 옷 정장 바지에 힐 내가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고 ㅠㅠ]
그사이 ‘이응(E-UNG) 이 길 위, 해가 뮤직비디오 안 본 사람 없지? 없으면 빨리 봐.’라는 등 바깥으로 홍보를 뛰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주연이었다.
뮤직비디오 시청을 끝마친 즉시, 주연은 일단 주변에 홍보 메시지를 돌렸다.
다시 뮤직비디오를 재생한 뒤 일일이 오는 연락에 모두 답을 했고, 이응의 신곡에 호기심을 느끼는 지인들에게는 링크를 보내 주며 시청을 독려했다.
이후에는 스트리밍 리스트를 새로 짜기 위해 ‘이 길 위’와 ‘해가’의 노래 길이를 정확히 했으며.
이어서 1시간 동안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돌릴 수 있도록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의 머리를 굴려 스트리밍 리스트를 눌러 담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자유곡 자리가 아까워.’
이응의 활동 기간에 비해 낸 곡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리스트에 이응의 곡으로만 눌러 담기엔 빈자리가 상당히 많이 남아돌았다.
주연은 아쉬운 마음을 애써 삼키며 빈자리에 옛사랑이 되어 버린 지예찬의 곡들로 채웠다.
그렇게 공식으로 올라오기 전까지 돌릴 개인적인 스트리밍 리스트를 완성했다.
‘오빠들 미안. 회사 바꾸면 많이 들을게…….’
빈자리에 과거 미친 듯이 사랑했던 톡신의 곡을 넣을 수도 있었지만, ‘TaKa’가 걸렸다.
TaKa 엔터테인먼트가 이응에게 했던 꼬락서니를 생각하면 차마 손이 가질 않았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이응의 뮤직비디오는 계속 재생되는 중이었다.
이런 모든 할 일을 끝마친 뒤에서야 주연은 침대 위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첫 감상에서 놓쳤던 디테일을 찾으며 마음 편히 뮤직비디오를 시청했다.
* * *
대학교
“방송은 뭐, 알다시피 우리가 미운털이 좀 박혔잖니.”
TaKa 엔터테인먼트를 자극한 후, ‘이 길 위’와 ‘해가’로 신곡을 냈음에도 좀처럼 출연 기회를 못 얻고 있던 그때였다.
“대신.”
“대신?”
“행사가 잡혔다.”
“행사요?”
“그래. 대학교 행사.”
“오!”
“와아!”
단순히 놀라는 은호 옆에서 은지가 양팔을 번쩍 들며 환호를 내질렀다.
은지의 리액션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기쁘긴 했다.
기뻐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오랜만의 무대라서, 또 하나는 대학교를 처음 가 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가 본 적은 있지만, 그 무대 위에 서 본 적은 없었다.
회귀 전엔 이은지 무대를 구경하러 간 적이 고작이었다.
당시 이은지는 3일간 이어지는 축제에서 가장 마지막 날 엔딩을 장식했다.
‘운동장을 넘어 학교 건너편의 건물에서도 이은지를 보겠다고…….’
창문에 다닥다닥 붙은 모습을 보며 뿌듯한 동시에 속이 조금, 많이 쓰렸던 날인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직접 설 기회니까, 그래서 조금 더 기뻤다.
“거기 말고도 여러 곳 돌 거니까 컨디션 관리 단단히 하고.”
“네.”
“네!”
“홍보도 중요하지만, 잘하고 오는 게 더 중요하니까. 알지?”
“네.”
“당연하죠.”
“그래. 너희야 항상 잘하니까. 무대에서 제발 싸우지만 말아라.”
“……네.”
“……네.”
왠지 찝찝한 늦은 대답에 잠시 박 대표의 미간이 구겨졌다.
“싸우지 마.”
“이은지가 이상한 소리 안 하면요.”
“내가 언제 이상한 소리를 했다고 그래.”
“이응에서 미모를 맡고 있니, 뭐니, 헛소리하잖아.”
“헛소리 아니거든. 맞잖아. 미모! 까고 봐서 니 얼굴보다 내 얼굴이 낫지.”
“X랄 하고 자빠졌네.”
은지가 당당히 소리치자, 은호는 길가의 개똥을 바라보듯 은지를 빤히 보며 말했다.
‘또 시작…….’
‘저러다 큰일 날 거 같은데…….’
한 걸음 뒤에서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던 현우와 슬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뻔히 예상되는 듯 해탈한 보살 미소를 띠며 때를 기다렸다.
“별 우럭 대가리 같은 새끼가 비웃고 X랄이야.”
“응. 호박 대가리 같은 게. 야, 까놓고 말해서 핼러윈 호박이 니 얼굴보다 훨 나아.”
“어따 대고 비교질이야, 해산물 주제에.”
“와, 지가 먼저 비교했으면서 내로남불 쩌네.”
“니가 먼저 시비 털었잖아!”
“시비가 아니라 사실이잖아.”
“닥쳐!”
“싫은데? 내가 왜?”
점점 싸움이 고조되어 시끄러워지는 와중에 박 대표는 머리가 아찔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박 대표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싸움에 온 신경이 집중된 탓인지 오늘따라 은호도 박 대표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음, 위험 단계인데…….’
현우가 상황을 보다 슬쩍 몸을 기울이며 슬기에게 속삭였다.
“슬기 씨, 나가 있죠.”
“네? 왜요?”
“대표님, 곧 터지실 거라서, 불똥 튑니다.”
슬기는 이미 의상 회의 때 박 대표의 잔소리를 몇 차례 겪어 본 적 있었다.
‘지지 님, 미안해요.’
그 때문인지 슬기는 빠른 상황 판단 후, 일말의 고민 없이 대표실을 나갔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때마침 박 대표는 속으로 정확히 10초를 세고 있었으니까.
“연탄이 껴안고 잘 거면 털이라도 똑바로 치우던가. 니가 방문 열 때마다 다 청소해 놓은 거실에 털 폭탄 터진다고!”
“연탄이 털 빠지는 건 당연한 거고! 그리고 니가 키우자고 했잖아!”
“내가 키우자고 한 이유는 말했잖아! 걔 평범한 고양이 아니라고!”
“그 개소리를 아직도 하냐! 그걸 누가 믿어! 그리고 어쨌든 키우자고 한 니가 할 일이잖아!”
“넌 딴 건 믿어 놓고 왜 그건 못 믿는데! 야, 그리고 내가 안 했냐? 했잖아! 내가 니 방 청소까지 해야 하냐? 적어도 니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이랑 속옷이나 똑바로 걸어 놓고 말하든가!”
“변태냐? 그걸 왜 봐!”
“지가 늘어놔 놓고 내 탓이라고? X랄 하고 있네! 거기에 털 다 엉켜 있으니까 털이 뭔 폭탄처럼 펑펑 터지는 거잖아!”
3.
2.
정확히 10초를 세고 박 대표가 폭발하려던 그때였다.
“넙.”
“멉…….”
1.
귀신같이 은호와 은지는 1초 전에 입을 닫았다.
덕분에 박 대표는 둘을 황당하다는 듯 번갈아 보며 물었다.
“왜, 더 싸우지?”
“아닙니다. 이야기 다 했어요.”
“마,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