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38)
아무것도 없는 검은 화면 속 빛바랜 종이들이 휘날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와 기타 연주가 흐르자, 그동안 엉망진창 늘어져 있던 종이들이 마법이라도 부리듯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깔끔하게 포개어진 종이 더미 위로 붉은 천이 뒤덮였다.
붉은 천이 종이를 형태에 맞춰 감쌌다.
종이 더미는 어느새 붉은 양장본 한 권이 되었다.
그때 반짝이는 가루들이 날아와, 붉은 천 위로 금박의 글씨를 새겼다.
‘The old days’
글씨가 모두 새겨졌을 때, 아주 잠시 연주가 멈췄다.
[소름 돋아]
[와]
[어]
생방송으로 함께 보고 있던 이퍼들은 ‘옛날’ 또는 ‘예전’을 뜻하는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히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은호와 은지가 E-FAN에서의 모든 싸움을 직접 봤고, 본인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직접 해 주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연주가 잠시 멈춘 것도 그러니 싸우지 말아 달라는 의미를 담은 것 같기도 했다.
연주는 은호로 추정되는 창백한 한 남성의 손에 의해 책이 펼쳐지는 순간 다시 이어졌다.
펼쳐진 책장에선 한 고양이 그림이 벌떡 일어섰다.
입체 북이었다.
호박 모양의 작은 가방을 메고, 검은 얼룩을 가진 고양이였다.
반면, 귀여운 외형과 달리 샛노란 눈동자에 사나운 눈매가 왠지 은지를 닮은 캐릭터 같기도 했다.
남자의 손은 이어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이번엔 턱시도를 입은 듯한 무늬의 또 다른 고양이가 벌떡 일어섰다.
두 번째 고양이의 머리에는 웬 생선 대가리 모양의 회색 가면이 쓰여 있었다.
남자의 손이 고양이의 종이 가면을 벗기자, 안에는 눈가에 중심을 가른 커튼을 친 듯 눈가가 덮인 검은 얼룩이 눈에 띄는 고양이의 얼굴이 나왔다.
조금 전에 나왔던 호박 가방을 들고 있던 주황 얼룩무늬 고양이와 똑 닮은 듯했지만, 조금 쳐진 눈매의 고양이였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밤하늘을 그려 둔 풍경이 부채처럼 펼쳐지고, 앞에는 호박 가방 고양이가 그 하늘을 보고 있었다.
화면은 부채꼴로 펼쳐진 밤하늘을 향해 가까워졌다.
그림이었던 밤하늘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꼭 실제처럼 바뀌었다.
진짜 밤하늘처럼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화면이 바뀌고, 입체 북 속 호박 가방 고양이가 3D로 나타났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할 것 같은 질감으로 표현된 애니메이션이었다.
어둑해진 밤
이 길 위로 빛이 고요함이
가라앉아 눈을 감기고
귀를 사로잡는 깊은 울림을 가진 은지의 목소리로 노래가 시작된 순간.
호박 가방 고양이가 입을 움직여 노래를 부르더니 고개를 돌렸다.
화면은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엔 가로등의 노란 불빛 아래.
상자로 만들어진 침대와 신문지 이불을 덮은 작아진 호박 가방을 든 고양이가 있었다.
곁에는 그보다 조금 더 큰 생선 가면을 쓴 검은 고양이도 함께였다.
검은 고양이는 작은 검은 얼룩 고양이를 토닥여 주며 노래를 불렀다.
잘 자렴
어미가 자식에게 아비가 자식에게 하는 인사가 이럴까
상상만 해 봤던 인사를 너한테
이 길 위 끝이 부디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길
어린 얼룩 고양이는 꿈을 꾸며 인상을 구겼다.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그려진 커다란 물고기 인간 손이 얼룩 고양이의 목덜미를 쥐어 들었다.
큰 검은 고양이가 그 존재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악몽이었다.
내 꿈 같은 하루가 매일 언제 깨어질까
차츰 나아지리라고 믿고 싶었는데
귀여운 애니메이션과 배경에 흐르는 은호의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한편 작은 얼룩 고양이의 꿈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졌다.
검은 고양이가 어딘가에 갇혀 있던 주황 고양이를 구한 뒤 이야기였다.
둘은 작은 상자 속에 숨어 그 물고기 인간들을 피했다.
그리고 둘은 조금 더 자라, 이젠 네 발에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고양이가 되었다.
어느새 3D 애니메이션으로 바뀐 화면 속에서 검은 고양이는 작은 얼룩 고양이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믿으면 믿을수록 불안은 내 맘을 좀 먹고
몸집을 키워 내 맘을 좀 먹고
검은 고양이는 노래에 맞춰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때였다.
그런 검은 고양이에게 작은 주황 고양이가 직접 만든 듯, 조잡한 물고기 인간과 똑 닮은 얼굴의 가면을 선물했다.
검은 고양이는 선물 받은 물고기 가면을 쓰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화면이 바뀌었다.
검은 고양이는 다정하게 깊이 잠든 얼룩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굿 나잇
소심하게 열어 뱉은 인사
나는 항상 두려운데 너는 항상 해맑아
쫑긋 세워진 귓가에 걸어 뒀던 가면을 끌어 내리며 검은 고양이는 얼굴에 가면을 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 밖으로 발을 뻗었다.
어둠으로 들어가기 전.
검은 고양이는 뒤를 돌아보며 아직 깊이 잠든 주황 고양이를 바라봤다.
내 아픔이 너와는 다르길 바랐는데 어째서 너까지 아파졌을까.
그럼에도 너는 항상 해맑아
다행이라 쓸어내리다가도 한편은 아프기만
어둠 속으로 들어선 검은 고양이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밝은 밤 이 길 위 어두워진 건 내 길뿐
너만은 밝은 길을 걸어
돌부리조차 보지 않기를 못난 내가 바라고 또 바라본다만
너는 이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다급한 검은 고양이의 표정과 다르게 흘러나오는 은호의 목소리는 어쩐지 씁쓸함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다음 가로등에 다다를 때쯤, 책 페이지가 갑자기 넘어갔다.
너무 빠르게 넘어가는 탓에 이후로는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하고 책은 곧 맨 뒤 붉은 책 커버를 다시 드러냈다.
이어서 붉은 책은 작은 붉은 색 큐빅이 박힌 새하얀 긴 손톱의 손에 쥐어져, 검은 탁자 위에 놓였다.
상자 침대가 아닌, 평범한 침대에 막 잠에서 깨어난 실제 은지의 손이었다.
이 길 위 바라본다
내가 생각하는 그 끝이 아니길
내 꿈 같은 하루가 매일 언제 깨어질까
매일 나아간다 믿고 믿어 보자
목소리가 음울하게 젖어 있던 은호와는 다르게, 은지는 조금 더 밝게 노래를 이어 갔다.
이어서 은호의 노래가 은지의 배턴을 이어받았다.
믿으면 믿을수록
불안은 내 맘을 좀 먹고
(불안은 네 맘을 좀 먹고)
몸집을 키워 내 맘을 좀 먹고
(몸집을 키워 네 맘을 좀 먹고)
은호의 노래 뒤로, 은지의 코러스가 뒤따랐다.
나는 걷고 또 걸어
(너는 걷고 또 걸어)
날 믿는 너를 믿고서
(널 믿는 나를 믿고서)
은지가 고개를 돌려 멀리 연결된 복도 끝 새하얀 문을 바라봤다.
침대에서 내려온 은지는 커튼 같은 큰 잠옷 원피스를 질질 끌며 어디로 연결될지 모르는 그 문을 향해 걸었다.
이 길 위
우리만 아는 그 시간조차 쫓아오지 못하게
멀리 더 멀리
은지의 낮은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화면 속 은지는 뒤에서 낯선 인기척을 느낀 듯 조금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은지가 반갑게 여기는 누군가가 있었는지, 그를 보고 웃더니 이내 함께 빛 너머의 문으로 사라졌다.
잘 자
오늘 밤도 너의 길 위 밝은 별이 뜨길
은호의 목소리를 끝으로 화면은 하얗게 변했다.
[끝인가?]
[?]
[멈춘 건가?]
[뭐지?]
[????]
노래는 끝났다.
하지만 영상은 어쩐 일인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함께 영상을 시청하던 이퍼들을 일제히 당황해서 물음표를 채팅에 띄웠다.
잠시 후, 그때였다.
하얀 풍경에 그림자가 내려앉듯 회색으로 바뀌었다.
저벅저벅 걷는 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등장했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과 왠지 피곤함이 가득 묻어나 보이는 짙은 메이크업.
정장 재킷만 걸친 은호가 조금 삐딱한 걸음으로 문틀을 넘었다.
회색이 된 풍경은 어느새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새벽의 차가운 하늘색으로 바뀌었다.
새소리를 왜곡시켜서 만들어 낸 인트로가 흐르고, 곡이 바뀌었다.
<해가>였다.
빈티지한 어쿠스틱 피아노 연주를 따라 은호의 발걸음은 느리게 박자를 타며 천천히 한 소파에 등을 기댔다.
흐트러진 자세 탓에 재킷 사이로 맨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서 은호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너에게 항상 말했어
우리에게도 아침이 올 거라 믿자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있어
은호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갑자기 채팅창에 속도가 붙었다.
[헐]
[♥♥]
[랑이 목소리야?]
[뭐야? 이거 랑이 목소리 맞아?]
은호는 평소 노래를 부를 때 일부러 새 톤을 만들어 높은 음색으로 노래하곤 했다.
더 편안하게 고음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네가 떠나기 전 거기에 멈춰서
나는 이 그림자에 해가 떠오르길 빌어
가라앉아 푸르러진 너의 하늘에도 해가 들기를
하지만 이번만큼은 말하는 목소리에 가까운 낮은 음색으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발성이 익숙지는 않은 듯, 살짝 목을 긁는 소리가 따라 나오기도 했다.
은호는 당시에는 불만이 있었지만, 은지는 이 부분을 살렸다.
편집은 은지의 영역인지라 은호도 길게 고집을 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우리 떨어지지 말자
쉽게 올리기엔 이 무게를 알기에 바라지 않아
같이할 게 더 오래
후회라는 것을 배우기엔 시간이 모자라
보일 게 더 많아
내가 가졌던 시간에 배워 온 것들이 많으니
그사이 화면은 눈과 코를 레이스 베일로 가린 붉은 입술의 여인과 은호가 마주 보고 있었다.
은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가볍게 왈츠를 췄다.
바이올린 연주와 잘 어울리는 안무였지만, 그것도 잠시.
은호가 손을 놓자, 여인은 아쉬움 없이 화면 밖으로 떠나갔다.
주연은 영상을 보다 양쪽 코에 휴지를 꽂았다.
휴지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미친다, 미쳐!’
영상 속 은호의 관능적인 분위기와 낯선 은호의 낮은 목소리가 합쳐지자 여러모로 위험한 매력이 치사량 수준까지 올라 버린 탓이었다.
있잖아
우리는 매일 말했어
우리에게도 아침이 올 거라 믿었어
그래서 우린 지금 여기 있어
은호는 흐트러진 꽃다발을 들고 기대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화면이 바뀌고.
은지가 흐트러진 꽃다발을 어깨에 기댄 채 들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네가 다가왔던 거기에 멈춰서
너는 그림자가 작아질 머리 위 해를 기다리고 있어
가라앉아 푸르렀던 우리 새벽에도 해가 들었어
화면이 깜빡이고 다시 소파에 널브러진 은호를 비췄다.
은호는 소파에서 일어나 한 손을 대충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걸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단 신비롭던 이야기를 믿기까지 셋
평온했던 이 일상을 찾아 너와 나 끝을 잇기까지 둘
네가 가진 시작을 위한 마지막 하나
셋에 맞춰 은호의 발끝이 굴러다니던 병을 무심하게 치워 냈다.
둘에 맞춰 은호는 테이블 위 널브러진 감자 칩들을 간단히 걷어 냈다.
하나에 맞춰 은호는 처음 들어왔던 그 문손잡이를 돌리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젠 떨어지지 말자
그때였다.
노래가 멈추며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 속에는 평범한 정장 차림의 은호가 있었다.
은호의 손에는 ‘The old days’라고 쓰인 붉은 양장본 책이 들려 있었다.
은호는 책을 손에 쥔 채 시계를 확인했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진 듯, 은호가 비추고 있던 화면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 화면 쪽으로 다가온 은호는 순순히 그에게 가지고 있던 붉은 책을 내밀었다.
낯선 손이 붉은 책을 받아 들자, 멈췄던 노래가 다시 이어졌다.
쉽게 올리기엔 이 무게를 알기에 말하지 않아
함께할 게 더 오래
후회라는 것을 배웠기에 시간이 모자라
아낄 게 더 많이
다시 시작한 시간에 함께할 것들이 많으니
화면이 바뀌고, 밝은 조명 아래 은호와 은지를 비췄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로를 마주 볼 듯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서로 다른 방향을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