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121화 (121/309)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21)

“판타지답게 동화 같은 분위기로 가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동화? 오…… 동화 괜찮다!”

밤새라기에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결론이 났다.

오래 고민하는 건 취향이 아닌 은지의 빠른 성격이 큰 도움이 됐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은지와 함께 조금 긴장하며 새 사옥 건물로 들어섰다.

평소에는 뻔질나게 드나들던 회사였지만, 제안을 위해 구체적인 스토리 콘티를 챙겨 온 탓일까.

조금 긴장하며 도착한 대표님의 사무실.

“어, 잠시만, 이것만 처리하고.”

“네. 천천히 하셔도 돼요.”

“하하. 거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네.”

대표님은 급한 일 처리를 하던 중인 듯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며 주변을 돌아보자, 예전에 비해 넓어진 대표실의 구조는 의외로 전과 큰 차이는 없었다.

소파가 있던 자리에 이젠 회의용인지 넓은 테이블과 가벼운 의자 10개와 예비용인 듯 구석에는 접이식 의자 몇 개가 더 있었다.

회색의 벽지.

책장에는 빽빽하게 꽂혀 있는 자료들.

선반에는 대표님이 톡신 선배님들과 다른 많은 선배를 키워 내며 받았던 상들이 나란히 자리했다.

예전엔 좁아서 다 꺼내 둔 게 아니었던 걸까.

새 사무실에 장식된 상들은 전에 비해 적어도 세 배는 더 많이 나와 있는 듯했다.

상장들과 트로피들을 한창 구경하고 있을 때 하던 작업이 끝난 듯 대표님이 물었다.

“그래, 뭘 보여 주고 싶다고?”

다른 이야기는 미리 전화로 나누고 온 터라 많은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이거요.”

난 대표님에게 미리 보여 드리겠다던 제안서를 내밀었다.

도톰한 제안서의 부피 때문인지 대표님은 잠시 놀란 눈으로 제안서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서 이내 차분하게 제안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렇게 하려는 이유가 따로 있나?”

“최근 분열된 E%의 문제점이 저희의 과거 이야기가 대두되면서인 것 같아서, 그걸 ‘이 길 위’ 노래로 풀어 가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나쁘진 않구나. 컷들은 그림만 보면 애니메이션인 것 같은데, 3D, 2D?”

대표님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콘티로 그린 어설픈 내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기왕이면 이번 ‘Wise’ 뮤직비디오처럼 적절하게 섞거나, 그, 이걸 뭐라고 하죠? 책은 책인데 튀어나오는 느낌인…….”

“입체 북?”

“오, 네. 맞아요. 그건 거 같아요. 그런 느낌으로 가도 좋을 것 같은데.”

“오호, 그것도 괜찮겠구나.”

제안이 마음에 드는 듯, 대표님은 이후로도 콘티를 꼼꼼히 읽으며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오션에 먼저 연락을 해 봐야 일정이 나오기는 할 테지만…….”

듀오의 뮤직비디오를 맡았던 다크오션의 고태서 감독님.

그분이라면 확실히 내 상상 그 이상의 퀄리티가 나올 것 같아서 본능적으로 기대감에 기분이 들떴다.

“‘Wise’로 활동하는 동안 제작에 들어가고 활동 마무리쯤에 맞춰 진행해 보면 되겠구나.”

대표님은 우리 일정표를 교차로 점검해 가며 말했다.

“‘Wise’가 끝나면 바로 ‘이 길 위’로 활동을 바로 이어 갈 수도 있는 건가요?”

이은지와 난 들뜬 기분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톡톡.

대표님의 검지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은지는 와중에 머릿속으로 무슨 리듬을 떠올리는지 그 박자에 맞춰 머리를 갸웃거리며 흔들고 있었다.

대표님은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분이셨다.

계속 일하려는 우리가 여러모로 걱정스러웠던 건지 대표님은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제안대로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가면 너희도 일정이 그렇게까지 빡빡하진 않을 거고, 괜찮겠지.”

대표님은 잠시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해 보자. 은호가 이제야 네 이야기를 할 마음이 생겼다는데 밀어줘야지.”

“네?”

대표님은 별다른 설명은커녕 조용히 미소만 짓고 계셨다.

와중에 이은지는 의미를 이해한 건지 대표님을 따라 활짝 웃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난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 * *

콘티 단계에서 더 세세한 디테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대표님은 수화기를 들어 내선 번호를 연결했다.

“보영 씨, 지금 하는 일 마무리하면 기훈 씨랑 같이 내 사무실로 와요.”

대표님은 전화를 끊고 나서 곧 들어온 두 직원분에게 어디로 연락해야 하며, 언제 미팅 날짜를 잡을지 등 방금 내가 했던 이야기를 더 세세하게 전달했다.

직원이 생겼기 때문일까.

‘이맘때쯤부터 절반이 드러난 것 같은데…….’

대표님은 아직 회귀 전보다는 M자 이마의 면적이 좁았다.

“왜?”

“네? 아.”

빤히 대표님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대표님도 시선을 느낀 듯 물었다.

“그냥요.”

“희한하긴.”

대표님, 나중에 대표님 머리 절반이 벗겨지거든요.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기엔 왠지 놀리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말을 못 하겠다.

……라고 생각한 그때였다.

“대표님.”

“응?”

“머리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것 같은데, 탈모 오는 순간 훅 가니까 검은콩이나 다시마 같은 거 많이 드세요.”

은지가 말했다.

‘아이고.’

은지의 예상치 못한 직구에 난 이마를 짚으며 녹은 치즈처럼 흘러내렸다.

내 반응에 은지는 ‘왜?’라는 얼굴로 주저앉은 내 쪽을 돌아봤다.

보영 씨와 기훈 씨였던가.

얼떨결에 두 사람은 웃음 참기 챌린지라도 하듯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술을 악물며 견디고 있었다.

대표님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얼른 너희는 집에 가 있기나 해!”

“헤헤. 네.”

와중에 은지는 해맑게 대답하며 대표님의 속을 한바탕 더 뒤집었다.

“얼른 가서 잠이나 더 자고 나와. 어제도 보아하니 밤새고 또 작업한 거 같은데 라디오 가서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으면 너희는―!”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탈모’ 버튼을 눌렀기 때문인가.

잔소리 모드가 갑자기 켜진 듯 대표님은 쉬지 않고 웬만한 래퍼들에게도 뒤지지 않을 법한 속도로 잔소리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보영 씨와 기훈 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우리와 함께 잔소리를 듣는 처지가 됐으니까.

약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은호.’

‘응.’

‘그거 써 볼까.’

‘뭐?’

‘선배님이 말해 준 방법.’

‘……여기서?’

그때 은지가 조용히 좋은 제안을 내밀었다.

서승연 선배가 알려 준 대표님의 잔소리를 피하는 꿀팁.

「“대신 일주일 안으로 두 번 이상은 절대 안 돼.”」

주의 사항만 잘 지킬 수 있다면 해 볼 만한 방법이긴 했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말하는 거다.’

‘OK.'

'하나.’

‘둘.’

셋을 입 모양으로 맞춘 그 순간.

“와! 대표님!”

“맞아. 우리 대표님 최고!”

이은지랑 난 동시에 복부의 힘을 끌어모아 소리쳤다.

“그― 엉?”

선배의 말대로 대표님은 잠시 당황하면서 줄지어 이어지던 잔소리가 뚝 멎었다.

“저희는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집으로 가 보겠습니다!”

“자, 잠깐.”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이은지랑 난 다급하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무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어정쩡하게 은호와 은지를 보내고 난 뒤, 셋이 남은 사무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잠시 맴돌았다.

박 대표는 왠지 겪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데자뷔에 황당한 눈길로 은호와 은지가 뛰쳐나간 문 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서승연 이놈―!’

범인을 떠올린 듯, 박 대표는 목덜미를 붙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잠시만요.”

그때, 화보를 촬영 중이던 서승연은 손을 들어 촬영을 멈췄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으. 아뇨. 그건 아니고, 갑자기 귀가 엄청 간지러워서.”

“하하. 누가 너 욕하고 있는 거 아니야?”

서승연이 근질거리는 귀를 후비고 있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오현이 웃으며 물었다.

“아니거든, 내가 욕먹을 일이 어딨다고―.”

코디가 급하게 면봉을 가져다주자, 서승연은 귓속 정리를 마친 후 그제야 살 것 같은지 발끈하며 답했다.

* * *

라디오

―도시의 메아리 2부, 오늘 우리 도시의 메아리에 특별한 게스트가 찾아올 텐데, 힌트!

―‘아, 이런. 현실이 닥쳐와’ 이 노래 아시는 분 계실까요?

―깔깔, 역시! 벌써 눈치채신 분들도 많으시네요. 사실 제가 이분들 엄청 팬이거든요.

―오늘 오신 것만 해도 아우, 눈이 환해진 기분인데, 엄청 예쁜 케이크까지 선물로 챙겨 오셨어요. 덕분에 지금 제 앞에 디저트 뷔페가. 깔깔깔.

―이번에 신곡 ‘Wise’로 돌아온 오늘 우리 도시의 메아리 2부! E-UNG(이-유엔쥐)! 특별한 남매 아이돌, 이응과 함께합니다.

―이응에게 궁금한 점, 봐 줬으면 하는 이야기 어떤 것이든 좋아요. 좋아요! 얼른 보내 주세요.

―#XXXX, 짧은 문자 50원, 긴 문자는 100원! 다들 아시죠?

―그럼 잠시 후에! 사랑스러운 남매 이응과 2부에서 뵙도록 할게요. 도시에 메아리가 울립니다.

돼지 막창 전문점 ‘대구 꿀꿀네’, 한입에 별이 보인다 ‘스타 피자’, 서울에선? ‘현실 아울렛’, 깃털 같은 포근함 ‘주모스 침대’, 최고의 자동차 ‘기대 자동차’.

* * *

갑자기 낮아진 저녁 날씨가 은호에게는 조금 쌀쌀했는지, 은호는 시원한 재질의 검은 슬랙스와 반팔 흰 셔츠 위로 베이지색의 카디건을 걸쳤다.

반면, 은지는 원피스에 가까울 정도로 엉덩이를 덮는 펑퍼짐한 검은 티셔츠.

빈티지한 느낌의 짧은 청반바지뿐인 편안한 차림.

목에는 제복 의상을 입었을 때 슬기가 걸어 준 문스톤 목걸이가 여전히 걸려 있었다.

정말 단순하고 흔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에게는 눈길을 사로잡는 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그럼 잠시 후에! 사랑스러운 남매 이응과 2부에서 뵙도록 할게요. 도시에 메아리가 울립니다.

진행자가 광고를 읽는 동안, 창 너머를 돌아보자 오프라인을 자주 찾아 주던 익숙한 팬들의 얼굴들이 보였다.

‘이은호! 이은지!’

‘어떡해! 이쪽 봤어!

‘꺄아아악!’

은호가 창문 너머를 향해 손을 흔들자, 두꺼운 창문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팬들의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뭐 해?’

은호가 창밖을 보고 웃자, 은지도 입 모양으로 물으며 뒤늦게 창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이내 E%를 알아보고 눈이 휘어질 정도로 환하게 활짝 웃어 보였다.

은지의 진심 어린 반가운 미소에 바깥 팬들의 외침이 더 격해진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 광고 노래와 동시에 은호와 은지는 다시 진행자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응의 이은호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응의 이은지입니다!”

광고가 나가는 중인지라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깔깔, 아우, 어떡해. 인사는 이따 광고 끝나면 하고, 얼른얼른 앉아요.”

도시의 메아리 라디오의 진행자는 반쯤 일어난 자세로 손까지 뻗어 건너 자리를 가리켰다.

“케이크 정말 고마워! 엄청 맛있어요!”

“대표님께서 알아서 선물을 챙겨 가라 하셔서 제 나름 맛있어 보이는 걸로 열심히 골라 봤는데…….”

“어머, 진짜요? 은호 씨가 직접 골랐어요?”

“네. 하하.”

은호가 웃자, 진행자는 깔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세상에, 나 이거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나 싶었는데! 깔깔깔. 세상에 PD님, 나 이응이가 준 케이크 상자째로 챙겨 갈 거니까 아무도 손대지 마?”

PD님은 못 말린다는 듯 손으로 OK를 만들며 진행자인 그녀를 따라 웃었다.

‘도시의 메아리’.

중독적인 정직한 ‘깔깔’ 웃음소리로 10년 전부터 명성을 얻어, 현재까지 이 ‘도시의 메아리’ 진행자를 맡은 27년 차 올해 마흔 중반을 넘긴 탤런트 ‘손성희’가 진행하는 라디오였다.

‘취향이 안 바뀌셔서 다행이다.’

이 도시의 메아리는 회귀 전 우연히 이은지와 함께 출연할 기회를 얻어, ‘Some’을 불렀던 그 라디오이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