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19)
이은지는 콘서트 이후, 가창력과 제대로 즐기는 무대 영상으로 또 한 번 큰 주목을 받았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이런 애한테 묶여 있는데…….’
허탈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계약을 엎을 수는 없다.
내가 벌인 일이니까.
은지가 잘되면서 대표님은 신사옥으로의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 지금, 내가 이 목줄을 직접 끊으면 이 여자가 어디까지 손을 뻗칠까.
솔직히 무섭다.
에이슬은 이미 찌라시를 손쉽게 묻는 것을 증명하다 못해 직접 보여 줬다.
언론을 이렇게 쉽게 묻고 띄울 수 있을 줄은 나로선 상상조차 못 해 본 일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노예 노릇이나 하는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
‘하하.’
그딴 건 없었다.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꼈다.
결국 지금 내가 꺼내 둘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지금까지 해 왔듯, 나만 희생하면 된다.
내가 낼 최선은 이것뿐이니까.
“야.”
“고민은 다 하셨어?”
“그래, X발.”
에이슬은 피던 담배를 와인 잔 안에 담가 버렸다.
담뱃재에 거무튀튀해진 잔을 에이슬은 마치 와인처럼 휘휘 저으며 웃었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열애설로 가되, 묻어.”
“묻으라고?”
내 제안이 의외였는지 에이슬이 ‘흐음?’거리며 콧소리를 흘렸다.
“내 도움으로 빵! 뜰 수도 있잖아?”
“필요 없어.”
내가 당장 노래를 관둬야 하는 상황이 온다 해도 에이슬 도움으로 바라던 무대에 오르고 싶진 않다.
추할지언정 이건 내 마지막 남은 음악에 대한 자존심이었다.
“뭐, 본인이 그러시다면야.”
에이슬은 입을 비죽이며 잔을 내려 뒀다.
깔끔한 분위기의 방 안이 지긋지긋한 담배 연기로 가득 차 눈앞이 다 흐렸다.
폐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기침을 절실하게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기운도 없었다.
“그런데 오빠.”
“뭐.”
“내가 열애설 인정하면 당연히 오빠도 알려질 텐데?”
에이슬을 바라보는 은호의 눈은 냉정했다.
많은 것을 버린 눈이었다.
“기자들한테 파고들지 말라고 해. 너 그 정도 능력은 있잖아.”
“……음, 뭐, 알겠어. 그러지, 뭐. 그럼…….”
에이슬은 더러운 잔을 놓고 턱을 괴며 입꼬리를 늘였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네?”
“……X랄.”
“잘 부탁해?”
부탁은, X랄 하고 있네.
똑똑.
이야기가 끝나고 때마침 요리가 준비된 듯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는데…….
달그락거리며 방 안에 들어온 카트에 실린 실한 스테이크 고기를 보자 ‘X발’ 소리가 절로 나왔다.
카트를 끌고 들어온 직원은 방 안의 담배 연기와 에이슬이 더럽힌 와인 잔을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에이슬은 직원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시한 채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더 물었다.
“어이.”
라이터를 꺼내던 에이슬이 고개를 들어 날 봤다.
“실내에서 금연해야지, ‘어이’야.”
“그따위로 부르지 말라고 분명히―. 뭐, 왜, 왜 일어나.”
에이슬이 정색하던 그때.
난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슬에게 다가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도 하던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니 목줄 한번 손에 쥐기라도 해보자.
당황하며 올려다보고 있는 에이슬 입에서 꽂혀 있던 담배를 뽑아 구겨 버렸다.
“왜, 사귀는 사이에 애칭은 둘 수 있잖아.”
접시를 테이블에 옮겨야 할 직원은 자리에 굳어 버렸고, 에이슬은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얼어 있었다.
“담배 냄새나는 우리 어이는 세상에서 제일 X같으니까 적어도 실내에서는 금연하라고.”
최대한의 가식적인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에이슬은 눈을 끔뻑이다 이내 ‘허’하고 황당한 심정이 가득한 한숨을 터뜨렸다.
은호는 곧 몸을 돌려 자리에 앉았다.
직원이 나간 뒤.
스테이크를 써는 내내 가게 안에서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왔을 때, 난 차라리 집에 갈 걸 후회 중이었다.
‘담배 연기를 먹은 건지 고기를 먹은 건지…….’
분명 고기를 먹었는데 기분이 구리다.
“난 간다.”
“저……!”
은호는 에이슬과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아서 전혀 몰랐다.
추운 날이 아님에도 에이슬은 귀가 얼어 버린 것처럼 붉어진 채 은호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은호는 가게를 나오자마자 아쉬움 하나 없이 빠른 걸음으로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사귀는 사이 맞습니다.”
관계를 입 밖으로 내 가며 인정했을 때였다.
대표님은 거짓말 같다고 생각했는지 이후에도 디테일한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였는지, 어쩌다 만났는지.
언제부터냐는 질문엔 대충 오늘 가서 관계를 정하고 왔다며 둘러댔다.
어쩌다 만났냐는 이야기에는 찌라시 때문에 찾아갔다가 대충 그렇게 됐다며 얼버무렸다.
“너…… 아니다. 아니야.”
대표님은 왠지 할 이야기가 많아 보였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삼켜 버렸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는 눈치껏 알 수 있었다.
오늘 이야기를 하기 전에 거울을 보고 연습을 간단하게 해 봤다.
거짓말이 티가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티가 나는 수준을 넘어서 에이슬을 혐오하고 있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이건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더라.
그래서 그냥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제발 이상한 연애만 하지 말아라.”
대표님은 그렇게만 경고하며 나가 보라고 말했다.
집으로 올라가는 2층 계단 앞.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거기서 뭐 해?”
“올라가는데.”
“몇 분 동안 발 한 짝 올리고 멍― 때리는 게?”
이은지 시비에 그제야 현실감이 몰려오면서 픽 웃음이 샜다.
“넌 어디 나가냐?”
“아, 그게…….”
별생각 없이 물은 건데, 평소에는 잘만 말하던 애가 우물쭈물하니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어디 가는데?”
“그…….”
“그 뭐.”
“예능 하나 고정하게 돼서…… 그거.”
“아아. 고생하셔.”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빨리 계단을 올라와서 이은지를 지나쳤다.
급하게 지나치며 알루미늄 문을 거칠게 열었다.
괜히 신경 쓰여서 닫는 건 다시 나름 살살 닫았지만, 이 문은 어떻게 하든 시끄러운 문이었다.
이은지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은호, 추하다.’
현관이 지저분한 건 알지만 그냥 더 걸을 힘도 없어서 그대로 흘러내렸다.
지 동생한테 질투하기는, X발.
“X신 같은 새끼, 이 X신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를 갈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차라리 에이슬한테 아무 힘도 없어서 계약이든 뭐든 엎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다.
* * *
이틀 후.
대표님이 말을 전했다.
“기사가 다 내려갔더라?”
진짜 능력은 부러울 만치 좋다.
하나라도 해결된 걸 좋아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1일이니 뭐니.
말은 그렇게 했어도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평소대로 심부름하는 하루하루가 이어지겠거니 싶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부탁받은 물건을 주고 나갈 때면 매번 에이슬이 붙잡긴 했다.
다만 난 꼴도 보기 싫어서 재빠르게 튀어나왔다.
덕분에 한 달 정도는 다를 것 없던 날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싱글 첫 방송 날.
대기실에 들어선 순간.
“뭔 짓거리야.”
“뭐긴.”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반갑지 않은 얼굴이 먼저 대기실 안에 있었다.
“같이 밥이나 먹자고 왔지.”
에이슬은 까만 가방을 들고 살살 흔들며 말했다.
“그니까 뭔 짓거리냐고.”
에이슬은 내 말 따위는 안 들린다는 듯 까만 가방을 개봉했다.
까만 가방의 정체는 진짜 도시락 가방이었다.
에이슬은 어울리지 않게 정갈하게 챙겨 온 도시락을 멋대로 테이블에 세팅했다.
이어서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나, 금연한 지 한 달 됐다?”
“어쩌라고.”
“칭찬해 달라는 거잖아.”
내가 잘못 들었나.
의심도 잠시 에이슬은 쐐기를 박듯 다시 한 번 말했다.
“어이라고 불러도 되니까 칭찬해 줘.”
“……진짜 미치기라도 했어? 싫어. X나 싫어. 여기서 나가 미친 X아.”
이상하다.
너무 이상하다.
진심으로 너무 놀라서 팔뚝에도 그렇고 손등까지 닭살이 오소소 올랐다.
“기대 안 하길 잘했네. 아무튼 밥은 진짜 먹으라고 챙겨 온 거니까 무대 올라가기 전에 얼른 먹어.”
에이슬이 뚜껑을 열자 도시락 한 층에 그득하게 담겨 있는 불고기.
마침 배가 고프긴 했던 터라 불고기한테는 솔직해졌다.
고기에 홀린 듯 얌전히 의자에 앉은 그때, 에이슬이 갑자기 옆으로 다가왔다.
“떨어져.”
에이슬은 별말 없이 다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난 에이슬이 확실히 떨어져 앉은 걸 확인한 후에서야 세팅된 도시락을 봤다.
그런데 도시락치고는 뭐랄까.
꼭 식당 음식들을 정갈하게 도시락에 담은 것처럼 음식들이 굉장히 깔끔하다.
“이거 니가 만들었냐.”
“미쳤어?”
“그럼 그렇지.”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다행이다.
“왜? 내가 만든 게 더 좋아?”
“돌았냐?”
에이슬이 만들었다고 하면 뜯은 젓가락도 곧장 내려 두려고 했다.
“맛있는 가게라길래 오빠 생각나서 사 왔어.”
“돌았네. 니가 내 생각을 왜 하냐.”
“할 수도 있지.”
“왜?”
“……사, 사귀는 사이니까.”
에이슬은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무슨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볼 법한 여주인공처럼 수줍게 눈을 맞췄다 피했다가 혼자 난리가 났다.
진심으로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본 건데 이런 걸 볼 줄 알았으면 차라리 묻지 말 걸 그랬다.
너무 놀라서 메두사라도 본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방금까지 돌던 입맛이 에이슬 덕분에 싹 사라졌다.
‘와.’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고기를 앞에 두고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음식이 아까우니까 먹으려고 했지만 쟤가 저러는 걸 본 후로는 그냥 손이 가질 않았다.
“은호야, 밥─.”
“형!”
그때였다.
도진 형이 손에 김밥 두 줄을 들고 대기실에 들이닥쳤다.
마침 보고 싶던 얼굴이라 형을 평소의 열 배 이상 살갑게 맞으며 반겼다.
“어, 그쪽은 누구……?”
한편, 도진 형은 내 뒤편에 있는 에이슬을 보며 멈칫했다.
“아, 얘는.”
“안녕하세요.”
소개를 하려고 입을 연 순간 에이슬이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도진 형한테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은호 오빠 여자친구 에이슬이라고 해요.”
아, 저걸 실제로. 심지어 쟤 입을 통해서 들으니까 정신이 아찔해진다.
와중에 도진 형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형은 손뼉까지 치며 외쳤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 에이슬 씨구나!”
“어머, 저 아세요?”
“알 수밖에요! 와, 실물이 더 아름다우시네요.”
얼씨구, 저거보다야 일하고 있는 우리 집 호박 대가리가 훨씬 인간 같지.
“하핫, 감사합니다. 저도 오빠한테 매니저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참 나, 진짜 헛소리하고 있네. 지가 나한테 욕 말고 들은 이야기가 뭐가 있다고.
에이슬은 오로지 김밥을 사 온 것만 보고 도진 형을 눈치껏 매니저라고 찍은 것 같았다.
그게 정답이긴 해서 왠지 더 속이 쓰리다.
“하하, 예. 저도 에이슬 씨 TV로 많이 뵀습니다.”
“어머.”
어머는 X발, 어머나.
내가 얼어 있는 그동안 에이슬은 TV에서나 볼 법한 가식을 도진 형에게 떨어 대며 대화를 나눴다.
저게 담배를 뻑뻑 피우고 와인 잔에 재를 털어 대던 걔가 맞나 싶다.
“은호 여자친구가 에이슬 씨라니……. 그래서 그렇게 꽁꽁 싸매고 다녔네!”
도진 형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실실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오빠가 절 많이 아끼다 보니까 다른 사람한테 보이기 싫어하더라고요.”
예? 제가요? 언제요?
“하긴, 에이슬 씨면 적이 많기야 하겠네. 은호가 힘들었겠네. 하하.”
전혀 안 힘든데.
오히려 그 ‘적’한테 본인이 직접 담배X 놓고 때려잡을 거 같은 X인데.
그때였다.
“넌 왜 그렇게 얼굴이 썩었어?”
형이 내 표정을 그제야 본 모양.
왜 썩었냐니, 둘의 대화를 듣다 보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으니까.
난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어서 형 손에 있는 김밥만 챙겼다.
“야, 넌 에이슬 씨가 도시락 세팅해 놨는데 그걸 왜─.”
“둘이 먹어. 난 이거면 돼.”
웃으면서 말을 던진 후, 난 도망치듯 대기실을 나와서 화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