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118화 (118/309)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18)

죽을 해 준 날로부터 며칠 뒤, 컨디션이 다시 좋아진 건지 에이슬에게 또 연락이 왔다.

[ㅗ ― 별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이랑 건너편에 있는 빵집에서 알아서 골라 사 와]

내가 돈이 없어서 심부름을 못 한다고 했던 날이었던가.

에이슬은 그날부터 심부름용 카드를 하나를 넘겨 줬다.

커피와 빵 정도는 이젠 익숙할 정도의 잔심부름이었다.

에이슬의 심부름은 냉정하게 보자면 ‘내’ 일이라, 차마 이런 건 도진 형한테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직접 하는데…….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카페에 가기엔 내가 아직 그렇게 방정 떨 유명인이 아니라, 난 대충 후드 모자만 덮어쓴 채 별 카페로 향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알아보고 인사 한 번 건네는 사람 없는 딱 이 정도.

이게 내 현재의 인지도다.

그래도 심부름할 때는 이렇게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아메리카노 두 잔과 건너편 빵 가게에서 인기 있다는 빵을 몇몇 개 골라 담아서 에이슬이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하나는 네 거. 빵도 가져가.”

돌아온 말이었다.

얘는 내가 고마워할 줄 안 건가.

에이슬은 내가 사 온 커피를 홀짝이며 뿌듯한 표정이었다.

‘사람 놀리나.’

솔직히 고마워할 수도 있었지만 난 내 시간이 적어도 이 빵과 커피 한 잔보다는 더 귀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별말 없이 빵 봉투를 챙겨 들고 대기실을 나왔다.

난 고소한 깨찰빵이나 설탕 왕창 묻힌 꽈배기라든가 소시지 빵 같은 게 좋다.

하지만 오늘은 일부러 생크림이니 뭐니, 보기 좋은 거나 딸기가 장식된 것들로 골랐다.

내가 아니라 에이슬이 먹을 거니까.

걔는 뭔가 비싸 보이는 것만 먹는 것 같아서 그렇게 골랐던 건데…….

봉투를 열어서 직접 보자 한숨이 더 크게 터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좋아하는 걸로 담을걸.”

봉투 안에는 내가 먹을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종일 건반만 뚱땅거리고 있겠지.’

봉투를 들고 오늘 쉬고 있는 애한테 먹이나 던져 줄 겸 집으로 향했다.

“뭐야. 왜 벌써 왔어?”

“다시 갈 거야. 야, 이거나 먹어.”

깔끔하게 종이봉투를 받아 든 은지는 바스락거리며 안에 있는 빵들을 확인했다.

“X친, 오빠가 웬일이래? 와, 커피까지.”

“오다 주웠음.”

“대박!”

행복에 겨운 밝은 은지의 목소리.

얇은 후드 티를 입기엔 살짝 으슬으슬한 날씨였다.

집에 들른 겸, 옷이나 갈아입고 다시 녹음하러 가려고 방에 들렀다가 나온 그때였다.

“딸기 소보루다! 와, 생크림 터질라는 거 봐라. 미―쳐―따!”

은지는 그사이 빵 하나를 한 입 베어 물더니 천국에라도 있는 표정이었다.

“믐므그 드 므그드므?”

“어. 다 먹어.”

꿀꺽.

“진짜지?”

도진이 형 말은 알아듣기 힘들지만, 얘는 질문이 뻔히 보인다고 해야 할까.

똑같은 외계어를 해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은지가 재차 묻자, 귀찮아서 대충 손을 저으며 마음대로 하라며 대답을 대신했다.

이후 다시 신발을 신으려고 현관으로 향하려는데.

“하긴 아재 취향인 오빠는 먹을 게 없긴 해?”

“야…… 아재 취향이라니.”

“왜 맞잖아. 이렇게 뭐 막 장식된 거 먹기 힘들다고 싫어하잖아.”

“아재 취향이 아니라 깔끔한 빵을 좋아하는 거라고.”

“피자빵이 깔끔은 개뿔.”

“야, 그냥 다 내놔. 새꺄.”

“으↗으↘응―. 줬다가 다시 뺏기 없죠?”

이은지는 고개를 젓더니 빵 봉지를 끌어안고 제 방 안으로 도망쳤다.

“처먹고 봉지 아무 데나 두지 말고 똑띠 버려라.”

“네―에.”

그날은 괜히 음식물 쓰레기가 될 뻔한 것들을 대신 처리해 줄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나빴던 기분도 다행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며칠 뒤.

[ㅗ ― 꽃다발 하나 사 와]

에이슬에게 심부름 문자가 왔다.

문자를 받은 그때, 왠지 모를 싸함이 느껴졌다.

감이라고 해야 할까.

오늘 하루 뭔가 터질 것 같은 그 기분.

라디오 방송이 끝나고 에이슬 심부름을 위해 꽃집을 찾았다.

하지만 늦은 시간에 열린 꽃집이 있을 리가.

한참을 뒤져 가며 겨우 찾아 꽃을 산 후, 택시를 타고 에이슬의 집으로 향했다.

“늦었네?”

“이 한밤중에 꽃다발을 사 오라는 미친 X이 있어서.”

“미친 X이라니. 가져가. 오빠 선물이야.”

잠깐이지만 머리가 멈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한참을 고민하다 애써 들끓는 화를 억누르고 물었다.

“야, 너 요즘 사람 놀리냐?”

“아니.”

에이슬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펑.

“선물은 무슨, X랄하고 자빠졌네.”

결국 터졌다.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냅다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이 망할 꽃다발 가격이 6만 원이다.

이런 상황에도 그 가격을 떠올리는 나도 참 내가 X신 같은 거 알지만, 얌전하게 꽃다발 님을 커피 테이블에 올려 두며 말을 이었다.

“야, 어이슬.”

“본명 부르지 말라고 그랬어.”

어이슬의 경고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도 일이라는 걸 하는 사람이거든.”

“일 있었어?”

“어. 오늘만 해도 라디오 하나 하고 왔다.”

“고작 그거 가지고 일이라니.”

고작?

아, 열이 뻗친다.

‘이제 막 20살을 넘긴 이 꼬맹이 상대로 뭔 짓을 하겠냐.’

후.

한숨을 흘리며 속으로 참을 인(忍)을 세 개X끼…….

의식의 흐름 따라 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한 번 더 심호흡을 하며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열을 흘려보냈다.

꼭대기를 찍었던 열은 아주 빠르게 식어서 감각이 잊힐 정도로 식어 갔다.

“꼬맹아.”

“꼬맹이라니, 감히 주―.”

“닥치고 얌전히 들어. 좋게 말로 할 때.”

앉아 있는 에이슬을 내려다보는 은호의 눈길이 싸늘했다.

“니가 이딴 식으로 불러 대는 몇 분, 몇 시간.”

“…….”

“너한테는 고작으로 보일지 몰라도, 나는 이딴 꽃다발이나 니가 동냥하듯 던져 주는 커피나 빵 쪼가리들보단 내 시간이 더 귀하다고 생각하거든.”

“…….”

“이딴 쓸데없는 장난칠 거면 차라리 부르지를 마라. 지금까지야 참아 줬다지만, 과거고 나발이고…….”

하…….

은호는 말을 멈추며 심호흡에 가까운 한숨과 함께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당장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던 서늘한 눈동자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최근 에이슬을 상대하며 인내심이 좋아지기라도 한 걸까.

뭐든 좋지만은 않다.

은호는 꽃다발로 눈을 돌렸다.

테이블에 살살 놓았던 꽃다발을 나름의 반항으로 툭 쳐 내며 에이슬 앞으로 밀었다.

에이슬에게 부딪친 꽃은 연약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다 멎었다.

“간다.”

속이 갑갑했다.

운동하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적어도 오늘만큼은 대표님이 24시간 운영 중인 헬스장을 잡아 주신 것에 감사했다.

무릎과 허리가 아릿할 정도로 조지고 또 조졌다.

적어도 나만큼은 은지처럼 사고 치고 다니면 안 되니까.

그랬는데, 정말 미칠 것 같은 날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게 뭐냐, 은호야.”

“…….”

꽃다발을 들고 호텔로 들어가는 내 모습이 찍힌 사진.

그 외에도 커피를, 아이스크림을 들고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

마지막으로 처음 호텔에 방문했던 약을 들고 들어가는 사진까지.

“여자친구냐.”

“하, 하하, 하하하하.”

“이은호.”

속이 텅 비어 버린 웃음소리가 실실 흘러나오는데 머리가 아파서 머리를 짚었다.

변호사님한테는 특별히 부탁드렸었다.

이번 일을 대표님께는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변호사님은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일이 꼬여 버린 걸까.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채운 것 같다.

이걸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아, 머리가 아파진다.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어디 가냐! 사진은 설명하고─.”

“……저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박 대표는 은호를 더 몰아붙이려다 멈췄다.

은호는 은지에게 밀리면서도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힘겨워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남에게 티를 내는 그런 녀석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은호는 당장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곧 무너질 것 같은 불안한 상태였다.

“은호야! 네가 대표님한테 그러…….”

“내버려 둬라. 은호가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까.”

매니저 도진은 그런 은호에게 한 소리를 하려다 멈췄다.

박 대표가 도진을 당기며 막아선 덕분이었다.

“다녀올게요.”

은호는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숙이는 걸로 인사했다.

회사를 나온 은호의 표정은 바로 어제 에이슬을 노려봤던 그때와 비슷했다.

회사에서 나와 대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야, 나와.”

전화의 상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 *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룸 형식의 식당.

에이슬과 은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알아서 들여요.”

주문을 받으러 지배인이 들어오자 에이슬은 대충 손짓하며 그를 물렸다.

이런 와중에도.

‘하…….’

왠지 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순간적으로 ‘얼마짜리를 내어 올 줄 알고 저런 소리를 하나’ 그 생각 때문에.

“그래서.”

에이슬은 지배인이 물러난 뒤에서야 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기자가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을 보냈어.’

내가 말한 건 딱 여기까지였지만 이미 상황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없잖아.”

“뭐?”

대뜸 튀어나온 에이슬 대답에 도리어 내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에이슬은 자리 앞에 놓인 와인 잔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그냥 열애설로 인정해. 돈 많은 여친 생기고 얼마나 좋아.”

“너, 돌았냐?”

머리에서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심부름 여기까지만 하시려고? 계약 파기?”

“왜 그게 그렇게 연결되는 건데?”

에이슬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면 내가 묻자. 여기서 이걸 제일 덮기 좋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에이슬은 큰 로고가 박혀 있진 않았지만 척 봐도 고가의 명품으로 보이는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난 이런 사진 받았거든.”

“…….”

혹시나 에이슬이 직접 일을 벌인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에이슬이 꺼낸 사진은 내가 에이슬에게 따지러 간 첫날이었다.

에이슬이 내가 오는 줄도 모르던 그때.

당시 사람이 몰린다 싶었는데 하필이면 거기에 기자도 섞여 있었던 모양.

한편, 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에이슬은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실실 웃고 있었으니까.

“왜 쪼개냐.”

“재밌잖아.”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해 봐야 욕밖에 안 나올 것 같아서.

띵―.

이젠 익숙해져 버린 라이터 소리.

에이슬은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집어넣었다.

담뱃재는 어디에 털어 내려는 건가 했는데, 가지가지 한다.

에이슬이 담배를 쥔 채 뻗은 손이 향한 곳은 조금 전에 물을 담았던 그 와인 잔이었다.

‘하.’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서 어이없는 웃음만 터져 나왔다.

이런 애가 방송에서는 황당하게도 ‘발랄한 갓 스무 살’로 비치고 있다.

인터넷에 에이슬을 검색하면 소름 돋을 정도로 좋은 말밖에 없다.

은지에게 했던 디스 랩은 신인의 치기로 치부됐고, 오히려 은지가 흔히 ‘센’ 캐릭터로 자주 공격을 당하고 있다.

“어차피 심부름은 계속할 거고…….”

눈앞에서 에이슬이 하는 모든 행동이 거슬리는 나와 다르게 정작 에이슬 본인은 뭐 하나 느끼는 점이 없는지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번에 어떻게 무마한다고 해도 파고드는 기자들도 생길 게 뻔하지 않아?”

“……뻔하지, X발.”

너무 뻔해서 할 말이 없다.

기자들이 들추고 파고들다 보면 결국 첫 시작인 우리 과거까지 알게 되겠지.

그럼 또 이은지가…….

“X발…….”

아, 다 엎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망할.

이은지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