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117화 (117/309)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17)

결국 심부름꾼이 되기를 자처한 뒤, 난 히죽거리는 에이슬을 노려보며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고는 어떻게 증명할 건데.”

“뭐, 각서라도 써 줄까?”

“당연한 거 아닌가. 써.”

에이슬은 장난처럼 받아들인 것 같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변호사 사무소로 가자.”

“뭐?”

“공증은 받아야지.”

에이슬은 황당해하긴 했지만 의외로 얌전히 변호사 사무소로 향했다.

택시로 이동하는 내내 에이슬은 옆에서 ‘너 같은 놈은 생전 처음 본다’라며 구시렁거렸다.

“생전이라 해 봐야 20년밖에 더 되냐.”

“어쨌든.”

도착한 사무소는 오래전부터 연결이 있는 사람이었다.

은지와 은호의 후견인 건부터 회귀 이후에는 은지의 추행 사건까지 맡아 주셨던 변호사님.

“여기까지 은호 씨가 무슨 일로…….”

미리 연락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변호사님은 갑작스럽게 방문한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에이슬은 처음엔 장난처럼 여겼지만, 변호사님이 끼자 계약에는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각서도 썼고 공증까지 확실하게 받았다.

심부름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에이슬이 부탁하는 건 상당히 시답지 않은 부탁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 *

[ㅗ ― 나 아파 약 ㅅ ㅏ 와]

녹음을 끝마치고 쉬고 있던 그때.

꼴도 보기 싫은 ‘ㅗ’에게 연락이 왔다.

에이슬이었다.

“무슨 약을 사 오라는 거야.”

문자를 받았을 때, 평소 오타 한 번 없던 녀석이라 조금은 갸웃거렸다.

걱정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왜 이래?’라는 순전히 의문에 나온 행동이었다.

무슨 약을 사 오냐고 답을 보냈지만 에이슬은 답이 없었다.

답답함에 전화를 걸자 평소 떽떽거리던 시끄럽던 목소리가 그날따라 힘이 없었다.

“여보세요.”

“약 사 오라고…….”

“아니. X발, 약 종류가 한두 개도 아니잖아.”

“열나고 추워. 근육통도 있고…….”

“병원을 가.”

“가기 싫으니까 약 사 오라는 거잖아! 빨리! 30분 내로 사 와.”

힘이 없다는 건 취소.

귀 찢어지는 줄 알았네.

“알았다. 알았어.”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어 버리고 난 매니저 형을 찾았다.

“형.”

“응?”

“나 약국 좀 다녀와야 할 거 같은데.”

“왜! 너 어디 아파?”

매니저 도진이 형은 안경에 기름이 묻은 것도 모른 채 포테이토 피자를 뜯고 있었다.

“아니, 나 말고…….”

“동생 아프대? 걔 곧 콘서트도 있어서 컨디션 무너지면 큰일 날 텐데?”

“아니, 걔도 말고.”

“뭐야, 그럼.”

도진이 형이 피자를 한 입 더 물려던 그때, 갑자기 나를 돌아봤다.

“너 설마…….”

형 손에 들고 있던 피자가 툭 피자 판 위에 떨어졌다.

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여친 생겼냐?”

“뭔 X친, 아니!”

“아, 깜짝이야.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미안. 갑자기 재수 없는 소리를 하니까.”

순간 이렇게 화낼 말은 아닌데, 에이슬이랑 사귀다니.

진심으로, 끔찍할 정도로 싫어서 욕이 먼저 튀어 나가 버렸다.

형은 투덜거리며 놓쳤던 피자를 들어 절반으로 접었다.

한 입밖에 안 베어 물었던 피자였는데, 형은 그걸 단번에 입안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머좌(가자).”

“입 안 터져?”

“금믐므.”

“괜, 찮다는 거지?”

형은 입안 가득 피자를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딱히 따라올 필요는 없어. 그냥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우무으믐므으.”

“뭐라는 거야.”

“음므므그므르.”

“태워 준다고?”

“음무므믐.”

“아. 진짜 제발 이은지 같은 짓 하지 말고 입에 있는 거 다 먹고 똑바로 말해.”

“음므무므므므므.”

형은 뭐 그런 소리를 하냐며 버럭 소리치는 것 같은데, 솔직히 꾹 닫힌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뿐이었다.

도진이 형은 종종 보면 은지랑 비슷하게 행동할 때가 있다.

저렇게 입안 가득 밀어 넣고 우물거리는 것까지.

이은지랑 생긴 것만 다르지 하는 행동을 보면 저 형이 더 친오빠인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까지 들 수준이었다.

그런데 의아할 정도로 이은지는 도진 형을 싫어한다.

「“오빠네 매니저님 더러워!”」

이유를 물었을 때, 이은지는 그런 이유에서 싫다고 했었다.

도진 형도 은지가 버릇없다며 싫어한다.

그런 동생과 매니저를 둘 다 가진 중간 입장에서 보기엔 솔직히 동족 혐오 같은 느낌이다.

“꺼억.”

콜라 한 잔을 단번에 마시더니 형은 부탁대로 다 먹고 대답했다.

“후우. 같이 가자고.”

“됐어. 여기 앞에 들르는 건데.”

“누구한테 약 사 주는 건데?”

“……있어. 짜증 나는 애.”

“친구?”

“…….”

친구는 개뿔.

대답을 안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답을 아꼈다.

“태워 줄게.”

“됐어.”

“하여간 고집은.”

“갔다 올게.”

“오래 걸리는 거면……!”

“됐어. 금방 와.”

금방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ㅗ ― 집으로 배달]

에이슬 문자를 보기 전까진.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짓이었지만 에이슬은 계약서를 쓴 그대로 잘 이행했다.

본인이 흩뿌렸던 찌라시들을 나름대로 잘 수습했고.

본인이 직접인지는 모르겠지만.

찌라시와 관련된 은지의 기사가 뜰 때면 화제가 되기 전에 사라지기도 했으니까.

그 여자가 일 처리 하나는 잘 해 줬으니, 나도 계약대로 ‘사람’ 대우는 해 주는 것뿐이다.

에이슬이 찍어 준 주소지를 따라 도착했다.

택시의 내비게이션에 웬 호텔이 찍혔을 때 설마 했는데, 정말인가 보다.

‘적어도 강남의 고급 아파트라든가 그런 곳일 줄 알았는데.’

눈앞에 놓인 건 으리으리함을 자랑하는 디바이드 소유의 5성급 고급 호텔이었다.

* * *

전화가 왔다.

에이슬은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며 전화를 받았다.

“손님이…….”

“알아요. 맞으니까 빨리 보내요.”

“……알겠습니다.”

에이슬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

잠시 후.

시끄러운 벨 소리에 에이슬은 곧장 문을 열었다.

낯선 장소에 긴장하고 있었는지 문이 열린 순간 은호가 흠칫하며 놀랐다.

에이슬은 그 모습은 한심하게 보면서도 한편으론 간지러운 기분에 픽 웃음이 터졌다.

“잠깐 들어와.”

“싫어. 약이나 빨리 받아.”

“죽 끓여 달라는 거니까 빨리 들어와.”

“…….”

은호의 한숨이 깊었다.

짜증을 내는 것도 잠시 은호는 내부 풍경에 놀란 듯 눈을 바쁘게 끔뻑여 댔다.

“와―, 뭔 건물 안에 집이 한 채 있네.”

“촌티 나기는.”

중얼거리며 흘린 에이슬의 말에 은호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죽 재료는 있냐.”

“아마, 매니저가 사 놨을걸. 알아서 끓이고 깨워.”

대답 없이 은호는 빨리 나갈 생각으로 죽 재료 준비에 들어갔다.

은지한테 자주 해 줬던 탓일까.

여기선 대충 끓여도 될 텐데, 버릇이 무서웠다.

“어이슬, 이거 어떻게 써!”

“본명 부르지 마! 거기 대충 버튼 눌러 봐, 이 멍청아!”

“버튼이 안 보이니까 묻는 거 아냐.”

“나도 안 써 봐서 몰라. 알아서 해.”

“성질머리하고는─.”

반년 정도를 심부름이랍시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명세서에서 우연히 본명을 보게 됐다.

에이슬은 ‘‘어이’슬’이라고 어릴 적에 놀림을 많이 받은 탓에 본명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활동명 에이슬을 본명처럼 쓰고 있다고도.

은호는 그래서 이름을 불러야 할 때면 ‘어이슬’이라고 본명을 불렀다.

그냥, 싫어서.

갑자기 냉장고 앞에선 에이슬을 힐끔 본 순간, 은호는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야, 물이랑 먹어. 시체 치우기 싫으니까.”

“시체랑 콜라가 뭔 상관이야.”

에이슬은 진통제를 콜라랑 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뭔 화학 작용이 어쩌고 해서 뒤진다는 말도 안 들어 봤냐.”

“안 들어 봤거든.”

“그럼 그냥 처먹고 뒤지든가 마음대로 하세요.”

에이슬은 무시하고 먹으려다, 괜히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신경이 쓰였는지 콜라를 넣어 두고 빈 유리잔을 들고 정수기로 향했다.

약을 먹은 후 다시 방으로 가려는데.

‘얜 뭐 죽 하나 그거 얼마나 걸린다고 뭐 이렇게 정신없어…….’

대충 밥 넣고 물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은호는 쌀을 꺼내 불리고, 빻고 등등.

왠지 분주한 분위기에 에이슬도 호기심에 테이블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아, 와. 대박. 이거 터치네.”

드디어 인덕션의 사용법을 알아챈 듯 은호가 신문물에 놀라며 중얼거렸다.

‘하하.’

에이슬은 언젠가부터 웃으며 은호를 보고 있었다.

‘아.’

본인이 웃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땐 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늦은 노릇이었다.

“기분 나쁘게 왜 쪼개고 X랄이야. 밥이나 무라.”

거친 말과 다르게 은호가 내려 둔 죽은 거슬리는 밥알 하나 없이 부드러웠다.

간 하나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어떻게 한 건지, 달게 느껴질 만큼 죽은 쌀 자체의 풍미가 제대로 담겨 있었다.

“……맛있다.”

“좀 많이 해 놔서 하루 치는 될 거니까. 식으면 넣어 놔. 밖에 내놓고 또 먹을 거면 한 번 더 끓여서 먹고.”

“응…….”

“다 해 줬으니까 난 간다.”

“…….”

대답이 없었음에도 은호는 아쉬움 없이 제 할 일은 마쳤다는 듯 호텔을 떠났다.

띠리릭―.

은호가 나가고, 호텔 방 현관문이 닫힌 뒤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마치 언제 누군가 있었냐는 듯이.

에이슬은 은호가 죽을 끓여 둔 냄비로 눈을 돌렸다.

다시 본인 앞에 놓인 죽을 바라봤다.

에이슬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처음 열이 났을 때.

항상 먼저 찾던 매니저에게 연락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함께했던 매니저 언니가 일을 관둬 버려서.

「“언니는, 언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래.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매니저는 에이슬을 보며 웃었다.

세상 씁쓸하게.

「“내가 망쳤으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하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는데…….”」

힘들더라고.

언니가 미안해, 이슬아.

매니저는 뒷말을 차마 소리로 뱉을 수는 없었는지 입 모양으로 말을 끝마쳤다.

에이슬은 가장 먼저 DI 뮤직 대표에게 찾아갔다.

삼촌이라면 어떻게든 언니를 붙잡아 주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에이슬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더 좋은, 네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구해 주마. 우리 이슬이는 걱정하지 말렴.”」

마치 기계 속 부품을 하나를 바꿔 끼듯 삼촌은 그저 새로운 사람을 구해 주겠다고 할 뿐이었다.

‘아니야. 삼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

몇 번이고 외칠수록 삼촌은 오히려 날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되려 고개를 저었다.

달그락달그락.

“끅, 으, 흐으으으…….”

거칠게 사기그릇을 긁어 대는 숟가락 소리와 함께 박자라도 맞춘 듯, 입안에 무언가 가득한 흐느끼는 울음소리.

2층까지 있는 넓은 호텔 방 안에는 두 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 * *

[ㅗ ― 죽 고마워]

은호는 ‘ㅗ’에게 도착한 문자를 읽지도 않은 채 핸드폰을 꺼 버리며 집으로 들어섰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심부름.”

“대표님 심부름?”

“아니, 있어. 왜.”

“아! 대박, 대박! 나 오늘 방송 전에 지예찬 선배님 대기실 찾아가서 인사드렸거든?”

“톡신의 지예찬?”

“어! 대박이었어!”

“뭐가.”

“선배님이 내 노래 들으셨대! 대박이지!”

“……대박은 대박이네.”

“그치!”

“어. 니 얼굴이.”

“아, 씨…….”

상기된 얼굴로 흥분하던 이은지는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듯 축 처졌다.

“아! 이은호 새끼랑 말 안 해!”

“하하하하.”

은지는 안 그래도 못난 얼굴을 더 구기며 성질을 부렸다.

쾅!

제대로 삐진 듯 이은지 방문이 강하게 닫혔다.

“야, 안 나오면 짜X게티 나 혼자 다 먹는다.”

“미쳤냐! 그건 아니지! 내 거 하나는 놔둬라!”

“싫은데.”

닫혔던 방문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열렸다.

하하.

‘아…….’

오늘 받은 스트레스가 이제야 날아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