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16)
“…….”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트린 건 에이슬의 한숨이었다.
‘젠장.’
솔직히 욱하는 마음에 말이 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어떻게 상황을 대화로 잘 풀어 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방문한 건데, 이건 그냥 날 쫓아내라며 소리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또 끌려가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에이슬은 오히려 자신의 작업실로 안내했다.
은호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고, 회사 앞에는 보는 눈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게 에이슬을 몰아가기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은지의 앞일이 걸린 일이라 조심스러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에이슬과 함께 DI 뮤직 엔터테인먼트 사옥 안으로 들어섰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던 건물 외향만큼이나 내부도 적잖이 화려했다.
에이슬을 뒤따라 3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마저 황금빛으로 도배를 해 둔 탓에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에이슬의 짙은 향수 냄새 탓인지 코끝에는 싫어하는 장미 향과 왠지 모를 찌든 냄새가 진동했다.
“들어오시죠. 아― 참, 좋게 말로 할 때 녹음기는 끄시고.”
어떻게 알았나 몰라.
은호는 보란 듯 휴대폰 녹음 기능을 종료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에이슬은 그제야 작업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에이슬한테 풍기던무언가에 찌들어 버린 장미 향이 훨씬 짙어졌다.
머리 아픈 향기에 인상을 구기자, 에이슬은 그런 은호를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앉아요.”
에이슬이 가리킨 붉은 소파에 앉자, 부드럽게 느껴져야 할 벨벳 재질임에도 불구하고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기만 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왜냐고 물었지.”
에이슬이 은호의 건너 자리에 앉았다.
다리를 천천히 꼬며 에이슬은 한쪽 팔을 세워 턱을 괬다.
대답을 딱히 하지 않았음에도 에이슬은 그렇다고 알아들은 듯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난 그 여자가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게 불쾌하거든.”
예상은 했지만 너무 예상 그대로의 악의 섞인 대답에 은호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해 봐야 ‘왜’라는 물음뿐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이 여자가 뿌려 댄 찌라시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상에 편하게만 자라 온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자리이든,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처음엔 얘도 뭔가 이유가 있었으니 이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
노력은 해 봤다.
그런데도…….
‘좀 X 같긴 하네.’
여긴 자본주의 사회라고, 태어난 사람이 최하층에서 시작했다고 한들.
거지 같은 세상 탓을 하고 욕을 하되, 적어도 그 자리에 고여 썩어 가진 말라고.
대표님이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신 이야기였다.
눈앞에서 에이슬이 웃었다.
이 여자는 그 자리에 고여 썩어 버린 결과물일까.
이은지의 재능에 무너져 있던 나한테 대표님은 그런 말씀을 해 주셨다.
가진 재능, 능력을 사용해서 날아오르는 사람들이 있듯.
나한테는 날개는 없지만 단단한 동아줄이 눈앞에 있는데 왜 올라오지 않느냐고.
결과적으로 옥상에 오르는 건 다 똑같으니까.
과정이 다르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
다만 내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더 노력해야 한다.
「“날개가 꺾이면 이젠 걸어서 힘을 내야 하지. 노력으로 올라온 너한테는 너만 가질 수 있는 결과물이 있다.”」
남이든, 동생이든.
비교할 시간에 동아줄이라도 잡고 뛰어 봐라.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었다.
결국 그 노력 역시 제삼자의 시선에는 재능이니까.
그 말을 믿었다.
남 탓하기 전에 뛰어 보기라도 하라고, 그럼 적어도 계단 하나는 오르니까.
나는 그렇게 단번에 날아올라 10층에 올라간 이은지를 보며 계단 하나를 올랐다.
그 계단 하나하나가 모여서 목표였던 1층에 오르고, 더 체력을 길러 2층, 3층을 도전하고 있다.
나는 그랬다.
“수준이 다르잖아, 수준이. 당신이랑 당신 동생이랑 여기 주인인 나랑은.”
뱉는 말과는 다르게 에이슬은 친절해 보이는 미소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이은지는 이렇게 까불어도 이렇게 빡치지는 않았는데, 에이슬의 입이 열릴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동생이랑 그쪽 과거가 밝혀지는 게 싫은 거……. 아. 하긴, 그렇겠네. 좀 ‘X랄’이여야지. 쪽팔리잖아. 거지에 고아라니.”
에이슬은 ‘X랄’을 말할 때 내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면서 말했다.
“난 무슨 영화 스토리인 줄 알았어. 하하.”
“……사실 적시 명예―.”
“풉. 지금 나한테 법으로 협박하는 거야? 감히?”
“…….”
“그래. 뭐, 그걸로 간다고 쳐 보자.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됐는데 더 확실하게 가 볼까? 야, 그거 재밌겠다. 그쪽 동생. 과연 어떻게 될지 기대되네.”
안 통하리라는 건 처음부터 예상했다.
‘하긴 DI 뮤직이 어떤 곳인데…….’
은호는 이를 까득거리다 입을 닫았다.
「“그때 이야기가 돈다고요?”」
찌라시 소식을 처음 들었던 이은지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평소 그렇게 고민이라는 걸 길게 하는 녀석이 아닌데 이은지는 며칠 내내 생각이 많아 보였다.
어지간하면 짜X게티를 만들면서 물도 안 버린 채 소스를 풀까.
「“야, 그거 짜X게티인데.”」
「“어? 아. 괜찮아.”」
그걸 또 은지는 그냥 라면 먹듯 잘 먹었다.
「“뭐야, 어쩐지 싱겁더라.”」
황당하게도 이은지는 다 먹고 나서 그렇게 투덜거렸다.
이은지가 그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복잡한 문제였으니까.
나 역시 우리 과거가 세상에 밝혀지길 원하지 않았다.
더더욱이 다른 사람의 입으로는 더.
매니저인 도진이 형은 그런 내 반응에 ‘그럼 그냥 너희가 밝히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대뜸 세상에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어요’라고 말하는 것도 우스우니까.
‘그게 뭐야.’
‘우리를 불쌍하게 봐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잖아.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한들…….
세상에는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를 직접 말을 해도 ‘거짓말’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은지든 나든 둘 중 어느 시선도 원치 않았다.
직접 밝히고 싶지도 않았던 건 그래서였다.
그냥 불쌍한 녀석들이 노래한다는 것보다 나는 그저 ‘이은호’로, 이은지는 ‘이은지’로 봐 줬으면 좋겠다고…….
그땐 그랬다.
에이슬을 직접 마주하기 전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우리가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가길 원하지 않는 사람.
은지는 지금껏 다른 작곡가와 함께하며 ‘그건 안 된다’고 의견이 가로막힌 적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의 결과 덕분에 처음으로 혼자서도 이 정도는 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내가 아무리 이은지 재능에 괜한 자격지심을 느낀다고 해도, 이은지는 내 동생이다.
함께 고생해 오면서 자란 동생 녀석이 이제 겨우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자리에 도달했는데 못난 오빠가 돼서 발목은 잡고 싶지 않다.
「“닥치고 오라면 오라고, 끌베이 새끼가.”」
여기서 그 새끼 얼굴이 또 떠오를 줄은 몰랐는데, 조광수 일 때문일까.
누군가의 장난감이 되는 건 지긋지긋하다.
아마 이 이야기가 밝혀진다면 더 많은 이런 사람들이 우리를, 이은지를 물어뜯겠지.
내가 더 똑똑했으면, 더 능력이 있었으면 하고 이렇게 절실하게 바라 보긴 또 오랜만이다.
눈앞에 이 여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는 게 화가 난다.
“뭘 원해.”
“뭘 원하냐니?”
“그 주둥이 닥치게 하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못 배운 머리가 낸 것치고 꽤 괜찮은 제안이네?”
차마 말이 곱게 나가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랄지, 에이슬은 거기에 대해선 별말이 없었다.
이어지는 제안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내 심부름 좀 해.”
“심부름?”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 어디든지 달려와서 심부름하라고.”
“왜 하필이면 심부름이야.”
“매니저 언니는 일은 잘하는데 잔소리가 심하고, 지금 쓰는 심부름꾼은 뭐 하나를 맡기면 다─ 삼촌 귀에 들어가거든.”
“싫다면?”
“싫으시다면야, 뭐…….”
에이슬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장난스럽게 톡톡 두드려 댔다.
에이슬의 손은 휴대폰을 금방 떠났다.
하지만 나는 차마 휴대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DI 뮤직 엔터테인먼트는 대기업 ‘디바이드’의 자회사다.
‘디바이드’가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는 절대 우스갯소리가 아닌 말이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기업체다.
대표님이 아무리 여유가 있다 한들…….
거기까지 척지기엔 무리일 것이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도 하고…….
고민하는 은호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 에이슬은 조용히 말을 보탰다.
“그쪽 대표가 틀어막았다고는 하던데, 내가 제대로 거들면?”
띵―.
낯선 맑은 소리에 고개를 들자, ‘S.T.D…….’ 흘림체라 뒤를 읽기 힘든 고급스러운 라이터가 보였다.
챡.
깔끔한 소리를 내며 닫힌 라이터.
황금색으로 빛나는 라이터를 보다가 에이슬을 돌아보자, 에이슬은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었다.
장미 향 사이 그 찌든 냄새의 정체가 이거였던 모양이다.
“그때드 막을 스 있슬끄?”
에이슬이 담배를 물고 있는 탓에 조금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후…… 박창석 대표가 돈이나 인맥이 아무리 많아도, 과연? 난 힘들 거라고 보는데.”
“콜록.”
작업실 안에 메케하게 차오르는 담배 냄새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내 기침 소리가 에이슬에게는 예능이나 마찬가지인 건지, 에이슬은 웃으며 나를 구경했다.
“당신 동생 상까지 받았겠다, 기자들이 입 벌리고 떡밥만 기다리고 있다는 거 기억해.”
농락하듯 던지는 에이슬 말은 불편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근 대표님은 지내는 옛 가정집을 개조해서 사용 중인 지금 회사 건물을 두고 보안이 좋은 새 아파트를 급하게 알아보고 있다.
한 건이라도 물어보려고 집 앞에 어슬렁거리는 기자들 외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심부름만 하면 된다는 거지.”
“그럼. 무슨 서비스라도 더 챙겨 주시려고?”
“콜록, 헛소리하지 마.”
에이슬은 가까운 곳에 있던 뚜껑 덮인 재떨이를 끌고 오며 말했다.
재떨이의 뚜껑이 열리자 안은 담배는 없지만 검게 찌든 담뱃재가 눌어붙어 있었다.
거기에 그만큼 진한 짙은 찌든 내도 함께였다.
에이슬은 침을 뱉으며 들고 있던 담배를 털어 댔다.
조금만 더 생각해 봤다면 다른 좋은 방법도 많았을 텐데 자욱해진 담배 연기 때문일까.
강제로 당하는 화생방 훈련에 정신이 혼미했다.
담배는 싫다.
어릴 적부터 우리를 데리고 있었던 ‘이모’, ‘삼촌’이라는 놈들이 지긋지긋하게 뻑뻑 피워 댔었으니까.
이가 갈리고 주먹이 떨렸지만, 지금 에이슬을 상대할 방법은 내 머리로는 이게 최선이었다.
“휴대폰.”
“콜록.”
“엄살은.”
“X발. 콜록. 담배는 끄고 말해.”
에이슬에게 휴대폰을 내밀자, 보기 좋게 내 말을 무시하며 내민 휴대폰만 받아 갔다.
돌아온 휴대폰에는 ‘주인님♥’이라는 이름으로 에이슬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X발.’
난 휴대폰을 받은 즉시 ‘ㅗ’로 이름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