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13)
“오케이―.”
대답을 했으면 갈 것이지, 이은호는 내 방 안에 들어오더니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뭐.”
그 손바닥을 빤히 보다 묻자, 이은호가 황당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돈 내놔.”
“사 주는 거 아니었어?”
“사는 건 본인 돈으로 사셔야죠. 계약 파기?”
“아, 진짜 치사하게 쓰리, 기다려.”
사기는 해야 해서 불만은 있지만 지갑을 뒤적여, 이은호한테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돈 떼먹으면―.”
“아, 사장님, 장사 한두 번 하십니까? 저희 신뢰 거래합니다요.”
참 믿음직하게도 이야기한다.
물론 반어법이다.
“그쪽이 한두 번 떼어드신 게 아니잖아요.”
“아, 오햅니다, 사장님. 그럼 갔다 온다.”
은호는 만 원짜리 지폐를 팔랑거리며 은지 방을 나왔다.
은지는 이미 미래를 알고 있었다.
항상 저렇게 말해 놓고 은호는 매번 아이스크림 하나를 은지 돈으로 사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었으니까.
그냥 컨디션이 나쁘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그런지 알고 나니 이젠 모든 게 생리 탓 같았다.
다 하기 싫다가도 다 뒤집어엎고 싶고…….
지금까지 멀쩡하던 배도 갑자기 불편한 느낌이고…….
괜히 몸도 늘어지는 것 같고…….
“아, 짜증.”
뭐가 짜증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짜증 난다.
시한폭탄이 되어 가는 기분이다.
아니, 이미 된 건가.
“아― 아으― 아아…….”
은지의 우렁차야 했을 목소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잦아들었다.
* * *
은지와 거래 후 집 밖으로 나선 그때.
“은호냐?”
“어, 대표님. 이제 퇴근하세요?”
“그래.”
골목 맞은 편에서 이제 막 퇴근 중인 대표님이 보였다.
“넌 어디 가?”
“아…… 편의점 좀 다녀오려고요.”
주머니에 챙겨 넣은 만 원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뭐 사러 가려고?”
“이은지 초콜릿 사러요. 아, 진통제도.”
“진통제?”
대표님이 갸웃하며 물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게 왠지 이상한 것 같아서 말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대충 어깨만 들썩이며 어색하게 웃어 버렸다.
의미는 충분히 전달됐는지, 대표님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속에서 둥둥거리는 울림이 들린 건 기분 탓이겠지.
“그래. 내가 아무리 신경 쓴다고 해도 너만큼 은지를 챙기진 못하니까. 얼른 사서 들어가.”
“네.”
“멀리 갈 곳 있으면 현우 불러서 꼭 같이 다니고.”
“네.”
“밥 잘 챙겨 먹고.”
“네.”
대표님은 걸어가면서 손 인사를 끝으로 사라졌다.
편의점은 반대 길이라서 뒷모습을 보면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과 헤어진 직후에는 곧장 저녁 늦게까지 하는 약국에 들러 진통제를 샀다.
돌아오는 길엔 편의점에서 이은지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골랐다.
새로운 맛이 나왔길래 장난으로 그걸 사려다 참았다.
‘예민한 시기에 괜히 건드려 봤자 컨디션이 망가지면 무대까지 망가질 수 있으니까.’
곧 녹화가 잡혀 있지만 않았어도 무조건 새로운 걸 골랐겠지만, 아무튼 그런 걱정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살 건 다 사고 거스름돈을 받고 편의점을 떠나려던 그때였다.
“…….”
편의점 입구 옆 아이스크림이 가득한 냉동고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살까 말까.’
고민은 짧았다.
사실 이미 고민을 할 때부터 몸은 냉동고 앞에 서 있었다.
‘천 원쯤은 안 들키겠지.’
고구마 맛, 인절미 맛, 완전 진―한 초콜릿 아이스크림 중에 고민하다 집어 든 건 인절미 맛이었다.
지난달에 진―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너무 달아서…….
「“아재냐?”」
문득 이은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하며 인절미 맛을 계산하고 입에 물었다.
초콜릿 같은 겉 부분 절반을 먼저 깨부숴 먹고 이후에서야 내부의 하얀 크림 부분을 먹었다.
먹다 보니 미세하게 찹쌀떡 느낌이 나는 게 매력이기도 했지만 때때로 거슬리기도 하는 아이스크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내 돈이 아니라 그런지 맛만 좋다.
‘집 근처까지 가지고 가면 걸릴 테니까.’
난 편의점 의자에 앉아 깔끔하게 다 먹은 후 쓰레기통에 증거까지 인멸하고서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마주치는 회사 사람들이 없었다.
집으로 올라오니 전에 본 고양이가 왔다 간 건지, 그때 이후로 이은지가 매일 신경 쓰며 정리해 둔 고양이 집에 검은 털이 왕창 묻어 있었다.
처음엔 창백한 이은지가 내 환각이라는 생각에 미워 보였던 녀석이었는데, 그 환각이 진짜 이은지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뭐랄까…….
‘미안한 건가.’
그런 기분이다.
“나 왔어.”
덜컹거리는 알루미늄 문이 시끄럽게 열렸다.
신발을 벗고 이젠 버릇처럼 손을 먼저 씻고 이은지 방으로 향했다.
“야, 들어간다.”
방문이 닫혀 있어서 대충 말을 하고 문을 열자, 그사이 상태가 더 나빠진 거 같은 이은지가 이부자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
대충 약과 초콜릿이 담긴 봉지를 이은지 옆에 던져 두고 나가려던 그때였다.
“잔돈.”
“아, 자.”
진짜 깜빡했다.
주머니를 뒤적여 남은 잔돈을 건네자, 자리에 앉아 벽에 기댄 채 돈을 세는 이은지 눈빛이 살벌하다.
‘들켰나?’
이은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뭐.
뭐 달라고.
“영수증.”
“아?”
“영수증.”
“버, 버려 달라고 했는데?”
주머니에 있긴 했지만 찔리는 게 있으니 차마 당당하게 내어 보일 수 있을 리가.
바스락 바스락.
이은지는 갑자기 봉지 안을 뒤적이더니 갑자기 인상을 구겼다.
“야.”
“…….”
저게 오빠한테.
……라고 말해야 하는데, 눈빛이 더럽게 살벌하다.
“하아…….”
“…….”
들켰나 보다.
“인간적으로 내 돈으로 사 먹었으면 본인만 처먹지 말고 내 것도 사 와야 하는 거 아니냐?”
들켰네.
“알고 있었어?”
어떻게 알았지?
“알지, X발. 딱 아이스크림 하나만큼 돈이 모자라잖아.”
“오, 이은지 쫌 똑똑한데……!”
“이상한 칭찬으로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라.”
“오, 그건 어떻게 알았대?”
“나 설거지 한 번만 할 거야.”
“아까 세 번 하기로 계…….”
‘계약했으면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은지가 쏘아보는 눈이 살벌해서 물러섰다.
“나 같은 오빠 어디 없어. 인마, 고마운 줄 알아. 나니까 해 준다.”
“…….”
이은지가 미간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스위치가 켜진 걸 느꼈다.
난 본능적으로 내 방으로 도망쳤다.
* * *
펜션을 다녀온 직후, 생방송이 있기 며칠 전.
주연과 슬기는 오랜만에 만났다.
주연은 최근 관계자가 된 슬기를 통해 E-UNG(이응)의 많은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핸드 마이크?”
“응. 이번 콘셉트가 안무와 퍼포먼스보다는 라이브라고 해야 하나, 그쪽에 치중하기로 했거든.”
“X친, 대박.”
“이번엔 우리 은지 님 뭘 입혀야 잘 어울리실까. 이 언니가 요즘 고민이 많다.”
슬기는 간단히 이야기를 전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잘됐다!”
“아우! 깜짝아!”
그 순간, 주연이 눈을 빛내며 소리치자 슬기가 화들짝 놀라면서 하마터면 커피를 살짝 흘릴 뻔했다.
“미안, 헤헤. 혹시 내가 뭐 하나 준비해 주면 그거 코디에 쓸 수 있어?”
“뭐.”
“그건 비밀. 내가 며칠 뒤에 너희 집으로 택배 쏠게.”
“뭔데, 힌트라도 주고 말해야지.”
“에이, 나중에 보라니까. 참, 생방송 이후에 도착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뭔데?”
주연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슬기는 주연이 그날 무슨 일을 벌이려나 보다 하고 대충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넘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며칠 뒤 저녁.
“곧 방송인데 진짜 의상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거나 입히기는 너무 싫은데…….”
슬슬 의상을 결정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슬기의 한숨이 더 길어졌다.
“저건 뭐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집 문 앞에 고이 놓여 있는 의문의 택배 상자 하나.
며칠이 지난 탓에 주연이 그때 보낸다던 택배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뭐지?”
상자에 쓰여 있는 이름은 분명 제 이름이 맞았다.
의문을 가지며 상자를 들자, 상당히 묵직한 무게에 슬기의 호기심은 더 배가 됐다.
집에 들어선 뒤, 칼을 챙겨 와서 테이프를 가르고 상자를 개봉했다.
슬기는 그제야 주연이 보낼 거라던 선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보자마자 주연이 보낸 거란 걸 알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얘…… 진심이네.”
슬기는 밀봉에 밀봉이 거듭된 상자 속 물건을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선물을 보자마자 그간 고민했던 의상에 대한 고민이 끝났다.
“……이건 제복이다. 제복밖에 없어.”
* * *
“아, 내놓으라고!”
“이미 먹어 버린 걸 어떻게 내놓냐? 그리고 너 설거지 한 번만 할 거라며.”
“그건 그거고, 떼먹은 건 내놔야 할 거 아니야!”
“이미 배 속에 들어간 걸 어떻게 뱉음?”
“돈 내놓으라고!”
“천 원 가지고 겁나 쪼잔하게 구네!”
“쪼잔한 건 이은호 너잖아! 미친X아!”
“미친X?”
“어!”
“오케이. 난 미친X이라서 안 줄 거.”
“아아아악!”
아침부터 무슨 난리인지.
방송국에서 새벽부터 진행했던 드라이 리허설이 끝나고, 집에 들렀다가 오기로 한 은호와 은지.
약속한 시각이 되기 20분 전.
일찍 출발한 건지 회사의 두꺼운 유리창 너머, 골목 끝에서부터 둘이 싸우며 걸어오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아, 알았어! 줄게! 준다고!”
“지금까지 떼먹은 거 다 내놔.”
“그건 그때 말했어야지.”
“X새끼야!”
“크헉. 콜록.”
슬기가 근처까지 온 은호와 은지를 맞이하기 위해 불투명한 회사 유리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그사이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은호가 목을 움켜쥔 채 콜록거리고 있었다.
“무슨 난리래요…….”
“언니―이! 이은호가요!”
은지는 슬기를 본 순간 아이처럼 안겨 들며―키가 더 큰 은지가 안은 형상이 되긴 했지만― 어제 있었던 심부름 돈 떼먹은 사건의 경위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슬기는 황당함 섞인 한숨을 흘리며 은호를 돌아봤다.
“은호 씨…….”
“나중에 줄 거였어요…….”
막상 다른 사람들한테 아이스크림 사건을 들키자 민망해진 듯 은호는 다른 곳을 돌아보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평소에는 굉장히 어른스러운 것 같은데, 왜 둘만 있으면 꼬맹이들이 되는 건지…….’
휴.
슬기뿐만 아니라 현우와 일찍 출근한 직원들도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장판이었던 아침도 잠시, 슬기는 두 사람을 불러 준비된 의상을 건넸다.
“우와. 이게 오늘 의상이에요?”
“네.”
“입고 나올게요!”
“도와드릴까요?”
“아뇨. 필요하면 언니 부를게요.”
은지는 슬기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금색의 솔이 장식된 새하얀 제복을 챙겨 탈의실로 들어갔다.
“제 거는 이건가요?”
“아, 은호 씨는 이거예요! 그건 은지 님 재킷이에요.”
“아하.”
슬기는 흐뭇한 시선으로 은지를 보다 화들짝 놀라며 은호에게도 은색의 솔이 장식된 검은 제복을 내밀었다.
은호는 은지와 반대편에 있는 회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직원들은 단체로 행동을 멈추고 은호를 돌아봤다.
슬기는 입을 틀어막으며 생각했다.
‘넥타이 꼭 넣길 잘했다. 오늘 쭈 기절하겠네.’
은호는 주위에서 집중된 눈길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 모양을 바르게 잡으며 매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모습이 아닌 듯 은호는 다 맨 넥타이를 두 번은 풀었다가 다시 매는 걸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