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12)
나는 고맙다는 의미를 담아 은지를 돌아보며 웃었다.
은지는 고개를 까딱거리는가 싶더니, 히죽거리지 말고 얼른 마무리나 하라는 듯 턱짓으로 말을 대신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은지가 요청한 대로 노래의 끝을 이었다.
잘 시간을 의미하는 ‘이 길 위’의 뒤 브리지였다.
너는 걷고 또 걸어
널 믿는 나를 믿고서
이 길 위
이은지도 언제 섞여 들었는지 같이 코러스를 얹었다.
우리만 아는 그 시간조차 쫓아오지 못하게
멀리 더 멀리
잘 자
오늘 밤도 너의 길 위 밝은 별이 뜨길
음음
감정을 너무 실었는지 살짝 눈물이 핑 돌았다.
먹먹해진 기분을 심호흡으로 겨우 달랬다.
어떤 반응일까.
궁금함 절반, 긴장 절반의 복잡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누군가는 우리 이야기를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 시대에는 겪을 리 없는 일이라고 놀라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일을 겪은 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나는 경험했기에 이야기한다.
이런 아픔에 공감해 줄, 알아줄, 아직 나타나지 않은 한 사람을 위해.
하지만 정작 세상에 내놓기 전에는 그래도 걱정했었다.
혹시 이 감정이 우리만 공감되는 이야기면 어쩌나 싶어서.
내가 그들의 말대로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싶어서.
[맞아 ㅠㅠㅠㅠ]
[막 행복하면 불안하지]
[공감……]
다행히 내 걱정이 쓸데없는 생각이었다는 듯 채팅에는 ‘ㅠㅠㅠㅠ’가 마치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한편, 마지막 ‘이 길 위’를 듣고 힘들던, 또는 힘든 일들이 떠오른 몇몇 팬분들은 저마다 힘들었던 시절을 짤막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다들 제각각이긴 하지만 힘든 일들이 있구나.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었고, 원망하지만 애증으로 가득 찬 괴로웠던 그 시절, 시기.
수많은 힘들었던 경험들에 대한 채팅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영화, 드라마 한 시리즈를 가지고 있고, 쓰고도 있다.
우리 역시 그러했듯.
이 채팅방 속 한 명 한 명이 모두 제각각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채팅창에는 종종 ‘안 궁금함’, ‘저런 말은 왜 하는 거?’ 같은 냉랭한 반응들도 적진 않았다.
다만 나와 은지가 경청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나둘씩 보이던 그런 채팅도 차츰 인원이 줄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오늘 먼 길 찾아와 주신 포션분들도, 저희 이응을 항상 관심 가져 주시고 아껴 주시는 E%분들도 모두 감사해요.”
아쉽다는 채팅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듀오> 마지막 방송이 끝난 뒤였던가.
간이로 열린 팬 미팅에서 헤어지기 전, 차량을 쫓아오던 팬분들의 애정이 어린 외침과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울컥거릴 타이밍이 아닌데.
괜스레 그때가 겹쳐 떠오르자 겨우 가라앉혔던 먹먹함이 다시 울컥하며 올라왔다.
[와ㅠㅠㅠ]
[너무 좋아 ㅠㅠㅠㅠ]
[마지막 곡 진짜 너무 좋았어요…….]
[나는…]
[아 몰랑 다 좋아]
[ㅇㅈ 다 좋아 ㅠㅠ]
총칭 ‘떡밥’ 작전은 성공한 것 같았다.
“오늘 들려드린 곡은 조만간 제대로 완성된 모습으로 만나 뵐게요.”
은호는 좋은 반응들로 가득한 채팅들을 눈에 담으며,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각 잡힌 시작과 다르게 방송이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다 보니 엔딩은 조금 분주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됐다.
“그럼 다음에 만나요, 여러분!”
“안녕!”
소리 내서 손까지 크게 흔들며 인사하는 승연과 은지.
“안―녀엉”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인사만 하는 예찬과 오현.
말 대신 크게 양손을 흔들고 있는 송민.
굳은 동상처럼 손바닥만 펼치고 있는 태현.
마지막으로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은호까지.
은호는 고개를 들며 활짝 웃었다.
“다들 좋은 밤 보내요.”
은호의 인사를 끝으로 생방송 화면은 검게 변했다.
분주한 화면 너머의 복작거림도 검게 변한 화면처럼 서서히 사라졌다.
Same day Same time
Same day Same dream
나서야 했던 새벽길에
걸어야 했던 새벽길을
마무리 곡으로는 오늘 짤막하게 소개한 노래 중, 이 이어졌다.
Good Night
다음 날
우리가 다시 웃으며 만날 수 있게
Good Night
* * *
생각보다 길었던 생방송을 마무리하자, 시간은 벌써 저녁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난 은지랑 같이 선배님께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았어.”
“감사합니다, 선배님!”
“별말씀을.”
태현 선배가 덤덤하게 인사하던 그때였다.
한 걸음 뒤에서 스태프 역할을 해 준 직원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던 승연 선배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뒤풀이는 어디 갈까!”
“시작부터 무슨 뒤풀이야.”
승연 선배가 소리친 그때, 예찬 선배가 승연 선배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승연이는 매일 놀 생각만 가득하지.”
“아, 혀엉. 뒤풀이는 해야죠.”
“시끄러워. 생방송 그렇게 길게 했으면 애들은 가서 쉬어야지. 쉴 시간도 없는데 너같이 늙고 재미없는 녀석이 붙잡고 있으면―.”
“알았어요. 그, 그만…….”
항상 차분하고 능글맞던 예찬 선배한테서 순간 대표님의 모습이 보인 건 기분 탓이었을까.
“은호랑 은지야.”
“네?”
“마지막에 싸비 메들리 MR.”
“아, 네.”
“그거 밤새 만져서 만든 거지?”
“헉.”
어떻게 알았냐는 듯 은지가 화들짝 놀라며 선배를 빤히 바라봤다.
대표님한테 파일을 보일 땐 ‘맛보기용으로 미리 만들어 놨었다.’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보냈다.
하지만 실상은 어제 꼬박 하룻밤을 새워 가면서 만졌던 파일이었다.
훅만 보여 드리기에는 다 공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자꾸만 욕심은 늘어났고, ‘여기는 이만큼만, 저기는 저만큼만’ 계속 조정을 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에는 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바로 집에 돌아가도록 해. 아직 녹음도 남았다며.”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예찬 선배는 일부러 모른 척 주제를 돌렸다.
때마침 휴식이 절실했던 차라 예찬 선배의 배려가 굉장히 감사했다.
인사를 끝마치고 다들 떠난 자리에 우리 응원봉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3번 응원봉은 제작을 위해 대표님이 챙겼고, 2번 응원봉도 비슷한 디자인이라 같이 챙긴 것 같았다.
그리고 널브러져 있는 투명한 각진 구 안에 조금씩 흔들리는 E-UNG 마크.
분리된 1번 응원봉이었다.
난 구 안에 들어 있는 우리 마크를 빤히 바라보다 대표님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표님.”
“왜.”
“저 이거 가지고 가도 돼요?”
“가져가서 뭐 하려고?”
“구 자체는 마음에 들어서 조명 위에 올려 두면 좋을 거 같아서요.”
“조명?”
“네. 무드 등처럼 대충 장식해 둘까 해서요.”
“마음대로 해.”
기념으로 뭐라도 챙겨 가고 싶었는데 마침 딱 맞았다.
허락도 받았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몸통이 사라진 1번 응원봉의 머리통을 챙겼다.
“장식이라…….”
박 대표는 그사이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했다.
“호오, 무드 등으로 굿즈를 내는 것도…….”
조만간 응원봉과 함께 출시될 두 번째 굿즈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 * *
시한폭탄
생방송이 끝나고 선배님들을 배웅한 뒤에서야 은호와 은지도 집으로 향했다.
이 길위 끝이 부디
내가 생각하는 그 끝이 아니길
돌아가는 길.
은지는 오늘 불렀던 마지막 가사를 되뇌고 또 되뇌었다.
내 꿈 같은 하루가 매일 언제 깨어질까
믿으면 믿을수록 불안은 내 맘을 좀 먹고
몸집을 키워 내 맘을 좀 먹고
이은호가 불렀기 때문일까.
이은호가 쓴 가사이기 때문일까.
자꾸만 이은호의 가사를 입에 담을 때면 이은호가 회귀했다는 사실이 껄끄럽게 걸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지켜봤다는 사실에 더더욱 입안이 썼다.
왜 자기 이야기를 직접 하는 법이 없는지. 그럴 거면 아예 하지를 말던가!
왜, 자꾸 노래에만 은근슬쩍 담아서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는지…….
‘쯧.’
막상 파고들자니 굳이 직접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진 않았다.
그건 또 그것대로 내가 왠지 변태 같아서.
그래서 그냥 오히려 모른 척했다.
아무 걱정 없는 척하며 해맑은 모습만 보이는 건 내가 유일하게 이은호한테 부담 없이 해 줄 수 있는 부분이니까.
난 앞서 가고 있는 이은호의 그림자를 밟으며 뒤따랐다.
걱정은 이은호 하나만 해도 이미 두 사람분의 걱정을 충분히 할 테니까.
나라도 생각 없이 살아야지.
“안 그래, 이은호?”
“뭐가?”
“안 그러냐고.”
“그니까, 뭐가.”
“비밀이야.”
“……너 어디 아프냐?”
이은호가 황당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봤다.
난 이은호를 지나치며 먼저 대문 앞으로 달려갔다.
“왜 저래?”
뒤에서 이은호가 어이없어하는 말소리를 들으며 히죽 웃음이 샜다.
“이은호.”
“랑이.”
“이발소.”
“소나무.”
그때, 이은호는 대문 앞에 서 있는 내 다리를 보면서 말했다.
“무다리.”
“응. 리 얼굴.”
“헉! 잘생겼다고?”
이은호는 과장하며 놀라더니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턱을 받치며 말했다.
“미치셨어요?”
“아니, 파 쳤는데.”
“아, 왜 저래! 극혐이야, 진짜.”
이은호가 뱉은 괴상한 개그로 인해 팔뚝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다.
내가 질겁하자 이은호는 오히려 더 재밌다는 듯 킬킬거렸다.
“아, 안 해.”
“하하하. 왜 왜.”
“안 해!”
“하하. 동네 울려 소리는 지르지 말고, 인마! 뭔데, 장난 안 칠게. 왜 불렀어.”
“됐어. 별거 아니었어.”
가사에 관해서 이야기나 해 볼까 했는데 ‘파쳤다’는 대답을 듣자 다 필요 없어졌다.
저 인간이 입을 엶과 동시에 박살 났다.
장난 안 친다면서 아직도 히죽이고 있는 얼굴을 보니 괜히 성질만 돋워졌다.
집에 도착한 뒤.
이은호가 씻는 동안 나는 대충 손발만 닦고 건반 앞에 앉았다.
뭐라도 쳐 보고 싶어서 앉았는데.
솔. 솔. 솔.
괜히 건반 하나만 계속 두드릴 뿐이었다.
머릿속 노래가 뒤죽박죽 해서 그랬다.
건반을 칠 기분도 아닌 것 같아서 서랍을 뒤적여 화이트로 ‘凸’ 모양이 그려진 검은 노트를 꺼냈다.
일기라도 쓰려고 꺼낸 건데.
하필 이 노트네.
요즘 따라 이 노트를 보면 일기도 못 쓰겠다.
이은호가 항상 쥐고 있던 그게 생각나는 것도 있고…….
그냥 기분이 그래서 못 쓰는 중이었다.
생방송도 즐겁게 하고 온종일 좋은 일만 가득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분이 뒤죽박죽인 걸까.
내내 의문이었는데, 의외로 이유는 휴대폰을 본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3」
이거 때문이었네.
어쩐지 며칠 내내 식욕이 미친 듯이 돌다가 사라졌다가 난리더라니.
“으, 좀 살겠다.”
그때였다.
이은호가 마침 다 씻었는지 욕실에서 흰 티셔츠에 검은색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야, 나 잠깐 나갔다가 온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며 말하는 걸 보니 편의점이나 다녀오려는 모양.
“오빠.”
“뭐 부탁하게.”
“초콜릿.”
“…….”
젖은 머리를 털던 이은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선제시.”
피곤하게 웃어 보이니 길게 말하지 않아도 매달 겪는 일인지라 의미는 충분히 전달된 듯했다.
이은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설거지 두 번.”
“한 번만 해. 생색 너무 내는 거 아니냐?”
“그래? 그럼 세 번 하고 초콜릿에 약국에서 진통제까지는?”
“진통제까지?”
“어.”
“X나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