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05)
Wise
다음 날.
날이 밝고 김철수 PD와 스태프들 그리고 은호와 은지, 현우와 슬기, 노래에 참여한 오현과 최태현까지.
여럿이 다 같이 부담스러운 스포츠 레깅스 위 형광 반바지 차림의 박 대표의 뒤를 따르며 등산을 시작했다.
어제 내내 이야기했던 촬영지를 가기 위해서였다.
‘Wise’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이동하는 곳은 펜션 뒤편의 산 정상의 암석 지대 위였다.
박 대표와 펜션 뒤편, 긴 산책로를 올라가다 보니 끝자락에 박 대표가 미리 알아봤다던 암석 지대가 보였다.
장비를 들고 가는 있는 스태프가 곧 쓰러질 것처럼 힘들어하기에 은호와 은지는 종종 대신 들어 주며 등산을 이어 갔다.
정상에 도착했을 땐 흙이든 뭐든 관계없이 단체로 뻗어 누웠다.
“아침부터 좋지 않니! 하하!”
“…….”
누워 있는 사람들이 쌩쌩한 박 대표를 다들 신경질적으로 노려봤다.
박 대표는 유일하게 정상의 풍경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다.
화가 난 이유는 바로 어젯밤에 했던 박 대표의 대답 때문이었다.
“촬영지, 산 정상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침부터 너무 힘 빼고 싶지 않은데.”
“에이. 정상이긴 한데, 계단도 다 돼 있어서 안 힘들어. 아침부터 맑은 산 기운 마시고 얼마나 좋아.”
철수 PD의 걱정에 박 대표는 손을 휘저으며 답했었다.
그리고 지금.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더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계단이 굉장히 가파랐을 뿐.
하지만 뭐라 할 기운도 없는 탓에 이내 다들 가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이 고생하면서 올라왔으니 확실하게 뽕은 다 뽑고 갑시다.”
먼저 숨을 가다듬은 철수 PD가 말했다.
다들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 * *
“피부 메이크업을, 첫 커버만 해 놓길 잘했네요…….”
슬기는 왠지 아침에 펜션을 나설 때보다 핼쑥해진 얼굴로 말했다.
은호와 은지의 이마와 코, 턱 주변의 땀을 닦아 내고 지워진 메이크업을 다시 깔끔하게 만들었다.
드레스를 입고 등산은 절대 무리라는 슬기의 판단은 매우 옳았다.
슬기는 챙겨 온 가방을 뒤져 대단히 큰 사이즈의 티셔츠를 탈의실처럼 은지에게 입혔고, 그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은지는 옷을 갈아입었다.
큰 사이즈의 티셔츠를 벗었을 때, 겨우 지친 기운을 달래고 풍경을 감상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은지에게 꽂혔다.
연두색, 하늘색, 회색, 하얀색, 연분홍색, 살구색.
다양한 색으로 그려진 인디언 문양 아래, 수채화 물감으로 칠해 그 색이 퍼지듯 염색된, 하늘거리는 히피풍의 드레스는 색감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을 전했다.
동시에 연분홍색과 살구색 때문인지 봄의 벚꽃이 떠오르는 옷이기도 했다.
협찬으로 들어온 살구색의 샌들마저 옷과 마치 세트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액세서리로는 간단히 귀걸이 정도였지만, 그 귀걸이 역시 로즈 골드 색감을 이용해 옷과의 통일감을 줬다.
“오.”
박 대표가 손뼉을 치며 슬기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이번 곡 이후부터 박 대표의 도움 없이 직접 해 보기로 했는데, 시작부터 이런 결과물이라니.
박 대표는 슬기를 보며 사람 하나는 정말 잘 뽑았다고 생각했다.
“후아!”
옷을 갈아입고 커다란 티셔츠에서 탈출한 은지는 더위에 바람을 느끼기 위해 천천히 암석 지대를 걸었다.
정상에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따라 드레스 자락이 실루엣을 비추며 휘날렸다.
옷의 진가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마침 현우도 비하인드 영상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가져온 터라 은지의 모습을 촬영 중이었다.
하지만 현우의 카메라로는 마음이 다 차질 않는지 슬기는 팬심을 담아 휴대폰을 들어 추가로 이 순간을 촬영했다.
은지의 준비는 끝났고, 다음은 은호의 차례였다.
슬기는 비슷한 느낌의 와이셔츠를 찾을까 했었다.
하지만 막상 제품을 받아 실물로 보니 웬 건달이 떠오르는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건 밝은 청바지였다.
거기에 은지의 드레스랑 비슷한 재질의 하늘하늘하게 휘날리는 펑퍼짐한 와이셔츠.
조합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청 재질의 특징이랄까.
‘갑갑해 보여.’
해방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청바지를 자유분방하게 찢음으로써 해결됐다.
거기에 협찬받은 하늘색 로고가 박힌 흰 운동화까지.
오현은 반팔의 흰 와이셔츠와 하늘색 반바지, 베이지색 로고가 박힌 하늘색의 운동화로.
최태현은 긴 팔의 평범한 흰 셔츠에 탁한 베이지색의 바지와 검은 로고가 박힌 아이보리색 운동화로.
의상 준비는 끝.
남은 건 메이크업이었고, 이 부분은 슬기 혼자서는 힘들었기에 전문가를 찾았다.
청담동 샵 셀라스의 강미주 원장이었다.
많은 상담을 한 결과.
은지에게는 한 듯 안 한 듯 청순한 느낌의 메이크업을.
대신 카메라에서의 부족한 임팩트는 오른쪽 눈가에 삼각 보석을 붙여 신비로운 분위기와 반짝임을 더했다.
은호 역시 은지와 통일감을 주기 위해 은지와는 반대로 왼쪽 눈가에 둥근 보석을 붙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미주 원장은 꼭 손톱까지를 강조했고, 오늘 등산을 출발하기 전.
슬기는 강미주 원장에게 배운 대로 은지의 손톱을 교체했다.
의상과 비슷한 수채화 느낌의 팁이었다.
준비가 끝난 듯, 슬기가 손을 들어 철수 PD에게 신호했다.
신호를 전해 받을 듯, 철수는 손뼉을 치며 외쳤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 * *
뮤직비디오 촬영이 끝난 뒤, 몇 주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E-FAN에는 감춰져 있던 한 기능의 이름이 공개됐다.
[실시간 채팅]
뮤직비디오 및 E-UNG의 다양한 활동 영상이 업로드될 때.
팬들이 함께 수다를 나누며 뮤직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메뉴였다.
[이거 무슨 기능이에요?]
[무슨 기능이에요?]
[와, 이거 뭐야?]
[빛창석 대표님께서 이제 실시간 공개 채팅방까지 직접 만들었나 봐 ㅠㅠㅠ]
[덕질에 팬보다 진심인 대표님ㅋㅋㅋ]
[최고야 짜릿해]
오튜브와 연동되어 조회 수까지 오르는 만큼, 더더욱 만족스러운 기능이었다.
신기능의 공개 이후 며칠 뒤.
의 티저 영상이 여러 사이트와 어플로 동시에 깜짝 발표됐다.
미리 밝힌 거라고는 톡신과 함께 생방송이 있을 예정이라는 이야기뿐이었던 만큼, 갑자기 마주한 티저 영상에 몇몇은 물음표만 띄우며 갈고리를 걸었다.
그중 가장 반응이 뜨거운 곳은 당연히 E-FAN의 어플 채팅방이었다.
채팅창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영상은 오래된 영화관처럼 10초를 세었고, 3, 2, 1.
숫자가 끝난 순간.
[이거 깜짝]
마지막 애매하게 끊어진 채팅을 끝으로 채팅창이 고요해졌다.
모두 화면에 집중한 것 같았다.
시작 화면은 마치 들짐승이 보듯 낮은 높이의 시야로 잔디밭을 파헤치다 풀 한 포기 나기 힘들어 보이는 암석 지대에 도달했다.
그곳 중앙에는 수채화를 뒤집어쓴 것 같은 여자가 등을 돌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껏 바람과 풀과 나무들의 스산한 소리만 나던 영상 속에 느린 심벌 사운드가 이어졌다.
♩♩♩♩
몽환적이지만 무겁진 않은 몽글몽글한 건반이 흐르던 그때였다.
낮은 들짐승의 시야는 재빠르게 여자를 앞질렀다.
여인의 발걸음이 화면을 따라잡은 순간 노래가 멎었다.
화면은 불안할 정도로 느리고 불규칙하게 위를 올려다봤다.
은지의 살벌한 눈빛이 화면을 내려 보듯 마주쳤다.
은지는 가소로운 양 웃으며 입을 열었다.
What are you doing now?
그 순간.
은지가 발을 들어 화면을 부쉈다.
저녁이 곧 내게 인사할 거야
살벌한 은지의 목소리가 스쳐 가고, 깨진 검은 화면과 함께 다정한 은호의 노래가 이어졌다.
노래는 계속되지 않았다.
곧 나타난 화면은 입술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수채화가 물든 것 같은 검지 손톱이 조용히 입술을 눌러 찍으며 말했다.
쉿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서서히 검게 사라지는 화면 속.
익숙한 E-UNG의 로고가 붓질하듯 그려지더니, 뮤직비디오가 공개될 날짜를 알렸다.
[내가 뭘 본 거야?]
[♥♥ 우리 지지]
[♥♥ 이뻐]
[뭐야 이거 욕하면 하트로 나와요?]
[어? 그래요? ♥♥♥♥! 진짜네]
[말이 안 나와 너무 좋아 이거 뮤비로 나오는 거였어?]
[지지라면 이렇게 봐 주는 거 좋을지도……?]
[위에 선생님 진정해 주세요]
[위험한 취향인데]
[설레 미칠 거 같은데]
[이거 오튜브 가면 다시 볼 수 있죠?]
[네 지금 떠 있어요!]
[잠깐만 나 이거 이제 알았는데!!]
[헐 ♥♥다. 이거 그날이잖아!!!]
* * *
[[MV]E-UNG - Wise(현명한)]
채팅창의 진가는 뮤직비디오가 공개되던 날 제대로 활용됐다.
[10]
[9]
[9]
[8]
[888]
[6]
[7]
[66]
팬들끼리 곧 영상이 시작됨을 알리는 10초를 다 같이 세며 숫자만으로 설레는 기분을 공유했다.
[곧 한다]
[시작한다]
[♥♥ 설렌다]
[심장 멎을 거 같앙아아아아]
[2]
[2]
[1]
1초가 남은 그땐, 채팅창에 수십 명이 동시에 숫자 1을 쳤다.
인터넷 문제인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친 건지…….
영상이 시작되고 난 뒤에서도 1은 계속 올라왔다.
공개되는 화면은 회사 사옥에 만들어진 간이 스튜디오에서 은호와 은지 외, 톡신 멤버들도 함께 자리해서 시청하고 있었다.
뮤직비디오 공개가 끝난 뒤에는, 이어서 약속했던 톡신과 E-UNG의 생방송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니까.
* * *
[쥐?]
[햄스터?]
[귀여워]
[헝 뽀짝해]
앞서 티저 영상과는 다르게 귀여운 애니메이션으로 뮤직비디오가 시작됐다.
예상치 못한 애니메이션 형식의 시작에 팬들이 제각각 반응을 보였다.
철창 안의 새하얀 소동물은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자 겁을 먹었다.
다가온 손에 소동물이 붙잡혔다.
어딘가에 던져졌을 때, 소동물이 눈을 뜬 곳은 티저에서 봤던 풀숲이었다.
소동물이 눈을 감았다 뜨는 영상 효과 다음, 애니메이션이었던 화면이 현실로 바뀌었다.
다시 이어진 화면은 티저에서 봤던 그 풍경이었다.
소동물의 시야 높이.
높은 잔디를 빠르게 헤치고 돌아다니는 동안, 소동물의 일정한 걸음 소리처럼 잔잔하고 일정한 심벌 리듬과 함께 부드러운 분위기의 윌리저 건반이 연주됐다.
그러다 마주한 여인.
은지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치기 전까지.
드이이익―
은지의 날 선 눈길이 화면에 담긴 그때.
무언가 뒤틀린 음을 시작으로 808 베이스가 심장처럼 두근거렸다.
은지는 소동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화면이 바뀌었다.
조금 전 화면과 다르게 은지는 오현과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울타리와 그네 의자에 사이좋게 앉아 있던 은지와 오현.
벌스가 시작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은지가 큰 소리를 내는 듯 목에 핏대를 세웠다.
입 모양은 반전으로 노래 가사에 맞춰져 있었다.
오현은 고개를 들어 다른 누군가를 바라봤다.
오현은 그쪽을 향해 검지를 뻗었고, 마치 지나간 그 사람과 은지를 비교하듯 손가락질을 하며 쏘아 뱉었다.
의미 없이 던진 한마디가 줄이 되어 그를 얽매어
이 한마디가 네 숨통을 죌까 언젠간 내 목을 죌까
은지는 그런 오현을 분명 웃으며 보고 있긴 했지만, 눈빛에는 지쳐 있는 기분이 드러나 보였다.
웃으며 네가 날리는 비수가 두려워서 나는 웃어
울기를 바랄 너를 위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오현은 은지가 불편해 미치겠다는 듯, 머리를 헤치며 자리를 떠났다.
은지는 오현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억지로 웃던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은지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보고 화면이 은지의 시선을 따라 내려오자 그곳에 은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