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98)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빠르게 은지가 한곳에 모아 뒀던 물건들과 옷을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트렁크는 꽉 차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이제 더 들어갈 곳이 없었다.
“야, 꽉 찼는데? 여기서 더 넣으면 지퍼 안 잠겨.”
그때, 짜고 맞춘 듯 은지와 슬기는 황당한 눈으로 은호를 돌아봤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예요.”
“아니, 슬기 씨까지……. 진짜로. 이거 안 잠긴다니까요? 저거 봐. 가방 터질 거 같은 거 안 보여?”
슬기와 은지는 은호가 챙긴 가방을 돌아봤다.
“안 터졌잖아.”
“맞아. 안 터졌잖아요.”
허어?
은지와 슬기가 정색하자, 은호는 오히려 당황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게 된다고?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더 넣으려고…….
은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러나, 한 걸음 물러나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
“언니, 준비됐죠?”
“제가 잠글까요?”
“오케이.”
드디어 다 챙긴 모양이다.
트렁크 위로 분명 가방 용량을 족히 넘어 보이는 옷 산이 쌓여 있었다.
‘저걸 어떻게 닫는다고.’
은호가 될 리가 없다며 헛웃음을 터뜨리고 있던 그때였다.
갑자기 은지와 슬기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호는 황당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뭔…….”
트렁크는 마치 아주 푸짐한 미국 핫도그처럼 벌어져 있다.
은지는 전장에 나가는 영웅처럼 ‘후우!’ 크게 심호흡을 뱉더니 별안간 핫도그처럼 벌어진 트렁크 위에 무게를 실었다.
“언니! 지금이에요!”
“네!”
굉장히 전투적인 분위기였다.
벌어진 넓이가 아주 미세하게 줄어든 틈을 타, 슬기가 재빠르게 나노 단위로 지퍼를 잠갔다.
아니, 진심으로 저게 닫힐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은호의 생각을 무시하듯 가방의 지퍼는 나노 단위이긴 했지만 아주 천천히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 기점을 넘어선 순간.
지이이익―.
황당할 정도로 지퍼가 손쉽게 잠겼다.
둘은 큰일을 치른 듯 바닥에 널브러져서 ‘휴’ 시원한 숨을 내뱉었다.
‘이게 된다고?’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잠긴 트렁크의 단단한 겉면이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내부는 진공 상태나 다름없을 것 같은 압축률이었다.
처음 두 사람이 말했던 대로 어쨌든 닫히긴 닫혔으니 할 말이 없다.
“미친.”
호기심에 트렁크를 들어 본 순간, 기겁했다.
같은 디자인의 내 트렁크보다 족히 수십 배는 나가는 무게.
트렁크에 벽돌은 넣어 둔 게 아니고서야 나오지 않을, 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무게였다.
“근데 이렇게 많이 챙겨 갈 거면 그냥 가방 몇 개를 더 꺼내서 나눠서 들고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이해가 안 돼서 은지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겁고 힘들잖아.”
대답이 더 황당했다.
은지 대답에 아찔해진 듯, 은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그냥 고개를 저었다.
이 와중에 은지 말에 공감한 듯 슬기는 웃음을 터뜨리다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예. 뭐, 그러, 어. 그래…….”
은호는 이해를 포기하기로 했다.
“얼른 준비했으면 내려가자. 형님 걱정하시겠다.”
“예―!”
방금까지 힘들어 뻗어 있던 애가 벌떡 일어나며 만세를 불렀다.
“여행 신난다!”
은지는 가방보다도 먼저 챙겨 뒀던 모자를 챙겨 쓰고 1층으로 향했다.
트렁크가 한 번씩 계단을 찍을 때마다 바닥에 금이라도 가는 것 같은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은호는 미리 준비했던 만큼 이미 차에 실어 뒀던 터라 편안하게 빈손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이리 주세요. 제가 뒤에 싣겠습니다.”
“와! 감사합니다!”
은지가 끙끙거리면서 트렁크를 끌고 다가오자, 현우는 그 모습을 귀엽게 보며 손을 내밀었다.
‘형, 상상하고 있는 그 무게가 아니에요.’
미리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쳤고.
‘……?’
형님은 은지의 짐을 받아 든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것 같았다.
분명 똑같은 친절한 웃음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형님의 등 뒤로 수많은 물음표가 보이는 것 같은, 의문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거 도XX몽 주머니거든요.”
은호가 뒤이어 설명을 덧붙였지만, 현우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무게인 듯 혼란스러워 보였다.
잠깐의 소란스러움이 지나고, 현우 옆에는 슬기가 앉고 뒷자리에는 늘 그랬듯 은지와 은호가 올랐다.
내비게이션은 빠른 길을 추천했음에도 270km가 넘었다.
이동 시간만 해도 3시간을 족히 넘기는 먼 장소.
벌써부터 가는 길이 피곤할 것이 예상되는지 현우는 한숨을 뱉으며 옆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을 돌아봤다.
“출발할게요.”
“네!”
은지가 안전띠를 매며 신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프다고 외쳐 봐야 들어 주지 않아
내 한 몸 불 질러 불꽃이 피어올라
출발한 지 약 1시간.
원하면 보여 줄게 다 알지 난
은지의 넓은 스펙트럼과 다양한 재생 목록 덕분에 지루한 먼 길임에도 불구하고 귀만큼은 즐거웠다.
거기에 더해진 은지의 흥얼거림과 종종 얹어지는 은호의 코러스까지.
진작부터 이응의 팬이었던 슬기와 현우에게는 콘서트 1열이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3시간은 길었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은호와 은지는 언젠가부터 잠들었다.
심지어 처음엔 3시간 조금 넘던 도착 시간이 어느새 4시간으로.
게다가 고속도로에 사고가 난 건지, 길이 막히자 안 그래도 4시간이었던 시간은 5시간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늘어났다.
휴게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현우는 운전 내내 커피 석 잔을 몽땅 들이켜 버린 탓에 꽉 찬 방광 때문이라도 휴게소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휴게소에 도착 후, 현우는 매우 급했는지 차에서 내린 즉시 화장실로 달려갔다.
“은지 님, 은호 님.”
은호는 이름만 불러도 움찔하며 눈을 떴다.
슬기는 손을 뻗어 은지를 흔들어 깨웠다.
백미러로 은호가 깨어난 걸 확인한 슬기는 은지를 보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가 잠시 흠칫했다.
“와. 언제 봐도 신기하네.”
언제나 그렇듯 눈을 까뒤집고 잠든 은지의 모습.
은호가 중얼거린 말에 슬기도 공감했다.
“은, 은지 님.”
“컹, 허. 늄으.”
일단 은지가 한국어를 하는 건 아닌 게 확실했다.
몇 번을 더 흔들어 봤음에도 은지는 전혀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다녀오시려고요?”
“네. 저도 화장실 갔다가 먹을 거라도 조금 사 올까 하는데…….
은호가 묻자, 슬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은지는 제가 보고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오시는 길에 소시지 하나만 사 와 주세요.”
“네.”
슬기는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기가 차에서 내린 뒤, 은호는 버릇처럼 E-FAN 어플에 접속했다.
―닉네임: 밍크는 귀여워
[저 오늘 학교 가다가 엄청 우울하고 그랬는데, 버스에서 라디오 듣는데 라스트 데이 나온 거 있죠!
역시 지지님이랑 랑이님은 제 인생에 선물 같아요 ㅠㅠㅠ
그래서 얼른 ㅠㅠㅠㅠ 보고 싶어요.
곧 신곡이랑 같이 오실 거죠? ㅠㅠ 혹시 오늘은 뭐 하고 계신가요?]
E-FAN 어플이 생기고 시간이 좀 흘러서일까.
굿즈가 아직임에도 EG 포인트를 모은 팬들이 상당한지, 요즘 은호는 E%에게 온 메시지에 답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었다.
[오늘 촬영 때문에 경북 내려가고 있어요.
우리 노래가 밍크 님한테 위로가 되었다니 ㅎㅎ
오히려 제가 행복해지는 이야기네요.
곧 톡신 선배님들과 좋은 신곡 들고 얼른 다시 만나러 갈게요.
그동안 밍크 님 우울해하지 말고 행복한 생각만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다음엔 웃으면서 다시 만나요. 알겠죠?]
팬분께 답을 하고 나니 어느새 차로 다가오는 슬기가 창밖으로 보였다.
돌아오는 슬기의 손에는 휴게소 통감자와 은호가 부탁한 소시지 하나와 핫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오는 길에 만난 건지, 옆에는 현우가 함께였다.
현우의 손에는 남은 시간을 위한 새 포션인 듯 커피 한 잔이 또 쥐어져 있었다.
달칵.
문을 열고 두 사람은 제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올랐다.
“은지 님은 아직 주무시나요?”
“그런 거 같아요.”
부스럭.
은호가 소시지를 받고 있던 중, 옆을 돌아보고 잠시 흠칫했다.
은지는 냄새에 이끌려 깬 듯―여전히 몽롱한 상태이긴 했지만― 소시지를 받는 은호의 손을 빤히 보고 있었다.
“드릴까요?”
“…….”
그 모습을 귀엽게 보던 슬기가 웃으며 물었다.
눈도 똑바로 못 뜨면서 핫바는 먹고 싶었는지 은지는 ‘끄덕끄덕’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맛있냐.”
“……응.”
“너 영상 찍어도 되냐.”
“맘대로 해.”
허락을 받고 나서야 은호는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었다.
은지는 눈을 감은 채 입을 ‘냠얌’ 바쁘게 움직였다.
은호는 제 손에 소시지를 먹어야 하는 것도 잊고서 졸면서 먹는 은지를 구경했다.
“대표님한테 보내야지.”
“……웅.”
놀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잠이 덜 깨긴 한 듯 은지는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평소 몰던 제X시스와는 다른 벤X 세단.
은호네보다 조금 더 늦게 같은 휴게소에 멈춰 선 박 대표는 검은색 고가의 세단에서 내리며 숨을 내쉬었다.
박 대표는 딱히 재산을 자랑하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특별히 오늘은 이렇게까지 눈에 띄는 고가의 차를 끌고 나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애들 잘 지냈고, 잘 자랐다고 보여 드려야 하니까.’
말을 하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하실 수 있도록.
다만 아무리 좋은 차라도 오래 타면 지치는 건 매한가지였다.
“팀장님!”
“대표라고 부르라니까. 관둔 지가 언젠데.”
“그럼 형님!”
옆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수상한 차림의 주송민과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철저하게 가린 오현이 있었다.
“……마음대로 해라, 그냥.”
박 대표의 투덜거림에 두 사람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주제를 돌렸다.
“승연이가 뭐 안 드실 거냐고 물어보고 오래요.”
“전화로 하면 되잖아.”
“전화를 안 받는다고 뭐라 하던데요.”
“아, 휴대폰. 참.”
박 대표는 톤 다운된 진한 베이지색의 세미 정장 차림이었다.
밝은 그레이 셔츠와 꽤 잘 어울리는 차림이긴 했지만, 운전할 때는 아무래도 불편해서 재킷은 뒷자리에 걸어 둔 차였다.
‘안주머니에 넣어 놨나.’
박 대표는 뒤늦게 뒷좌석을 열어, 옷걸이에 걸려있는 재킷을 뒤적였다.
예상한 그대로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나왔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서승연한테 온 전화만 세 통.
그리고 은호한테 도착한 짧은 영상 하나.
‘무슨 일이라도 있나.’
박 대표는 걱정하며 급하게 영상을 확인했다.
하하하하!
걱정과 함께 영상을 확인한 박 대표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휴대폰을 보더니 갑자기 웃는 박 대표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오현과 송민.
두 사람은 목을 뻗으며 박 대표가 보던 영상을 보려 했다.
“어허! 안 돼.”
“은지 양 아니에요? 무슨 영상인데요?”
“니들은 몰라도 돼. 내 새끼 일이야.”
“와, 너무하시네! 언젠 우리보고 자식 같다 했으면서!”
“자식 ‘같다’였지. 자식은 얘들이지. 게다가 너희는 징글징글할 정도로 다 컸잖아. 그리고 얘들은 정말로 내가 다 키운 내 새끼들인데 어디다 비교해, 이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