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94)
해가 떠 있을 때 회사에 간 것 같은데 집으로 가는 길은 날이 벌써 어둑해진 저녁이었다.
내 머리 위 춤추는 Three monkeys
What are you doing now?
저녁이 곧 내게 인사할 거야
은지는 를 흥얼거리며 은호보다 두 걸음 앞선 채 골목을 걸었다.
가로등이 고장 난 탓에 어둑한 골목.
막 끝난 생방송의 설렘이 여전히 남았는지 오늘따라 은지는 평소와 다르게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앞서 걷던 은지가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봤다.
어지간히 좋은지 입꼬리가 내려오질 않는 표정이다.
“일인데 신나게 놀고 온 것 같다.”
“그러게.”
“응원봉 기대돼.”
은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 맞아. 이은호.”
“왜.”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어.”
“물지마. 아파.”
“뭔 소리야?”
“못 알아들었으면 말고.”
은지는 미간을 구기며 갸웃거렸다.
실패한 개그는 설명하면 더 추해지는 법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은호는 모른 척 고장 난 가로등으로 눈을 돌렸다.
“아. 와―.”
뒤늦게 은지가 이해한 듯 충격 받은 얼굴로 은호를 노려봤다.
“말하던 거나 얼른 해. 뭐 물어보려고.”
제 발 저린 은호는 급하게 주제를 돌리며 되물었다.
“어, 음. 아까 방송에서, 옛날에, 이걸 옛날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어, 지금보다 미래에!”
“회귀 전에. 아, 마침 잘됐다.”
“엉?”
“남들이 들으면 이상할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어디서 그때 이야기할 거면 ‘그 시절’이라고 해.”
“오, 알겠어. 회귀 전에! 아니, 너 ‘그 시절’에 여자 친구 있었지?”
“어.”
은호는 이젠 호칭을 팔아먹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도 지쳤는지 무시하며 대답했다.
심지어 돌아온 주제도 그다지 반가운 주제는 아닌 듯 은호는 성의 없이 답하며 은지를 앞서 걸었다.
은지는 급하게 은호의 속도를 따라붙으며 쫓아왔다.
“그 사람 있잖아.”
“없어.”
“아! 말장난하지 말고!”
“뭐, 무시하고 말하면 되잖아.”
“아, 그러네. 아무튼 그 사람. 그때 이은호 너 여자 친구가 혹시, 에이슬 씨였어?”
은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은지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며 은호를 빤히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온 건데.”
“어? 아니야?”
대답할까 말까.
은호는 빤히 자신을 보는 은지를 똑같이 노려보며 잠시 고민했다.
‘말을 안 하자니 이름까지 나온 마당에, 뭔가 느낌이 오는 곳이 있으니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감추기가 애매하고, 무엇보다 거짓말로 인해 귀찮아지는 일이 싫다.
판단을 내린 듯 은호는 한숨을 뱉으며 대답했다.
“맞아.”
“와, 대박.”
은지는 입까지 틀어막으며 화들짝 놀랐다.
“넌 어쩌다가 에이슬인 거 알았는데.”
“음, 감?”
“X랄 하지 말고.”
“진짠데. 지금까지 우리가 데뷔 후에 마주친 다른 연예인들이 없진 않았잖아.”
“그랬지.”
“근데 거기서 이은호 씨께서 유일하게 반응한 여자가 에이슬 씨뿐이었잖아요?”
“……그랬나?”
“예. 그러셨어.”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땐 이미 몇 걸음 기숙사까지 몇 걸음 남지 않았을 때였다.
“왜 헤어졌어?”
“그게 왜 궁금하냐.”
“오, 헤어진 건 맞나 보네.”
“왜 헤어졌다는 결론부터 나온 거냐고 물은 거잖아.”
“뻔하지.”
“왜 뻔한데?”
젠장.
잘 피해 보려던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 은지가 거는 덫에 보기 좋게 걸려드는 기분이었다.
“나쁜 놈이네 뭐네 할 정도면 헤어질 때 욕이라도 뒤지게 얻어 처먹었으니까 그러는 말 아니야?”
“뒤지게 얻어 처먹다니, 말을 해도 꼭. 넌 꼭 쓸데없는 거에만 촉이. 에휴, 됐다.”
은호는 혀를 차며 먼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나한테는 쓸데없지 않은데. 진짜 그냥 아닐까 싶어서 찍어 봤는데 항상 맞은 거지.”
“찍은……. 망할. 그냥 모른 척할걸.”
“이미 말했잖아.”
은지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그 표정이 괜스레 짜증 나는지 은호는 은지가 들이미는 얼굴을 밀어낸 뒤 주머니에서 현관 열쇠를 꺼내 들었다.
“말 안 해 줘?”
“뭐를.”
“에이슬 씨랑 어떻게 만났는지, 아, 아니야.”
은지의 안색이 잠깐 파랗게 질렸다.
호적 메이트의 썸이라니, 어우.
“그건 역겨울 거 같다. 안 들을래.”
그건 아무리 궁금해도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은호는 열쇠를 밀어 넣다 황당한 눈을 은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사자는 해 줄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처마시기는.”
“만난 건 안 궁금하니까 왜 헤어졌는지 알려 줘!”
“싫어.”
“궁금한데. 여기까지 들켰으면 말해 주는 게 매너 아니냐?”
“어. 아닌데.”
“아, 말해 줘!”
“…….”
은호는 떼쓰는 은지를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알루미늄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런 은호를 가만히 보던 은지는 깊은 숨을 들이켜더니 소리쳤다.
“알려 줘어어어!”
“동네 울려, 미친 X아!”
은호가 당황한 얼굴로 휙 고개를 돌리자, 은지는 이 반응을 노린 듯 희미하게 입을 비죽이며 다시 한 번 ‘흐업’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알렵―!”
“알았어! 하. 씨.”
조금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소리를 내지르려던 그때였다.
은호는 시끄러운 입을 대충 손으로 막아 버리며 짜증을 섞어 소리쳤다.
“말해 줄 테니까 X쳐! 좀! 동네에 쪽팔리니까!”
“응. 이제 말해.”
“하아…….”
히죽거리며 얌전히 대답하는 은지를 황당하게 바라보다 은호는 이마를 짚으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흘렸다.
“왜 헤어졌어?”
“그냥 다 똑같은 이유지. 뭘 그런 걸 물어봐.”
“참는 건 잘하는 이은호가 남들이랑 똑같은 이유로 헤어진 건 아닌 거 같아서 그러지.”
전 여자 친구로 에이슬을 찍은 게 온전히 느낌 때문은 아니었는지 은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그 표정을 찝찝하게 노려보던 은호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머리를 대충 흐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연애랑 안 맞기도 했고, 걔가 집착이 심한 건지 호기심이 많은 건지, 너무 많은 걸 알았어.”
“우리에 대해서?”
“어.”
“어디까지 알았는데?”
“광어.”
뜬금없는 생선 이름에 은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이내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은지는 어떤 의미인지 이해한 듯했다.
“혹시 나 때문―.”
“또, 또 X랄.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야.”
“그래도!”
“그래도는 X랄. 방송에서도 말했듯이 누구 만날 생각 없어.”
“그래도.”
“‘그래도’ 그만해라. 광어 때나 지금이나 넌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 그만하고 벌레랑 동침하기 싫으면 빨리 들어오기나 해. 빡 대가리야.”
은호는 신발을 대충 벗으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은지는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아무런 말도 못 꺼낸 채 조용히 문을 닫았다.
쾅.
문에서 난 불편한 소음은 문이 닫히면서 함께 잠잠해졌다.
* * *
지나간
회귀를 이야기하기 훨씬 오래전.
빵집 아저씨를 만난 그 시기.
아저씨는 경계심을 풀게 만든 뒤,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했고. 앞으로 우리가 지낼 곳이라는 곳으로 가기 전.
우린 아저씨와 이별을 준비했다.
어른들이 언뜻 후견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듣긴 했지만 곧 가게를 정리해야 했던 아저씨 사정을 알기에 나는 말을 아꼈다.
“은호는 어른들 말 잘 듣는 것 정도는 잘 하니까 걱정이 없는데…….”
“걱정 마세요.”
“은지가 걱정이지. 거기서 제발 싸우지 말고 잘 지내거라.”
“싫어! 싫다고! 왜! 내가 말 안 들어서 그래? 이은호랑도 안 싸울게!”
“은지야, 때때로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이별도 있어. 건강하게 은호 말 잘 듣고.”
이은지는 울었다.
가기 싫다고 울었지만, 내가 간다고 하자 결국엔 이은지는 나를 따라왔다.
치료가 필요하다 해서 치료를 받았고, 이후로도 몇 번이나 다른 곳으로 옮겨 다녔다.
이동한 곳에서 문제가 터져서 또는 입에 올리기 민망한 일로 다른 곳에 가게 된 적도 있었다.
나야 기분이 나빠도 웃을 수 있었지만, 문제가 됐던 건 은지의 성격이었다.
은지는 기분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사람을 경계하는 걸 감추지 못하고 사나운 편이었다.
난 이은지처럼은 안 되려고 했지만 ‘너무 말을 잘 들어서 소름 돋는다’라던가.
흔히 애치고 ‘싹수가 없다’, ‘귀여운 맛이 없다’는 등등 그런 말을 듣긴 했었다.
그래도 괜찮았던 건, 우린 빵집 아저씨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잖은 위협도, 동정도 무시했었고 사람에게 기대라는 것 자체를 안 했던 덕분에 오히려 힘든 게 없었다.
여러 곳을 옮겨 다니던 중 가장 마지막에 도달한 곳은 한 성당에 딸린 보육원이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빵집 아저씨와 인연이 있다는 한 수녀님을 만났고, 수녀님은 아저씨한테 우리 소식을 전했다.
다만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저씨는 우리와 다시 만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대신 기부금과 함께 수녀님께 ‘힘들게 살아온 아이들이니 부디 잘 부탁한다’라며…….
우리에게는 ‘꼭 행복해져라’라는 짧은 인사만 수녀님을 통해 전해 주셨을 뿐이었다.
수녀님께서 계신 그곳에서 우리는 중학교까지의 시간을 보냈다.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우리를 무시하는 애들이 많았으니까.
다만 다행이라면 직접 손을 대는 놈들은 없었다.
이은지는 또래 아이들보다 항상 머리 하나가 더 있었다.
큰 키와 벌어진 어깨도 이유 중 하나이긴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 성질머리였다.
‘광견병 걸린 개처럼 아무나 가리지 않고 일단 으르렁거렸으니…….’
물리고 싶지 않다면 오히려 다른 녀석들이 피해야 하던 시기.
시간이 흘러, 나는 중학생이 됐다.
내가 나보다 컸던 이은지를 넘어 조금 더 커진 그 무렵.
여전히 외톨이였지만 학교생활까지는 무난했었다.
귀찮은 녀석이 들러붙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오, 그거 멘솔?”
“니 거 하나 내놔. 그럼 줌.”
“오케이.”
학교에 일진 무리는 흔히 있다.
녀석들은 종종 부릴 만한 만만한 녀석들을 찾아다녔다.
“야.”
여섯이서 옹기종기 화장실에 모여 담배를 피우던 놈들이 있었다.
난 조용히 화장실이나 쓰고 나가려고 했는데 학교에서 소문만 일진이었던 조광수가 날 불렀다.
“너 밖에서 망 좀 봐라.”
“나?”
“어. 말도 못 알아먹는 X신인가, X발. 나가서 망보라고.”
난 놈들 말대로 밖으로 나갔다.
“하여간 X신 새끼들은 욕을 처먹어야 말을 잘 듣지.”
화장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런 말을 듣긴 한 것 같은데…….
조광수가 중얼거리던 말은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내가 밖으로 나온 건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으니까.
모르는 건지, 봐주는 건지.
조광수와 그 무리들은 운이 좋았는지 안타깝게도 그날 선생님께 걸리지 않았다.
담배 냄새가 이렇게 풀풀 나는데 걸리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야, 걸베이 X끼. 눈치껏 잘 빠졌더라?”
난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그 녀석은 뜬금없이 날 더러 잘했다며 칭찬했다.
조광수가 나를 찾아오기 시작한 건 그날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