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71)
“그게 아니라 노트에 영어 없는 가사 있잖아.”
“어. 그거 왜.”
“몇 번 곡 가사야?”
“8번? 일걸?”
“8번이면 8번이지 ‘일걸?’은 또 뭔데?”
“니가 좀 많이 찍어 내야지. 나도 헷갈려. 아무튼 되게 따뜻한 느낌인 곡이었어.”
“아, 뭔지 알겠다.”
이은호는 다시 노트에 집중한 것 같았다.
나도 눈을 돌리며 휴대폰 속 8번 트랙을 재생하려던 그때,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주머니를 뒤졌다.
‘아.’
한참을 뒤적이는데, 어라, 없다?
대표님이 작업할 때 쓰라며 이은호와 나한테 선물해 주신 새까만 이어폰이 없다.
‘이어폰 방에 놓고 나온 건가?’
은지는 천천히 은호 귀에 꽂힌 검은 이어폰을 빤히 바라봤다.
“오빠.”
“안 돼.”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어폰을 끼고 있긴 했지만 목소리는 잘 들리는 모양.
“니가 곱게 오빠라고 부르는 X이 아니잖아. 또 뭘 원하는데.”
“…….”
은지는 할 말이 없었다.
뭘 원해서 부른 건 맞으니까.
‘평소에는 오빠 취급하기 너무 싫은데…….’
희한하게 꼭 뭔가 얻을 게 있을 땐 본능인지 손쉽게 입에 착 붙었다.
“이번엔 뭐.”
이은호가 신경질적으로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 이어폰―.”
“싫어.”
말이 끝나기도 전인데 잘려 버렸다.
“아, 잠깐만. 어? 한 곡만 듣고 줄게.”
“싫어.”
“아―. 제발.”
“싫―어.”
“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짜증과 앙탈이 뒤섞인 소리가 터진 그때.
흠칫.
이은호가 굳은 얼굴로 이쪽을 돌아봤다.
딱히 무서운 표정은 아닌데 왠지 평소 미간을 구기던 것보다 살벌했다.
고요해진 그때, 분위기를 느낀 걸까.
“제 거라도 드릴 테니까 쓰실래요?”
“아, 감사합니다.”
신호가 걸린 타이밍에 매니저 오빠가 조용히 하얀 이어폰을 내밀며 말했다.
이어폰을 받아 든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덧붙였다.
화난 이은호는 문제가 해결되자 다시 노트에 몰두하는 것 같았다.
♩♭♬♬♪
이은호 눈치를 살피다 분위기가 잠잠해질 즘이었다.
이어폰 세팅을 마치고 난 이은호가 말했던 8번 곡을 재생했다.
귀를 사로잡은, 새소리를 왜곡시켜서 만들어 낸 인트로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익숙한 멜로디에 눈을 감았다.
빈티지한 어쿠스틱 피아노 연주가 듣기 좋은 음색을 꾸며 내며 귀를 간질였다.
막 깨어난 숲속의 아침을 떠올릴 신비한 분위기의 곡이었다.
하지만 반전은 이 곡을 떠올리고 만들던 당시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것도 숲속은커녕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보인 어두컴컴한 골목 끝자락에 걸린 달을 보다 뚝딱 만든 곡이었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이은호가 쓴 가사를 직접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은호의 노트 속 표식은 누구든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세세하게 표식이 남겨져 있었다.
상상만 하는 건 왠지 아쉬운 마음에 직접 가사를 입에 올려 불러 봤다.
있잖아
너에게 항상 말했어
우리에게도 아침이 올 거라 믿자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있어
와.
저 냉랭한 인간이 썼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감성이 가득한 문장들이다.
내가 상상하던 곡의 분위기에도 잘 젖어 들었고, 결정된 ‘시간’이라는 주제 또한 벗어나지 않았다.
솔직히 가사는 진심으로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은호의 가사들은 다양한 상상의 가지로 뻗어 갈 수 있었다.
때로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때로는 마치 사랑 노래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때로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가사인 것 같기도 했다.
다만 그만큼 몽환적이었다.
반면, 내가 만든 멜로디는 가사의 느낌처럼 느리고 신비롭지만은 않았다.
비교하자면 마치 재즈처럼 율동적으로 놀며 때로는 힙합풍을 띠며 싱잉 랩 같은 곳들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난 그 부분들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네가 떠나기 전 거기에 멈춰서
나는 이 그림자에 해가 떠오르길 빌어
가라앉아 푸르러진 너의 하늘에도 해가 들―
여기에 바이올린을 추가해야겠다.
아니, 아코디언이 더 좋을까?
이어지는 노래를 부르다 은지는 메모를 위해 잠시 멈췄다.
피아노 연주만으로도 감정은 충분했지만, 왠지 울음소리 같은 느낌을 넣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은지가 메모하는 그사이.
은호와 현우는 아쉬운 마음에 힐끔 노래를 멈춘 은지를 바라봤다.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메모를 마친 은지는 이미 지나친 곳은 아쉬움 없이 지나치며 노래를 계속 이어 갔다.
후회라는 것을 배우기엔 시간이 모자라
보일 게 더 많아
내가 가졌던 시간에 배워 온 것들이 많으니
노래 내내 이은호의 기술이라고 해야 할까.
신기할 정도로 이은호는 중간중간 일부러 박자를 엇박자로 쪼개 가사를 잘 욱여넣었다.
그런 덕분에 분명 멜로디가 반복되는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은호의 가사는 마치 다른 멜로디처럼 느껴지게 만든 곳이 많았다.
이젠 떨어지지 말자
쉽게 올리기엔 이 무게를 알기에 말하지 않아
함께 할 게 더 오래
후회라는 것을 배웠기에 시간이 모자라
아낄 게 더 많이
다시 시작한 시간에 함께할 것들이 많으니
노래는 어느새 돌아온 2절의 훅이었다.
아, 제대로 된 무대에서, 내 마이크를 쥐고, 내 팬들의 함성을 들으면서…….
노래하고 싶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어릴 때나 지금이나 이은호는 역시 나한테 미운 뮤즈인 건 여전했다.
듀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우리의 노래를 세상에 발표하고 싶어졌다.
여러 의미로 갈증이 느껴지는 가사였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들일까.
이 가사를 쓸 때 이은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썼을까.
이은호가 이 가사를 쓸 때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그걸 알아내서 곡으로 만들어 내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파고들고 싶은 욕심은 현실인지 아닌지 구별되지 않던, 아침에 차에서 꿨던 생생한 꿈 때문이었다.
* * *
꿈속에서의 나는 이은호를 쫓았었다.
그때의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렀다.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하지만 그때의 기억들은 온전히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었다.
이건 다시 눈을 뜨기 전, 검은 고양이의 비명을 듣기 전의 이야기다.
꿈속에서의 이은호는 지금의 이은호랑 다른 분위기였다.
항상 어두웠고 지쳐 있었지만 동시에 항상 모든 일에 열심히였다.
지켜보는 내가 걱정될 정도로.
너무 과하게.
그리고 그런 이은호는 곧 무대를 앞뒀을 때나 술에 취했을 때마다 항상 검은 노트를 읽었다.
겉표지의 색은 지금의 것과 비교하면 많이 바랬는데, 표지에 그려진 ‘凸’을 보면 내 일기장이었다.
「나보고는 살라고 했으면서 왜 너는 뒤졌냐, 이은지.」
정말 많이 힘들어 보일 때면 이은호는 종종 내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X발.」
항상 그러고 나면 꼭 나한테 말을 걸고 있는 자기가 우스운지 욕을 하며 얼굴을 숨겼다.
우는 것 같았다.
‘무슨 내용이길래 저렇게 매일 읽냐.’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루는 궁금증을 못 이기고 이은호가 잠들었을 때 다가가서 내 일기를 읽어 봤다.
이은호가 읽은 페이지는 지금의 나는 아직 쓰지 않은 페이지였다.
「퇴근 후에 현관을 열었을 때 깜짝 놀랐어.
오빠가 신발도 안 벗은 채로 문 앞에 쓰러져 있었거든.
처음엔 술이라도 먹었나 싶어서 방에 가서 자라고 발로 찼는데…
음;;
지금 생각하니까 미안하다.
오빠는 움직이지를 않았고 나는 급하게 오빠 매니저를 불렀어.
도진이라고 안경 쓰고 좀 깐깐해 보이는 매니저 오빠 있어.
아무튼 그 오빠가 1층에 있었는지 전화를 끊자마자 올라왔어.
이은호는 매니저 오빠가 업어서 곧장 병원으로 갔는데….
나중에 우리 매니저 오빠 말로는 이은호가 생각보다 상태가 심했었나 봐.
열은 39도에 며칠 내내 잠도 똑바로 안 자고 작업을 했는지 균형이 다 무너져서 내장에 신경성으로 일어날 만한 병은 다 터졌대.
좀 느긋하게 해도 될 텐데….
혹시 나 때문인가 싶어서 좀, 미안할 건 없는데 미안하네.」
그날의 일기는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이은호는 여전히 병원이었는지 내용이 연결되어 있었다.
「음.
이은호가 진짜 많이 안 좋나 봐.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병원에 있어.
많이…. 안 좋은가 보다….」
나는 보통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을 때 일기를 쓰는데, 이은호가 아픈 날.
특히 새벽 감성이 더해지면서 아무래도 걱정이 많이 커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날 하루에 두 번이나 일기를 썼다.
「만일 이은호나 나나 둘 중에 한쪽이 세상을 떠난다면 어떡하지.
우린 항상 같이 있었는데….
이은호 개나쁜 새끼.
그때 이후로 안 떨어지겠다고 했으면서 아파서 집구석에도 안 들어오고.
빨리 와. 나쁜 새끼야. 약속은 지켜야지.
얼른 와라. 오빠. 내가 죽어도 너는 살아야지. 망할 새끼야.」
걱정인지 욕인지 모를 페이지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앞으로 일기를 잘 숨겨 놔야겠다’였다.
내가 쓴 건 아닌데 내가 쓴 게 맞긴 하고, 이은호가 아파서 며칠 안 오면 솔직히 내가 쓸 것 같기도 한 내용이라서…….
지금의 내가 쓴 건 아니지만 창피는 내 몫이었다.
꿈속에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내내 대부분 이은호는 혼자 있을 때면 그 페이지를 펼치고 있었다.
그 페이지가 마치 자기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이은호는 어째서 그 페이지만 붙잡았던 걸까.
* * *
이제 막 저녁을 넘긴 하늘이 어두운 시각.
에이슬은 차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다.
“이슬아.”
“스읍, 어, 어어, 왜, 왜요?”
에이슬은 입가를 황급히 닦아 내며 졸고 있던 기색을 지웠다.
“옆에 앉은 거 내 말동무 돼 주겠다고 앉은 거 아니었니.”
“마, 맞지. 응. 맞……지……움, 말, 도…….”
감겨 가는 눈꺼풀은 어쩔 수 없었는지, 잠시 바로 잡았던 에이슬의 자세는 어느새 다시 원상 복구 되었다.
창문에 통통 튀어 대는 머리가 아프지도 않은지 그녀는 완벽히 졸음에 취해 버린 모습이었다.
에이슬의 매니저는 푹 한숨을 내쉬다, 최후의 방법이었는지 라디오를 재생했다.
―네. 그럼 다음 곡은 여자 친구를 잊지 못해 힘들어하는 전땡땡 님께서 신청하신 E-UNG의 ‘Last Day’입니다.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멎자, 곧장 의 인트로인 피아노 연주가 시작됐다.
잠시 후, 키릭―.
어쿠스틱 기타의 프랫노이즈 이후 은지의 목소리가 노래의 스타트를 끊었다.
“우리가 서로의 것이라며 외치던 라슷, 데이, 음음르는 다가오는 한 걸음에 숨이 막혀 와―.”
매니저는 이미 알고 있는 노래였는지, 말동무를 포기한 에이슬 대신 노래 동무로 를 흥얼거리며 퇴근길을 달렸다.
잠에 취해 있던 에이슬의 눈이 뜨인 건 은지의 파트가 이제 막 끝날 즘이었다.
그날을 기억해
우리가 처음 사랑을 속삭인 Last Day
은지의 파트가 끝나고 이어서 은호의 파트에서 에이슬은 완전히 눈을 뜬 채 정면을 보고 있었다.
이미 우린, 서로의 섬에 갇혀 있어
숨 한 번 뱉기가 힘들어
에이슬은 은호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라디오 채널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매니저는 별생각 없이 힐끔 옆을 돌아봤다가 라디오 LED판을 보고 있는 에이슬을 보며 화들짝 몸을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