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68)
“그냥. 음, 기억이 안 나네요.”
“하하. 원래 꿈이라는 게 그렇죠. 꿈 때문에 제대로 못 잤어요?”
매니저 오빠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데 원래 꿈이라는 게 그렇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내 꿈은 조금 다른 부류인 것 같으니까.
냄새도, 촉각도, 병실에 누워 있을 때 머리가 욱신거리던 그 통증도, 팔뚝에 달고 있던 링거까지.
모든 게 선명하게 여전히 저린 느낌처럼 불편하게 남아 있었다.
“음, 아뇨. 잠은 잘 잔 거 같아요.”
꿈 이야기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솔직히 나는 악몽도 그렇고, 걸리는 게 많으니까 이은호 말을 믿어 주는 거지.
남들한테 했다간 미친 X 소리 듣기 딱 좋은 이야기니까.
“이제 곧 10분 뒤면 도착해요. 은호도 슬슬 일어나 있으라고 해 주세요.”
“네.”
잠들 때까지만 해도 고속도로에 들어서던 창밖은 도시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간을 보자 다행히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잠든 건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이은호 쟤는 자는 표정이 왜 저래? 이은호도 이상한 꿈이라도 꾸는 건가?’
옆자리에서 정자세로 잠든 이은호는 반듯한 자세와 반대로 얼굴이 버린 휴지처럼 구겨져 있었다.
이은호 얼굴을 보며 문득 악몽이 떠올랐다.
장난을 치고 싶어도 닿을 수 없던, 낙(樂)이 없는 그 악몽.
나는 잠시 고민했다.
머리는 평범하게 얼른 깨우라고 외치는 것도 잠시.
본능이 이성을 집어삼키며 손이 먼저 뻗어졌다.
‘춘장이니, 보석 달린 울X린이니…….’
지금껏 놀림을 복수할 몇 없는 기회였다.
이은호는 항상 경계심이 심해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있을 때가 별로 없었으니까.
난 세 손가락을 잘 모아 일회용으로 사용할 무기를 만들어 냈다.
‘그래도 카메라에는 다친 게 보이면 안 되니까.’
네일 아트 덕분에 두께가 남달라진 단단한 손톱을 이용해서 난 전략적으로 이은호의 앞머리에 감춰질 부분을 콱 내려찍었다.
이은호가 번쩍 눈을 떴다.
“이 미친 X이…….”
이은호는 아픈 부위를 손바닥으로 비비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봤다.
“와, 이렇게 세게 찍을 생각은 없었는데…….”
“뭔― 하!”
이은호는 어이가 없는지 말을 하다 말고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짠데.’
잠이 덜 깨긴 했는지 힘 조절에 실패해서 나도 조금 당황했으니까.
“요 온나. 확 마, 씨!”
옴마야.
이은호는 이번엔 진짜 화났는지 평소 잘 쓰지도 않던 사투리까지 터뜨리며 팔을 뻗었다.
안전띠 때문에 멀리까지 도망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몸을 옆으로 빼며 난 최대한 이은호 손을 피했다.
하지만 차는 그렇게 넓지 않았고, 결국 뻗어 오는 이은호 긴 팔에 역대급으로 잘된 얼굴과 머리칼을 붙잡히기 직전이던 그때였다.
“오빠! 이은호가 저 때리려고 해요!”
“네? 은호 씨!”
매니저 오빠의 외침에 이은호 손이 내 얼굴까지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고작인 가까운 허공에 멈췄다.
“차 안에서 싸우지 마세요!”
매니저 오빠는 내가 한 짓은 보지 못 했는지 이은호를 탓하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있어서 그런가.
내 말을 완전히 믿어 주는 눈치는 또 아니었다.
‘붸.’
난 고개를 돌려서 창에 비친 이은호한테 혀를 내밀었다.
창 너머로 비치는 이은호는 여전히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헉.’
언제 신호에 걸렸는지 차가 멈춰 서 있었고 이쪽을 보던 매니저 오빠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매니저 오빠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신호가 바뀌었는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안…… 혼내시나?’
대표님이었다면 당장 잔소리가 터졌을 상황이었음에도 매니저 오빠는 말이 없었다.
이은호가 알아서 하겠거니,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후…….”
그동안 이은호는 이성을 찾은 듯 한숨인지 심호흡인지 모를 숨을 골랐다.
잠시 후, 차 안이 조용해졌을 때.
이은호는 조용히, 동시에 살벌한 목소리로 나한테 속삭였다.
“호박아, 두고 보자.”
“하. 하.”
두고 보라는 사람 중에 무섭던 사람 없던데―.
더 약이나 오르라고 일부러 어색하게 웃자 바라던 대로 이은호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히히.’
역시.
이 인간 놀릴 때가 제일 재밌다.
있으면 싫지만 그렇다고 좀 오래 없으면 신경 쓰이고, 이게 가족인가 보다.
* * *
톡신
차는 한참을 달려 한 스튜디오 건물 앞에 도착했다.
‘스튜디오……가 맞나?’
은호는 걱정스럽게 오래된 4층 빌라의 옥상까지 눈으로 훑으며 생각했다.
간판은커녕 아무리 봐도 버려진 오래된 빌라로밖에 안 보인다.
은호가 걱정스럽게 건물을 바라보는 동안, 은지는 어느새 입구로 달려가서 옥빛이 도는 유리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끼이익.
경첩 부분에 녹이 슬었는지 삐걱대는 소리가 컸다.
문을 열자 내부는 오래 묵은 먼지 냄새가 가득했다.
“콜록.”
은호는 미간을 구기며 신경질적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현우는 기침하는 은호가 신경 쓰였는지 가방을 뒤적이며 도움이 될 법한 물건을 찾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도움 될 법한 물건은 못 챙긴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면 돼요?”
묵은 먼지 냄새 따위는 은지의 호기심을 죽이지 못한 듯.
은지는 먼저 2층으로 오르는 낮은 계단에 한 발을 올린 채 물었다.
“지하로 가야 합니다.”
“아, 꽝이네.”
가방을 뒤적이던 현우가 답하자 은지는 엄지와 검지를 튕기며 아쉽다는 듯 외쳤다.
혼자 무슨 내기라도 한 걸까.
은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은지를 빤히 바라봤다.
경계심 가득한 은호와 다르게 은지는 겁도 없이 곧장 현우의 말대로 지하로 향했다.
“야, 야, 이은지.”
은호가 걱정스럽게 불러 봤지만 은지는 모서리를 돌아 벌써 문 앞에 있었다.
“안 와?”
“……가.”
은호는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흘리며 아래로 향했다.
묵은 먼지 냄새의 원인은 여기였는지, 모서리를 돌자 계단 아래의 빈 곳엔 빼곡히 헤진 천과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장판과 깔개로 가득했다.
스튜디오에서 쓰이는 익숙한 재료들을 보자 그제야 은호는 한결 경계심을 지우며 은지를 따라 문 앞에 섰다.
“워.”
“우와아!”
문을 연 순간, 바깥의 낡은 곳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다른 벽은 모두 익숙한 크로마키로 도배가 되어 있는데, 정면만큼은 웬 외국의 성 내부를 통째로 뜯어다가 벽 한 면을 통째로 박아 놓은 모습이었다.
고작 한 시간가량 되는 짧은 촬영을 위해 왜 이렇게 멀리 이동하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어, 오셨다!”
먼저 준비하고 있었는지 스태프들은 바쁘게 물건과 조명을 이리저리 옮기는 중이었다.
은호와 은지를 발견한 스태프가 소리치자 차분한 분위기의 여인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멀리까지 오는데 고생 많았어요. 오늘 촬영을 맡게 된 김철수 PD에요.”
은호는 문득 꽃꽂이가 취미라던 지예찬 선배님의 매니저, 영희 형님이 떠올랐다.
이름에 잠시 당황한 은호는 인사 타이밍을 놓쳤다는 걸 의식하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E-UNG 이은호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아, 이은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 PD는 조용히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찬이가 기대하라더니 확실히 두 사람 다 피사체가 좋네.”
예찬?
예상치 못한 이름이 등장하자 은호의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은호를 따라 인사하던 은지는 김 PD에게 시선을 꽂은 채 고개를 들었다.
‘우와, PD님 되게 시크한 느낌이다.’
한쪽은 왜 여기서 예찬이 이름이 나오느냐는 표정, 한쪽은 성깔 있어 보이더니 반전 매력이 있구나.
김 PD는 은호와 은지가 재밌는지 웃으며 이야기를 덧붙였다.
“박창석 대표님께서 말씀 안 해 주셨나 보네. 대표님이 촬영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예찬이한테 물었고, 예찬이가 날 추천해서, 짠. 내가 지금 여기 있답니다.”
“아…….”
예상보다 훨씬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준 김 PD 덕분에 말문이 막힌 은호는 이해했다는 듯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코디는 없다고 했으니까. 음, 내가 봤을 땐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혹시 모르니까 저쪽에 임시 대기실 있어요. 정리하고 10분 안으로 와요.”
“네!”
“네!”
김 PD 말을 따라 둘은 임시 대기실에서 간단히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두 시간밖에 없으니까 얼른 촬영 들어갑시다. 참, 거기 매니저님?”
“네?”
“전달받기로 이거 다음에 바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아, 예. 맞습니다.”
김 PD는 멀뚱히 둘을 보고 있던 현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신한테 질문이 올 줄은 예상치 못한 듯 현우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김 PD는 현우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은호와 은지를 돌아봤다.
“우리 스태프가 실수로 도시락 몇 개를 초과로 주문해 버렸는데 두 사람 도시락 먹을 수 있나요?”
“네?”
먹을 수 있냐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잠시 머리를 굴렸다.
“혹시 관리 중인가 해서…….”
“아니요! 먹어도 돼요!”
“그래요? 휴, 잘됐네요.”
은지가 큰 소리로 대답하자 김 PD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밥!’
은지가 흥분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은호는 숍에서 샌드위치라도 먹었지만, 준비가 더 오래 걸렸던 은지는 결국 식사다운 식사를 한 끼도 못 했다.
‘오, 밥이라니.’
은호 역시 빵은 배가 일찍 꺼지는 느낌인지라 간단한 식사라도 샌드위치보다는 김밥이 더 취향이었다.
당연히 김밥보다 좋은 게 제대로 된 반찬과 국이 모두 있는 식사.
그런 두 사람에게 ‘도시락’이라는 한 단어는 의욕을 키우기엔 충분했다.
“촬영 일찍 마치면 남은 시간은 같이 도시락이나 먹을까요? 차 안에서 불편한 식사보다 제대로 된 밥 먹고 여유롭게 출발하는 게 좋을 테니까.”
“좋아요!”
“좋네요.”
은호와 은지는 눈에 띄게 생기가 돌았다.
김 PD는 도시락이 준 의외의 효과에 놀라며 콘티 종이를 내밀었다.
“그럼 콘티 받으시고. 준비는 충분히 되신 거 같으니까 빠르게 설명해 드릴게요.”
* * *
“너 왜 자꾸 여기서 스텝을 절어.”
“이게 버릇이 처음에 잘못 들었더니 잘 안 빠져.”
“신경 쓰자.”
“알겠어.”
처음 리허설에 들어갔을 때 김철수는 환호했다.
‘역시 대표가 지예찬 같은 능구렁이를 그냥 키워 낸 게 아니구나.’
이 남매의 실력은 확실했다.
‘하지만 뭔가 어설픈 느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리허설이라 힘을 제대로 준 게 아니었던 모양인 듯.
본 촬영에 들어가자 김철수는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