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56)
남매들에게 쏟아지던 박 대표의 긴 잔소리는 20분 뒤, 늦게 도착한 김인혁의 차가 주차를 마쳤을 때 겨우 멎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그, 그래?”
조금 피곤해 보일 뿐, 평소랑 다름없어 보이는 은호.
항상 험악해 보이는 에나 뒤로 나란히 똥이라도 씹은 얼굴인 은지와 달님이가 따라왔다.
김인혁은 괜한 일에 얽힐까 말을 아낀 채 살벌한 분위기의 남매들과 함께 가게 종업원에게 안내받았다.
실내에는 늘어진 쪽마루와 방 안에 있는 손님들의 신발이 즐비했다.
여러 방을 지나치던 종업원은 가장 구석진 위치의 제일 큰 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문을 열자 이미 몇 판은 먼저 도착해 있던 멤버들의 배 속으로 들어갔는지 방 안은 고소한 고기와 진한 된장찌개 냄새로 가득했다.
“먼저 먹고 있었네.”
“카드는 보내셨길래 그러라는 줄 알았죠.”
로아가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박 대표는 헛헛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고 쥐여 보내긴 했으니까. 됐다. 너희도 얼른 들어가서 앉아.”
박 대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다들 자리를 잡았다.
왼쪽에는 김정민, 오달님, 은호, 김인혁 순으로 남자들이 앉고 마지막에 에나가.
오른쪽에는 최영국 이후 로아, 은지, 정현지, 김미은 순으로 여자 멤버들이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앞으로 고생 많이 할 텐데 배불리 먹어 둬.”
넉넉하게 세 테이블을 붙여 앉았는데 그게 판단 미스였을까.
박 대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배불리’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낸 걸 후회했다.
고기를 뜯고 있는 육식동물한테서 먹던 고기를 빼앗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불판 교체를 세 테이블 모두 10번을 넘어갈 무렵.
박 대표는 조용히 계산서의 획을 세기 시작했다.
가격으로 환산한 후 떠오른 ‘0’의 개수를 세어 봤다.
‘아이고, 두야…….’
된장찌개 9개.
고기 50인분.
공깃밥 12개.
음료수, 소주, 맥주 총합 30병 이상.
박 대표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속은 남몰래 쓴 핏물을 삼켰다.
* * *
아직 클라우드 맴버들이 고기에 미쳐 있는 그 시각.
은호와 은지는 관리를 위해 적당히 먹고 뒤로 빠져 있었다.
김인혁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구석에 자리 잡은 은호와 은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은지는 자?”
“네. 피곤했었나 봐요.”
은호는 손바닥만 한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다가 그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와, 넌 여기서도 일해?”
“아, 죄송합니다.”
뒤늦게 은호는 인혁과 시선을 맞추며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상치 못한 사과였는지 먼저 이야기를 꺼낸 인혁이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아냐. 뭐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신기하기도 하고 힘들지 않나 싶어서 물어본 건데…….”
“아…….”
은호는 웃으며 민망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힘들긴 한데…….”
“안 힘들다고 거짓말은 안 하네?”
“하하.”
은호는 인혁을 따라 짧은 웃음을 터뜨리다 옆에서 잠든 은지를 힐끔 바라봤다.
은지는 밥그릇 절반을 비울 무렵부터 꾸벅꾸벅 졸아 댔다.
아닌 척하긴 했지만 그래도 데뷔 무대가 긴장되긴 했었는지 결국 식사를 마친 직후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발악하는 거죠.”
“발악?”
“네. 이런 시간에라도 계속 써 놔야 이은지가 작곡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 있어서요.”
은호의 덤덤한 표정에 인혁은 잠시 멈칫했다.
이제 고작 20대 초반에 들어선 아이의 눈이라기엔 생각이 많아 보여서였다.
“고생하네. 자―.”
김인혁이 녹색 소주병을 들고 권하자 은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술은 좀. 아직은, 죄송합니다.”
“하긴, 내일 카메라 앞에 선다고 고기도 덜 먹었지?”
“네. 알아서 관리해야죠.”
박 대표는 더 먹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은호와 은지는 스스로 내일 좋은 컨디션을 위해 관리했다.
인혁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트리려다, 때마침 눈에 띈 은호가 들고 있던 수첩 속 내용을 읽었다.
“베이비, 우리 방식 알잖아.”
“잠―!”
“이랬다저랬다 변덕쟁이, 좋았다 싫었―.”
“형, 형, 형!”
은호가 새빨개진 얼굴로 급하게 수첩을 덮자, 인혁은 장난 어린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저 수치사 당할 거 같거든요. 제발 그만요.”
“뭔데? 연애 편지야?”
“가사예요…….”
“아, 은지가 작곡하고 네가 작사라고 했었나?”
“네. 재주도 없는데 이러고 있네요. 하하.”
은호가 자조적인 말을 흘리자, 인혁은 뭐라 말을 하려다 도로 입을 닫았다.
‘너도 잘하고 있어’라고 말을 해 줄 수도 있었지만 은혁은 클라우드의 초기 멤버였다.
은호와 은지가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던 순간부터 내내 얼굴을 보아 온 사이.
인혁은 ‘너도 잘하고 있어’라는 쉬운 위로를 편하게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고생하네.”
겨우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였다.
은호는 이미 은지와 많은 비교를 당해 왔다.
의식하든 무의식적이든 사람들은 쉽게 A와 B를 비교하니까.
이미 수없이 같은 위로와 같은 비교를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은호는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감췄다.
인혁은 은호와 가깝지 않은 제3자라는 위치였기에 은호의 진짜 얼굴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동생 재능에 질투하는 오빠는 좀, 추하죠. 꼴사납고.”」
당시 ‘괜찮냐’던 인혁의 질문에 은호가 한 대답이었다.
은지는 노래도, 춤에도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은호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은지만큼은 눈에 띄지 못했다.
‘은지가 없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서로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은지는 꼭 가수를 하기 위해, 연예인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런 은지에게 이젠 작곡의 재능까지 있다고 하는데, 왠지 그럴 줄 알았달까.
그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질 좋은 것만 귀신같이 잘 뽑는 가성비 좋은 공장.’
NRY 사내에서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인혁도 은지의 괴물 같은 작곡 속도에 대해선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은지가 몇 곡이나 만들었어?”
인혁은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완성된 거 말고 제작한 건 세기도 힘들어요. 일단 열 곡 중 하나 정도는 앨범에 넣을 곡이 나왔으니, 지금 총 5곡……. 그럼 한 50곡 이상은 뽑았었네요.”
‘괴물 같다’라는 말이 괜히 붙은 건 아닌 모양이다.
듣긴 했었다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 50곡 가사를 다 네가 쓰는 거야?”
“어우, 농담이라도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마요, 형. 그러면 저 죽어요.”
은호 대답에 인혁은 잠시 웃음을 터뜨리다 물었다.
“그럼 써야 하는 건 몇 곡인데?”
“일단 두 곡은 꽤 예전에 완성했고, 나머지는 콘셉트에 맞춰서 짜려니 좀 막혀서 오래 걸렸어요.”
“콘셉트 정한 거야? 얼마 전만 해도 못 정했다고 들었는데.”
“대표님 성격 아시잖아요. 걸리는 거 있으면 밀어 버리시는 거.”
“하긴. 시작은 불도저 시지. 그래서 주제는 뭔데?”
“시간이요.”
생각보다 흔한 주제에 인혁은 ‘아하.’라며 짧게 감탄했다.
“너무 많으면 작사가한테 맡겨도 되지 않아?”
인혁은 별생각 없이 툭 던진 이야기였다.
하지만 수첩 끝을 만지작거리던 은호의 손이 멈칫했다.
“비용이나 사람 문제야, 대표님 인맥에 능력이면 충분히 밀어줬을 거 같은데.”
“뭐…… 그러면 되기야 하는데…….”
인혁은 고개를 들다 은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그 눈을 보니 이유를 알 수밖에 없었다.
“저희 곡이잖아요.”
은호의 눈에 욕망이 가득했다.
「“발악하는 거죠.”」
인혁은 뒤늦게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되새겼다.
요즘 은호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예전보다 어른스러워졌고 여유가 생겼다고, 인혁뿐만 아니라 주변 대부분이 그렇게 말했다.
“이게, 참, 저도 그렇고 이은지도 그렇고, 고집이 센 건지 다른 사람이 쓰거나 만져 준 건 성에 안 차더라고요.”
농담처럼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은호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었다.
“하여간 너나 은지나 둘 다 대단한 놈들이야.”
은호도 은지도 남매는 남매인지 둘 다 욕심이나 고집이 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단순한 고등학생 꼬맹이들이라기엔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모를, 살벌함을 넘어 흉흉하기까지 하던 첫 만남 때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인혁은 아직 고등학생인 애들에게 움찔했던 첫 만남을 떠올리며 부르르 어깨를 털어 냈다.
지금이야 그때만큼의 독한 얼굴은 아니지만…….
‘아닌가?’
은호의 얼굴을 다시 보니 수첩을 노려보는 은호의 눈빛은 그때만큼이나 여전히 무시무시했다.
인혁은 ‘하하’ 흐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클라우드가 너희 열심히 빛내 줄 테니까, 잘돼라. 꼭.”
은호는 조금 놀란 눈으로 인혁을 바라보다 이내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꼭.”
인혁은 불판 앞으로 돌아갔다.
오늘 하루가 여기까지였다면 참 훈훈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새 아침을 맞았을 텐데,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 * *
불편
평온하게 대답하면서 고개를 든 그때.
은호는 싸늘한 눈으로 은지를 바라봤다.
잠든 은지가 아닌, 그 발끝에 서 있는 환자복을 입고 있는 다른 ‘이은지’를.
말발굽 소리를 닮은 피아노 소리가 귀를 때렸다.
피아노라고는 존재하지도 않는 고깃집에 피아노 소리라니…….
“하하…….”
차게 식은 몸에 그럴싸한 화장으로 생기 있어 보이는 듯했던 그 얼굴이었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던 환각.
가장 평온한 시간에.
가장 미래에 대한 기대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환각이 돌아왔다.
평온한 시간에 취해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씩 또렷하게 떠오른다.
「“저 살고 싶어요, 대표님.”」
「“대표님, 저 이런 잡생각에 지지 않게, 제발 차라리 일에 미치게 해 주세요.”」
「“그냥 미친 듯이 노래만 하고 싶어요. 대표님은 저 그렇게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시잖아요.”」 //기울임
황당하기만 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소름 돋을 정도로 또렷한 말발굽 소리를 닮은 피아노 연주는 멈추지를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는데 너무 두려우면 홧김에 뱉는 욕도 입 밖으로 잘 안 나오더라.
환자복의 이은지가 섬뜩하게 웃으며 잠든 이은지한테 손을 뻗었다.
어느새 마왕이 쫓아온다는 아이의 비명 같은 바이올린 연주가 들리기 시작하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으음…….”
이은지는 꿈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구기며 뒤척였다.
그때였다.
시끄럽던 머릿속의 피아노 연주가.
비명 같던 바이올린 연주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아.’
창백한 이은지는 여전히 ‘진짜’ 이은지의 발끝에 얼쩡거리며 섬뜩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다.
‘괜찮아.’
여기는 아직 이은지가 살아 있다.
이게 꿈이라도 난 여기 남겠다고 일찍이 결심했었다.
근 1년을 낮이고 밤이고 함께했던 놈을 무시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지긋지긋한 창백한 이은지의 시선을 피하려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제발 그냥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