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45)
“어, 뭐야. 오빠, 입수해?”
“어. 왜.”
“나 놀리더니 꼴좋다. 하하하하핰!”
먼저 다 갈아입은 듯 렌즈와 의상이 바뀐 이은지가 가까이 다가왔다.
검은 나시 위, 단추를 많이 풀어 헤친 와이셔츠, 검은 가죽 치마와 세 보이는 굽 높은 워커.
메이크업도 뭔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입술이 더 진해졌다는 것 외에는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아까보다는 한결 따뜻해 보이는 이은지가 다가와 숨넘어가게 웃어 젖혔다.
“감기 걸려서 E-UNG에 손해 끼치지 마라, 이은호!”
“X쳐. 감기 안 걸려.”
“그래. 아까 누가 바보는 감기 안 걸린다더라.”
“오빠한테 말하는 꼬라지 봐라.”
“동생한테 ‘꼬라지’가 뭐냐, 꼬라지가.”
뭔가, 시작할 때도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에휴.’
어차피 놀리려고 저러는 거라서 난 일부러 신경을 꺼 버리는 걸 택했다.
“자, 들어갈게요, 은호 군.”
윽.
촬영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었다.
얼른 나더러 물에 들어가라는 고 감독님의 은근한 압박.
‘그래.’
일에 방해가 되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
수영장은 낮은 물 높이에 비해 외벽의 높이가 상당했다.
앞으로 촬영할 장면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된 수영장이었다.
난 무릎을 한껏 쳐들고 겨우 안으로 발을 넣었다.
그렇게 발이 검은 물에 닿은 그때였다.
‘X.’
따뜻……은 개뿔.
순간 심장이라도 멎는 줄 알았다.
‘X나 차갑잖아!’
예상치 못했던 온도 덕분에 발끝을 타고 짜릿한 신호가 머리끝까지 관통했다.
‘여기에 누워야 한다니…….’
물속이 깊지는 않았다.
누워도 겨우 몸의 반쯤 찰 정도로 얕은 폭이었다.
그래서 더 물이 빨리 식은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찬 게 닿으면, 혹시 모르니까.’
난 담그려던 발을 빼고 짧게 스트레칭을 한 후 다시 발을 밀어 넣었다.
“크흐흑…….”
아까부터 이 장면을 고스란히 뒤에서 지켜보던 이은지는 이젠 오열하며 꺽꺽거리고 있다.
솔직히 다른 것보다 저러는 이은지 때문에 더 속이 펄펄 끓었다.
‘차갑다. 차가운 물이다.’
이번엔 각오하고 넣은 덕분에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다.
“크게 물결치지 않게 조심히 누워 주세요.”
“네.”
스태프의 부탁에 난 천천히 수영장 중앙으로 가서 아주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은호 군, 물을 받아들이는 느낌으로 잘 부탁해요!”
“네!”
감독님의 부탁에 씩씩하게 대답을 하긴 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이게 참. 바로 누우면 차라리 좀 나을 것 같은데.
찬물에 몸이 스펀지처럼 천천히 젖어 가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NG는 절대 안 된다…….’
난 이를 악물며 호흡을 다스렸다.
속옷까지 젖는 것을 느끼며 겨우 어떻게 검은 물 바닥에 누웠다.
머리가 물에 잠길수록 귀에 검게 염색된 물이 밀려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레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고태서 감독은 곧장 큐 사인을 내렸다.
“액션!”
촬영이 시작됐다.
사실 본 장면에 비하면 이 정도 입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 꿈을 꿨는데, 네가 사라진 꿈이었어
세트장에 울리는 <듀오> 노래를 따라, 난 느리게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팔을 뻗었다.
그래서 눈을 떴는데 왜 난 아직 꿈일까
찰나였지만, 적어도 이건 꿈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 이런, 현실이 닥쳐 와
머리 위로 다른 스태프들이 모여서 물을 채워 넣는 소리가 들렸다.
‘아, 온다.’
가사대로 곧 진짜 현실이 닥쳐왔다.
그렇게 쏟아지는 검은 물에 최대한 평온을 유지하며 눈을 감았다.
머리 위에서 쏟아진 검은 폭포는 동시에 온몸을 적셔 갔다.
꿈이라면 깨게 해 줘, 아니라면 꾸게 해 줘
세트장에 울리는 <듀오>는 계속되고 있었다.
난 서서히 높아지는 수위에 숨을 참으며 머리를 완전히 담갔다.
「“받아들이는 느낌으로, 잘 부탁해요.”」
받아들이는 느낌, 받아들이는 느낌!
집중해야 했다.
카메라가 여전히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난 표정 관리에 온 힘을 다 쏟았다.
여기서 NG가 나면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머리에 쏟아지는 물도 다시 맞아야 하니까!
“컷! 오케이!”
“푸, 허억, 헉…….”
물 밖에서 들린 희미한 사인에 벌떡 상체를 들었다.
잠수 기록을 경신한 기분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나 보다.
“아주 좋았어요. 은호 군, 얼른 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와요.”
“예? 다시 찍어야 하나요?”
검은 물이 머리끝에서부터 뚝뚝 흘러내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물었다.
“하하. 아뇨. 다음 의상 입고 오라는 말이었어요.”
“아, 네…….”
정말 잘못들은 게 맞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킨 그때였다.
머리가 핑 돌면서 몸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덜덜덜 떨렸다.
‘엄청나게 들이부었구나.’
주위를 의식하니, 그제야 처음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낮던 물 높이가 사람 가슴 부근까지 높아져 있다는 걸 알았다.
흰 와이셔츠도 쫄딱 젖어, 흰 것도 검은 것도 아닌 회색이 되어 있었다.
“자. 고생했어.”
물속에서 나오자 이은지가 수건을 건넸다.
얼굴을 닦아 내고 있자 곧 다가온 현우 형님은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이불만 한 큰 타월로 내 몸을 칭칭 감으며 말했다.
“얼른 가서 씻자. 감기 걸린다.”
급한 상황이긴 한 듯, 평소 하라고 해도 하지 않던 반말을 하며 현우는 은호를 샤워실로 이끌었다.
“혼자 할 수 있겠어?”
“네. 좀 지나니까 괜찮아졌어요.”
“그래요. 씻고 나오면 샤워실 옆 행거에 옷들 걸려 있으니까 그거 순서대로 입고 나오면 된대요.”
간이로 준비된 샤워실에서 온수기로 따뜻한 물을 맞자, 그제야 잠깐 떠났던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뒤에는 형님의 말대로 행거에 준비된 순서를 따라 의상을 갈아입었다.
민소매와 와이셔츠 차림이던 이은지와는 다르게 난 밋밋한 흰 티셔츠와 검은 청바지뿐이었다.
‘이게 끝인가?’
너무 허전한 의상인 것 같아서 옆을 돌아보자, 그럼 그렇지.
다른 옷걸이에 좌우가 비대칭인, 특이하게 생긴 와이셔츠가 2번이라는 번호표를 달고 걸려 있었다.
그걸 재킷처럼 걸치자 밋밋한 느낌이 조금 줄어들었다.
신발은 워커였던 이은지랑 다르게 목이 조금 높은 검은 구두가 준비되어 있었다.
“은호 씨, 이리로!”
“네.”
신발까지 신고 밖으로 나오자, 메이크업 담당 스태프들이 고대기와 붓을 들고 눈을 빛냈다.
자리에 앉자 눈 깜짝할 사이에 가라앉은 머리가 깔끔하게 끌어 올려졌다.
한 번 씻고 나왔기 때문인지 전보다 훨씬 진한 느낌의 메이크업을 받았다.
“이거 껴요.”
“네.”
스태프가 건넨 건 새로운 렌즈였다.
렌즈 광고를 받았다고 귀띔으로 듣긴 했던 것 같은데, 비닐을 벗겨 내자 갈색이던 처음 것보다 더 화려한 샛노란색이었다.
어떻게 겨우 집어넣고 난 후, 이제 다 끝난 건가 싶어서 나가려던 그때였다.
“잠깐, 잠깐! 은호 씨!”
“예?”
의상 담당인 스태프에게 붙들린 그때.
목에 세 개의 목걸이가 한 번에 걸렸다.
“됐어요!”
오…….
목걸이 3개에 놀란 것도 잠시.
전문가는 전문가인 듯 자칫 과할 법도 하건만, 매무새를 정리하고 보니 밋밋한 의상에 포인트를 주는 정도였다.
“이제 잘하고 와요!”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도와주신 분들께 간단히 인사 후 다시 세트장 안으로 향했다.
* * *
화보
“오셨어요?”
“예. 모델들 준비는 다 됐습니까?”
“그게, 이은호 군은 조금 전 입수 촬영으로 의상 교체 중이고 은지 양은 바로 촬영 들어가시면 될 겁니다.”
시간이 촉박했던 이유 중 하나인 CK 뮤직 라이프 매거진 화보 촬영.
큰 NG 없이 시간을 정확히 맞춘 덕분일까.
때마침 CK 뮤직 라이프에서 유명 포토그래퍼 전명훈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은호가 의상을 갈아입고 세트장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은지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세트장 내부에는 폭포 같은 셔터 소리와 전명훈 포토그래퍼의 목소리만 한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좋아요. 조금만 더 고개 들고! 그렇지! 아냐, 아냐! 조금 더 강렬하게! 그렇지! 손끝 신경 쓰고!”
한창 촬영 중인 곳으로 다가가자, 이은지는 문을 이용하며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자세.
문틀에 기댄, 쓸쓸한 분위기에 취한 자세 등.
잠깐 살핀 분위기로는 뮤직비디오 스토리를 담은 느낌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오! 오빠 왔다.”
은지의 혼잣말을 들은 듯 전명훈 포토그래퍼의 날카로운 시선이 공격적으로 날아들었다.
“빨리 와요! 시간 없어!”
포토그래퍼의 독촉에 뛰다시피 자리에 섰다.
“거기서 팔 한번 들어 봐.”
“이렇게요?”
난 얼떨떨한 기분으로 곧장 포즈를 취하며 촬영에 합류했다.
“둘이 더, 더 가까이 붙어! 진정성이 없잖아!”
“작가님, 두 사람 남매입니다.”
포토그래퍼가 자꾸 은근히 찐득한 자세를 유도하는 것 같아서 점점 찝찝한 기분이 커질 즘이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조명 감독도 왠지 이상한 점을 느낀 건지 그에게 속삭이며 말을 전했다.
“나, 남매라도 더 사이좋게 바라봐! 곧 물어뜯을 것처럼 노려보지 말고!”
진짜 오해하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라는 거야.”
“이은지, 말조심하랬잖아.”
그때, 이은지는 옆에서 나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모른 척 넘어가기엔 너무 확실히 들어 버려서 결국 약하게 경고를 보탰다.
후에는 은지도 신경을 많이 썼는지, 울컥하는 말을 들어도 입술을 씹으며 화를 참아냈다.
“그대로 있어요! 긴장 풀고! 더, 더! 긴장 풀라고!”
분명 긴장을 다 푼 것 같은데…….
프로의 눈에는 여전히 못마땅한 듯, 전명훈 포토그래퍼는 중간중간 언성이 높아졌다.
노래는 익숙하지만 아무래도 화보 촬영 같은 건 익숙하지 않은 터라 몇백 컷은 족히 날린 것 같았다.
‘회귀 전 같으면 컷 좀 확인하고 가자고 말이라도 해 볼 텐데…….’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직접 봐야 어디를 고칠지 알 텐데, 신인이기 때문일까.
전명훈 포토그래퍼는 급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직접 체크할 시간은 전혀 주지 않았다.
“됐어요. 수고했습니다.”
급하게 진행된 촬영을 마무리 후, 나랑 이은지는 그제야 모니터링을 하며 어떻게 찍혔는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직접 확인한 사진들의 초반 컷은 그야말로 엉망이 따로 없었다.
“오, 이거 잘 나왔네.”
“우와.”
“오오.”
주변에서 함께 화면을 확인한 스태프들이 감탄을 흘렸다.
그때, 고태서 감독은 전명훈 포토그래퍼가 미리 빼 뒀던 A 컷을 화면에 크게 띄웠다.
“저거―.”
“으.”
이은지는 오히려 그 A 컷을 본 순간 질겁했다.
뒤늦게 A 컷을 확인한 나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거, 아까 ‘그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