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21화 (21/309)

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21)

‘능숙하네.’

아저씨가 가르쳐 준 방법은 의외로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이은지의 피든 남의 피든, 일단 피를 보는 일이 없어졌다 싶을 정도로 눈에 띄게 줄었으니까.

‘이제 시작인가?’

은지는 분리수거장에서 투명한 페트병을 골라 꺼낸 뒤 능숙한 손길로 비닐을 떼어 내고 뚜껑을 여는 작업을 한참 했다.

후에는 늘어진 통통한 페트병을 뿌듯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행동을 시작했다.

콰지직! 콰지직! 꽈지직!

이은지가 미친 듯이 투명한 페트병을 납작하게 만드는 그동안.

난 그 모습을 감상하며 마치 개그 프로를 시청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다 했냐?”

“아직. 마지막 작업 남았어.”

‘마지막 작업’은 페트병의 뚜껑을 다시 닫는 일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그래서 한단다.

이은지는 남김없이 뚜껑을 다시 닫은 후 그것들을 다시 그대로 플라스틱 분리수거 봉지에 쏟아 넣었다.

‘오랜만이네.’

족히 몇 년 만에 본 이은지의 특별한 정리 쇼 덕분일까.

나까지 내내 갑갑했던 마음이 한결 풀어졌다.

“하여간 웃겨.”

“응, 니 얼굴이 더 웃겨.”

이은지도 기분이 풀린 듯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을 걸어왔다.

“또 까분다.”

“뛔 꿰뷴뒈.”

“이야기를 말아야지…….”

“히히, 이겼다.”

“하이고.”

* * *

“너, 역 도착하면 화장실 가서 손은 씻고 와라.”

“아, 당연하지.”

정리를 끝마치고 이젠 정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은지의 지저분해진 손이 신경 쓰여서 슬쩍 말을 흘린 게 문제였을까.

불안한 느낌에 슬쩍 시선을 들어 이은지의 표정을 본 그 순간.

“이런, 씨!”

직감은 정확했다.

“으비비!”

이은지가 더러운 손을 얼굴에 들이밀며 달려온다.

“아악! 하지 마! X친!”

“해지 매! 싫은데! 흐하핰!”

진심으로 싫었던 은호는 은지의 손을 피해 지하철역까지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어떻게든 괴롭히겠다고 은지 또한 속도를 내긴 마찬가지였다.

“나 그럼 씻고 올게.”

“제발 그래 주라.”

다행히 지하철역에 도착하자마자 찝찝하긴 마찬가지였는지 은지는 즉시 화장실을 찾아 손을 씻고 나왔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타는 곳 안쪽으로…….

이은지가 손을 씻고 나온 그때.

타이밍이 좋았다.

때마침 들어오는 열차에 그대로 몸을 실었다.

“자리 많네.”

마침 마주 보는 기둥 자리가 모두 비어 있어서 자리를 잡았다.

장난치며 달려와서인가.

아니면 추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따듯해져서일까.

잠이 이길 수 없을 만큼 쏟아졌다.

―이번 역은 XX. XX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얼마나 잠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달팽이관에 날아든 익숙하지 않은 역 이름에 난 본능적으로 번뜩, 눈이 뜨였다.

어쩐지 갑자기 잘 풀린다 싶더라니…….

“X 됐다. 야, 야! 이은지, 내려!”

“느헝.”

시간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아직 잠이 덜 깬 이은지의 뒷덜미를 잡아채, 짐짝처럼 문밖으로 내던졌다.

“아악!”

뒤따라 지하철에서 내리자 방금 충격에 잠은 깬 듯, 열 받은 이은지가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아프잖아!”

“여기 어디냐?”

“뭐?”

이은지는 씩씩거리다 뒤늦게 뒤편의 파란 간판을 돌아봤다.

그러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우리, 뭐야? 왜 여기서 내렸어?”

지하철은 도착했어야 할 역에서 여덟 정거장을 지난 후였다.

“다음 차는 언제 있어? 막차만 아니면 다음 거 타고 돌아가면 되는…….”

최대한 침착하려는 은지에게 조용히 휴대폰을 보여 줬다.

은지의 얼굴에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X 됐네.”

“어, X 됐어.”

막차가 끊겨 버렸다.

* * *

한 시간 뒤.

불 꺼진 지하철역 앞.

사나운 인상이 똑 닮은 한 남녀가 초라하게 쪼그려 앉아 있다.

“너희 때문에 내가…….”

두 사람은 반가운 목소리에 구세주를 바라보듯 반짝이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 봤다.

“내가 니들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응? 알긴 해?”

“헤헤.”

헤실거리는 은호와 은지의 얼굴에 못 이긴 박 대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매니저를 다시 구하던지 해야지……. 감기 걸릴라. 둘 다 얼른 차에나 타.”

“네!”

박 대표가 차를 가리키며 말한 그 순간.

남매는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겨우 붙들고서 곧장 명령대로 뒷좌석으로 튀어 들어갔다.

두 사람 모두 얌전히 안전띠를 매는 모습을 보던 박 대표는 그제야 뒤따라 운전석에 올랐다.

“그래서…….”

잠시 후 운전대를 잡은 박 대표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노곤하고 편안한 온기에 풀어졌던 두 사람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녹음은 서로 만족스럽게 잘 끝났다고 아까 연락받았는데, 왜 너희가 이 시간까지 지하철에 있었을까?”

박 대표는 최근 데뷔 관련 미팅으로 굉장히 바쁜 상태였다.

“그게…….”

지하철에서 졸다가 역을 지나쳤어요.

원래라면 그렇게만 말하려고 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약 한 달 만에 대표님과 대화다운 대화를 할 기회였다.

난 잠시 뒷말을 늘리다 입을 뗐다.

“나름, 반항이었던 거 같아요.”

“반항? 무슨 반항?”

처음 하려던 말과는 달랐지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였고 한 번은 해야만 했던 이야기였다.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작업 방식에서 불협화음이 잦아요.”

이후에는 그에게 최근 일주일간의 녹음 상황을 최대한 냉정하게 ‘일’적인 호흡만을 강조하면서 전달했다.

대표님은 우리 남매를 제외한 사람들에겐 공과 사 구분을 냉정하리만큼 철저하게 하셨다.

그만큼 박 대표는 이은지와 나 역시 그러기를 바라셨다.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작업 방식에서 작곡가님과 불협화음이 잦습니다.”

“불협화음……?”

“네. 이대로라면 페이옵 작곡가님 곡은 대표님께서 계획해두셨던 것보다 결과물이 기대 이하일 수도 있어요.”

당연한 일이었다.

가수를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작곡가가 그 가수의 매력을 살리는 건 힘든 일이니까.

“저희 앨범에 담길 곡인 만큼 항상 최선을 다할 거지만, 아직 신인인 저희는 허락해 주셔야만 제대로 노래다운 노래를 할 수 있잖아요.”

지금 나는 인지도가 조금이나마 쌓여 있던 회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인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꺼낸 건 그런 이유에서이기도 했다.

대표님은 묵묵히 전방을 주시한 채 이야기를 들었다.

“보컬 녹음 시간이 너희가 그동안 해 왔던 것보다 길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흐름이 연결되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지치는 감이 크더라고요. 특히 느낌에 크게 의존하는 은지는 더더욱 집중도에서 차이가 컸고요.”

“평소라면 내가 현장에서 조율을 도왔을 텐데, 바빠서 옆에 있어 주지를 못했구나.”

“현장 분위기 자체는 괜찮았어요. 그냥, 제가 좀 아쉬워서 그러죠.”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지자 박 대표는 천천히 차를 멈춰 세웠다.

짧은 틈에 그는 백미러를 통해 은호와 은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떤 게 아쉬웠는데?”

“저도 은지도 기회만 준다면 더 잘할 자신이 있는데, 기회를 주시질 않으시니 저희를 보일 방법이 없는…….”

대표의 질문에 은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은지는 노곤함에 못 이긴 듯 은호의 어깨에 기댄 채 잠에 빠진 듯 보였다.

신호는 다시 파란불로 바뀌었고 박 대표가 시선을 거두고 다시 운전을 위해 정면을 바라봤다.

“뭐, 그런 거죠.”

우린 우리 방식대로 한다면 더 잘할 수 있다고.

은호는 흘러가는 창밖에 시선을 둔 채 은근한 욕심을 드러냈다.

박 대표는 깊이 숨을 마시고 느리게 내뱉었다.

한숨보다는 생각을 정리하는 호흡에 가까운 숨이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현장은 디렉터의 의견을 따르는 게 내 방식이다.”

“네.”

그건 회귀를 통해 박 대표 본인보다도 그와 더 오래 일해 본 은호로선 당연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충분히 예상했던 대답이었고, 덕분에 실망하거나 아쉬운 면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당장에는 너희가 원하는 식으로는 바꿔 주기 힘들 것 같구나.”

솔직히 상황을 바꿔 줬으면 한다는 의미에서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이 방식이 불편하다’라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나로선 이야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이미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분명하게 못을 박아 둘 이야기는 아직 남아 있다.

“‘현장’은 그렇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건 무슨 의미로 하는 질문이냐.”

박 대표는 인상을 구겼지만, 운전 탓에 여전히 정면을 주시한 채였다.

“결과가 다르다면, 혹시나 아주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요.”

페이옵의 곡은 대중을 겨냥하기엔 분명 좋은 곡이었다.

작업 역시 그와 잘 맞는 가수라면 반기는 방식이겠지.

반복적으로 연결되는 외우기 쉬운 훅과 멜로디.

단순한 가사와 최신 흐름에 가까운 잔잔한 듯 발랄한 분위기의 트랩 비트까지.

냉정하게 미래를 알고 있는 내 경험에 비춰 봤을 때도 분명 ‘뜰’ 확률이 높은 곡이긴 했다.

“대충하겠다는 이야기냐.”

“에이, 아니죠.”

나는 타이틀곡을 선정하던 당시 페이옵의 곡을 반대했다.

그랬던 만큼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이은지도 마찬가지겠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저희 앨범에 들어갈 곡인 만큼 전 항상 최선의 최선을 다할 거예요.”

보란 듯 ‘최선’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강조하고 나서야 박 대표는 의심을 거뒀다.

페이옵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이은지와 나의 ‘E-ung’ 팀이 부를 ‘우리’의 곡이었다.

그러니까 난 페이옵이 만들었든 이은지가 만들었던 똑같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환경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거고요.”

작업 방식의 차이.

처음 페이옵의 곡을 접했을 땐 개인적인 감정이 일절 없었음에도 반대를 했었다.

이유는 있었다.

우리의 색이 아니었다고나 해야 할까.

나쁘진 않지만 딱 맞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녹음 때라도 우리의 의견이 들어간다면 조금이라도 우리의 느낌을 살릴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결론은?

‘페이옵은 기회조차 주지 않았지.’

그는 평일 내내 우리와 매일 20시간가량을 스튜디오에 박혀 있었다.

인트로와 아웃트로를 포함해도 채 4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음에도.

페이옵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우리가 ‘증명되지 않은 신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보기에 좋지는 않지만…….’

이해는 한다.

페이옵은 상당한 히트곡들을 낸 걸로 유명한 작곡가니까.

그는 경력이 있으니 어쩌면 열 보 물러나서 보면 그럴 만했다.

하지만…….

난 적어도 우리가 어떤 색을 가진 가수인지 알아볼 생각조차 없는 그에게 증명해 주고 싶었다.

적어도 당신 생각보다는 부족하지 않은 ‘연습생’이라고.

“잘됐네. 요즘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있거든. 은호 네 말은 증명을 하고 싶다는 거지?”

“그……렇죠. 네.”

박 대표는 입꼬리를 말며 말을 이었다.

“페이옵은 대중에 관심이 많은 작곡가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