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7)
CK E&M 스튜디오의 사원이자, 이번 OST의 작곡가 FL과 작사가 유은지가 도착하고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처음 회의의 분위기는 꽤 좋은 편이었다.
“이번 금요 드라마 <그는 1+1=1> OST로 제목은 현재 ‘마지막 날’이라고 가제로 준비했지만, 완성된 곡에 맞춰 수정될 수 있어요. 그리고 이건 현재 완성된 곡의 가이드예요.”
FL이 재생한 데모곡은 오늘 바로 녹음이 잡혀 있는 만큼 또렷한 가사가 있는 가이드였다.
“곧 방영이다 보니 급한 만큼 아무쪼록 잘 부탁드릴게요.”
확실히 당일 녹음인 만큼 촉박한 상황이긴 했다.
그래도 특별한 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은지가 불렀던 곡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나한테는 크게 다른 것 없이 알고 있는 노래 그대로였으니까.
이은지는 본능적으로 잘할 걸 알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한창 회의 중이실 텐데, 실례합니다.”
“오, 민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박 팀장님. 아니, 이젠 박 대표님이시죠?”
“하하.”
“방해꾼일지도 모르겠지만, 중간에 끼어들어도 괜찮을까요?”
“아유, 저희야 괜찮습니다.”
분위기가 비틀린 건 민기호 팀장이 사정이 있었는지 회의 중간에 참여한 그때부터였다.
“이쪽은 정홍준 부팀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확히는 민기호 팀장과 함께 들어온, 살집만큼이나 상당히 고집 있어 보이는 부팀장 정홍준이 문제였다.
“이번 곡이 슬픈 사랑의 분위기이긴 한데, 데뷔도 안 한 연습생들이 ‘제대로’ 부르기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이네요.”
“하하.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실력 하나는 보장하는 녀석들이거든요.”
“뭐, 모든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은’ 하시지요.”
대표님과 부팀장 사이에 오가는 대화만으로 그가 우리를 반기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말씀대로 ‘제대로’ 부를 수 있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정홍준의 언짢은 눈길이 튀었을 때.
난 일부러 보란 듯 뻔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까 봐야 아는 거지, 연습생.”
“홍준 씨, 은호 씨도 거기까지 하세요.”
“쯧.”
민기호 팀장의 주의에 정홍준은 혀를 차며 시선을 반대쪽으로 던졌다.
‘나도 욱하는 마음에 입을 열긴 했지만…….’
나는 지금 신인이었다.
그것도 정식적으로는 데뷔조차 하지 않은.
“죄송합니다.”
은호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정홍준의 본격적인 신경 긁는 이야기는 회의가 끝난 뒤.
스태프들 모두 자리에서 물러난, 준비에 정신이 없던 그때가 가장 심했다.
“데뷔도 안 한 신인이라니……. 아무래도 저희로서는 까 봐야 아는지라, 걱정이 많네요.”
“하하. 예,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민기호 팀장님의 귀가 옳다고 믿어 주시지요. 회의 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빈말하는 사람은 아니니 녹음 때 직접 들어 보시면 알 겁니다.”
“까 봤을 때 민기호 팀장님이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요. 큰 기대를 하진 않고 있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곁에서 흘려들은 같은 팀원도 얼굴을 구겼건만.
정홍준의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 막아서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동안 정홍준의 비꼼을 정면에서 받아치던 대표님의 얼굴에는 예상과 다르게 의외의 여유로운 미소만 만연했다.
은호는 묵묵히 그 정신력에 찬사를 보내는 것도 잠시.
정홍준마저도 회의실을 떠난 뒤, 이은지와 함께 세팅을 위해 먼저 스튜디오로 향했다.
“아무리 좋게 받아들이려고 해도 생각할수록 개빡치네.”
작곡가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파트를 나누고 가이드를 익혔지만, 두 트랙을 돌았을 때.
잘 참고 있는가 싶던 이은지가 결국 폭발했다.
“그 개 같은 새끼는 뭐 잘났다고 말을 그따위로 싹바가지 없게 나불거려!”
“좀, 좀! 밖에 들릴라, 말조심해! 이은지!”
“들으라 그래! 개돼지 같은 저 개―!”
빡!
“악, 왜 때려!”
“말 가리라고, 이것아. 여기 우리 집 아니라고.”
“아니, X발 그 X새끼 말하는 꼬라지가 꼴 받게 하잖아!”
빡!
밖에 혹여 새어 나갈까.
난 이은지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이은지의 입을 다시 한 번 틀어막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쥐어박긴 했지만…….’
솔직히 이은지가 터뜨린 화 덕분에 대신 속이 후련한 감이 전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여긴 CK 그룹의 빌딩이다.
‘비록 제안을 받아서 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처지만 봐선 여기서 을의 을이나 마찬가지.
괜히 입 한 번 잘못 놀려서 밉게 보여 좋을 건 없었다.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닌지, 은지는 잠시 투덜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집중을 이어 갔다.
하지만 쌓여 있는 울분을 토할 만한 곳이 없긴 한지, 애꿎은 담요를 비틀어 대며 화를 냈다.
난 쥐어뜯는 이은지의 손을 잠시 지켜보다,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곡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종종 울컥 솟아나는 자존심을 겨우 씹어 삼켰다.
그 사람이 회의 중에 말한 그대로.
우리가 ‘제대로’ 보여 주면 되는 거니까.
* * *
부스 안은 익숙지 않은 마이크 두 개와 평소보다 넓은 공간이 반겨 주고 있었다.
이은지와 난 자연스레 각자 마이크 앞에 서며 편한 각도를 맞췄고, 검은 악보 보면대 위에 서로의 가사가 쓰인 종이를 놓았다.
이은지의 종이는 파트를 분배한 메모를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쓰인 것 없이 깨끗했다.
반면, 내 가사 종이에는 알아보기 힘든 나만의 비밀 암호들이 곳곳에 가득 쓰여 있었다.
이은지는 눈을 감고 가사를 한 번 더 되짚었고, 나는 종이를 빤히 보며 한 번 더 뜯어 살폈다.
“자, 그럼 리허설 한 번 하고 본격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네.”
“네―.”
이제 시작할 때인 듯. 디렉팅을 맡은 작곡가 FL이 신호에 맞춰 쓸쓸한 피아노의 독주가 시작됐다.
키릭―.
피아노만으로 한가득 채워진 인트로 구간이 지나고, 어쿠스틱 기타의 코드를 바꾸는 프랫 노이즈를 시작으로 첫 벌스가 시작됐다.
곡의 시작은 깊은 울림을 품은 이은지의 목소리가 맡은 탓에, 난 조금 고개를 물리며 고갯짓으로만 리듬을 뒤따랐다.
우리가 서로의 것이라며 외치던 Last Day
날 문지르는 다가오는 네 한 걸음에 나는 숨이 막혀 와
* * *
타닥.
감각적으로 끌어 올린 슬픔이 담긴 은지의 목소리로 벌스가 시작된 순간.
녹음 부스 너머의 스튜디오 테이블 위로 볼펜 한 자루가 떨어졌다.
날 분지르는 떠나겠단 싫은 한마디
나도 이런 내가 싫은데, 나도 내 욕심인 걸 알아
떨어진 볼펜은 반대편에 놓인 토크 백에 닿기 전, 방향을 틀며 테이블 아래로 굴러갔다.
정작 펜의 주인인 작곡가 FL은 볼펜의 존재조차 잊은 채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모습이었다.
날 아프게 하지 말아
위한다면 움직이지 말아
스튜디오 내부는 은지가 입에 올린 가사 따라 그대로 움직임을 멎었다.
민기호 팀장을 제외한 누구 하나 기대는커녕 무시를 일관했던 그들이었건만.
지금은 누구 하나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무시했던 연습생의 보란 듯 시원하게 뒤통수를 맞아 얼어붙어 있었다.
‘…….’
특히, 가장 충격을 받은 얼굴은 두 사람을 대놓고 무시했던 정홍준의 표정이었다.
박 대표는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듯, 굳어 버린 정홍준 부팀장과 스튜디오 안 풍경을 눈에 담으며 여유롭게 두 사람의 노래를 들었다.
은지가 벌스를 마무리 지으며 마이크에 바짝 붙였던 입술을 멀리 떼어 내며 숨을 골랐다.
그동안 기다렸던 차례가 다가왔다는 듯, 은호가 제 마이크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그날을 기억해
우리가 처음 사랑을 속삭인 Last Day
가슴에 그대로 가사를 꽂아 버리는 게 은지의 노래라면.
은호의 목소리는 마치 쏟아 버린 커피 얼룩에 젖은 걸레질을 하듯.
은지가 쏟아 낸 감정을 관객들의 가슴에서 지지 않게 집요할 정도로 넓게 퍼트려 댔다.
네 이불에 취해 속삭인 우리의 Last Day
우리가 서로의 것이라며 외치던 그 Last Day
은지가 낮은 곳을.
은호가 높은 곳을.
서로의 위치를 자유롭게 오가며 본능에 맡긴 두 사람의 하모니는 더 이상 리허설이라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함을 뽐냈다.
우리가 서로의 것이라며 외치던 그 Last Day
날 부수려는 원망하는 숨소리에 나는 숨이 막혀 와
2절 벌스는 은지가 맡았던 1절과 달리 이번엔 은호가 시작을 맡았다.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만큼 노래에 몰입한 상태였던 은호는 천천히 반쯤 감았던 눈을 떴다.
온몸이 달아 녹아 버릴 듯 다정한 목소리와 다르게 은호의 뜬 눈은 섬뜩한 이채를 띤 채였다.
‘분명히 아무것도 안 보일 텐데…….’
은호의 시선이 정확히 정홍준은 향했다.
정홍준은 살기를 띤 시선을 온전히 맞은 채,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은호가 노래로 전하는 외침을 똑똑히 들었다.
「“그거야 까 봐야 아는 거지, 연습생.”」 //기울임
당신이 말했던 대로 깐 우리는 어때.
우리가 아직도 당신한텐 여전히 ‘제대로’ 부르기엔 모자라 보이는 ‘연습생’으로 보이냐고.
내 심장은 가난해서 하나밖에 담을 수 없어
이게 유난이라는 건 알아
은호의 외침은 편안하게 끌어 올린 고음과 함께 스튜디오 전체를 에워쌌다.
이미 은호의 고음만 해도 숨이 턱 틀어막힐 지경이건만.
뒤따라온 은지의 고음이 또 한 번 큰 하모니를 자아냈다.
감정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아친다.
이 스튜디오 안에 있는 대부분은 이미 이 노래가 질릴 만큼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하며 들었던 OST였다.
그랬는데.
베테랑 가수도 아닌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가수의 노래에 울컥거린다.
아는 노래임에도 눈물샘이 제 뜻대로 따라 주질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을 이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박 대표마저도 이번만큼은 예상치 못했는지, 그도 놀란 토끼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조난된 우린 서로에게 재난밖에 되지 않잖아
화려하지만 과하진 않은 기교로 은호가 클라이맥스를 마무리했다.
이어진 렐리는 은지가 이어받아 노래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알고 있잖아
Last Day
잊지 말아
Last Day
아쉬운 끝이 다다른 만큼 은호와 은지는 서로의 답가를 주고받았다.
그 끝엔, 하나인 듯 함께한 하모니로.
우리가 서로의 것이라며 외치던 Last Day
우리가 서로의 것이라며 외치던 그 Last Day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시하던 데뷔조차 아직이었던 연습생 남매에게 보란 듯 강하게 얻어맞은 데다, 고작 본 녹음도 아닌 리허설에서.
두 사람의 노래에 완전히 젖어 눈물까지 쏟아 내 버렸으니까.
그러니,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을 열 자격이 없었다.
그 Last Day
은호의 살기 띤 시선은 어느새 다정한 시선을 띤 채 은지를 돌아봤다.
은지 역시 노래에 취한 듯 은호의 눈길에 맞춰 평소라면 보이지 않았을 환한 웃음을 띠며 끝을 말했다.
우리의 Last Day
아웃트로의 차분하게 떨어지는 피아노 연주의 끝과 함께.
트랙은 멈췄다.
스튜디오 내부는 완전한 고요함에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