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6)
예상치 못하게 파고든 비수에 양심이 그대로 관통당했다.
“그, 그래도 저도 녹음은 좀 했으면 좋겠다 싶긴 해요. 하하.”
뒤늦게나마 어색하게 투정을 덧붙였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닌지라 찝찝한 구석은 없는 이야기였다.
대표는 은호의 대답에 별다른 대꾸 없이 씩 입꼬리를 올리다 다시 앞을 주시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가.’
기억에 따르면 항상 차가 빼곡히 들어차 있을 다리가 상당히 여유로웠다.
왠지 평화롭지만, 한편으로는 허무함이 몰려오는 밤 풍경이었다.
비록 날 향한 환호는 아니었지만, 함성으로 뒤덮인 꿈만 같던 무대가 고작 몇 분 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대에서 내려가면 꼭 세상이 바뀌어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막상 무대를 내려오자 내 세상의 변화는 없었다.
‘애초에 내 무대가 아니었으니까.’
창밖을 돌아보는 은호의 눈가가 어두워졌다.
한밤중이 되어서도 여전한 야경이 마치 무대 위에서 바라봤던 보라색 응원 봉의 향연으로 겹쳐 보인 탓이었다.
처음엔 무대에 오랜만에 선다는 들뜸도 있었지만, 실수할까 봐 더 두려웠다.
존경하던 선배의 무대라는 이유에 긴장돼서 몸이 떨렸다.
하지만 선배를 향한 환호를 들은 순간.
긴장은 여전했지만 잔잔하고 깊은 바다처럼 긴장이 차게 식었다.
「“대표님, 저 이런 잡생각 하지 않게, 제발 일에 미치게 해 주세요.”」
내 무대.
내 팬.
이은지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내내 공연, 녹음, 신곡에 치여 살던 그때 가졌던 나의 모든 것.
무대 위를 떠난 후 찾아오는 공허함은 술 대신 다음 녹음으로 채워 넣기 바빴던 그 시절.
녹음실, 공연, 행사, 행사 또 행사.
인터뷰, 녹음, 신곡 모니터링, 행사, 행사 또 행사.
이건 일주일 일정도 아니고 하루 이틀 일정이었다.
식사는 차 안에서.
숨 쉴 틈 없이 차를 타고 다음 장소로.
또 다음 장소로.
신체 배터리가 다 떨어질 무렵엔 집으로 가서 쪽잠을 청했고, 다음 날 아침엔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다시 또 하루를 달렸다.
‘그 시간이 그리워질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새삼스럽지만 지금에서의 내 위치가 실감 난다.
그래서일까.
갈증이 돌았다.
노래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곡이 아니라, 내 노래를…….
‘아니지.’
이젠 내 노래가 아니구나.
‘우리’ 노래지.
이은지를 떠올리면서 입꼬리가 올라가기는 오랜만이다.
“은호, 너도 그러고 싶다고 하니까, 잘됐네.”
그때였다.
“네?”
생각에 잠겨 있던 탓에 난 대표님과 이전까지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 황급히 기억을 되짚으며 물었다.
하지만 생각을 더듬어 도달한 마지막 대화라고는…….
「“저도 녹음은 좀 했으면 좋겠다 싶긴 해요.”」
설마.
은호는 고개를 돌려 대표를 돌아봤다.
박 대표는 운전 중인지라 시선을 맞추진 못했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입꼬리를 활짝 끌어 올리고 있었다.
“잘했다, 은호야.”
“뭘……요?”
뜬금없는 칭찬에 당황하며 대표님께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의미심장한 웃음이 고작이었다.
* * *
OST
“쇼케이스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CK E&M 스튜디오 측에서 연락이 왔었다.”
은호는 그날 대표님의 차에서 들었던 뜬금없던 칭찬의 이유를 다음 날 은지와 함께 대표실에서 들을 수 있었다.
“CK E&M 스튜디오라면…….”
은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은지가 갸웃거리며 돌아봤다.
“tvL 드라마 OST 팀인데, 거기 민기호 팀장이 어제 은호 무대를 보고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더라고.”
은호의 눈이 커졌다.
은지는 의외로 딱히 놀란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후에 이어진 대표의 이야기에 은지는 큰 숨을 들이켜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이번에 나오는 <그는 1+1=1>이라는 드라마 OST 수록곡 중에 하나를 너희한테 맡기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
“그거…….”
“알고 있는 거야?”
“네! 그럼요! 좋아하는 소설이었는데, 드라마 제작한다고 해서 관심 있었던 작품이거든요! 세상에!”
은지를 가만히 지켜보던 은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진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니가 책을 읽는다고?”
“내가 누구처럼 문맹은 아니거든.”
“문맹 아니거든!”
“믄먱 애늬긔든!”
짝!
유치한 남매 싸움이 시작되기 전.
박 대표는 크게 손뼉을 치며 두 사람의 말다툼을 막았다.
“은지야, 어떤 내용이었어?”
“그게, 해리성 인격 장애가 있는 CEO 최진이랑 평범한 회사원인 오예진이 서로의 오해를 풀어 가면서 최진의 인격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도록 돕는,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로맨스였어?”
“네. 그것도 엄―청 절절한!”
박 대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자, 은지는 눈을 빛내며 흥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게, 최진의 인격은 3명인데…….”
장난기가 많은 인격이지만 드러나 있지 않을 땐 기억이 없는 ‘현’.
현과 반대로 차분하고 삶의 의지가 없는 인격이었던 ‘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컨트롤 타워 같은 역할이자, 두 인격의 모든 기억을 알고 있는 ‘진’.
오예진은 우연히 장난기 많은 현의 레이더에 걸려 최진과 연인 관계가 됐다.
하지만 오예진이 최진이 해리성 인격 장애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고, 이별을 결심하던 그때.
두 번째 인격인 준이와 사랑에 빠진다.
컨트롤 타워인 세 번째 인격, 진은 현과 준이로 나눠진 세 인격을 하나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전쟁을 치른 후, 몸을 차지하는 인격은 본인이 되고 싶었다.
“현은 두 인격의 싸움에 밀려 결국 소멸하게 됐어요.”
하지만 열띤 싸움을 하던 ‘진’과 ‘준이’.
두 인격은 사람을 혐오함으로 인해 갈라진 인격이었고, 오예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오예진에게 위험이 닥치자 하나가 되었다.
……라는 내용이라며, 이은지는 정말 열심히 설명했다.
“이건 직접 봐야 알아. 진짜 절절하게 사랑하거든.”
이은지가 어울리지 않게 ‘꺅꺅’거리며 흥분하자, 박 대표와 은호는 당황한 눈빛을 오가며 어깨를 들썩였다.
‘……절절하긴 했지.’
드라마를 보다가 운 건 처음이었으니까.
사실 <그는 1+1=1> 드라마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이런 이은지의 반응 또한 한 번 겪은 기억이 있었다.
‘제목이 였던가.’
<그는 1+1=1>의 OST 중에서도 가장 크게 히트했던 이은지의 솔로곡.
원작을 알고 있는 덕분이었을까.
‘Last Day’는 <그는 1+1=1> 출연 배우들이 OST 중에서도 가장 스토리와 잘 어울리는 곡이라며 1위로 꼽기도 했었다.
난 드라마를 챙겨 보는 타입은 아니지만, 이은지 탓에 매 회차 강제로 함께 보다 보니 꽤 재미있어서 빠졌었던 드라마이긴 했다.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예?”
“왜요?”
드라마 장면을 떠올리다 대표님의 부름에 퍼뜩 대답하며 소리를 높였다.
은지는 대체 마음에 들지 않을 구석이 어디 있느냐는 듯, 공격적으로 대표에게 되물었다.
“응? 사랑 노래인 데다, 그걸 너희 둘이 같이해야 하니까?”
“아. 그건 괜찮아요.”
“저도, 이젠 딱히 신경 안 써요.”
은지의 태연한 대답에 나도 뒤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박 대표는 두 사람의 성장이 감동에 겨운 듯, 인중을 검지로 가볍게 닦아 내며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후엔 앞으로의 일정과 간단한 스케줄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럼, 전 먼저 올라가서 마저 작업할게요.”
“그래.”
은지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은지가 떠나고 대표실에는 박 대표와 함께 전원 버튼을 닮은 ‘이응’ 로고를 살피던 나만 남아 있었다.
“은호야.”
“네?”
“기분 나쁘진 않으냐?”
“……?”
“네가 따 온 일이니까.”
“그거야 뭐, 이젠 팀이니까. ‘우리’ 일이죠.”
일부러 ‘우리’를 강조하며 대답하자 대표님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조용히 입꼬리를 말며 눈을 감았다.
다시 뜨인 박 대표의 시선은 쌓여 있는 서류 더미로 옮겨졌다.
“네가 진짜 크긴 했구나.”
하하.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원래의 나였다면 왜 내가 따 온 일을 이은지랑 나누냐며 별별 투정을 다 부렸을 테니까.
‘참 철없었지.’
그땐 그랬다.
앞으로 우리의 앨범에 박힐 로고를 엄지를 움직여 슥슥 쓸어 봤다.
‘우리 팀이라니.’
막상 입에 올리니까 왠지 간질간질한 기분이지만 그게 나쁘진 않았다.
살살 말려 가는 입꼬리가 민망한 기분에 어정쩡하게 비틀렸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우리는 대표님과 함께 회의와 동시에 녹음을 위해 CK E&M 스튜디오 팀이 있는 서울 CK E&M 빌딩으로 향했다.
“야! 이은호! 여기 남매뮤지션 사진 있어!”
“이은지, 조용해야지. 오, 진짜네.”
대표님이 먼저 이야기를 나누는 그동안.
이은지와 난 스튜디오 안에 붙은 코르크 보드에 박힌 연예인 사진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 지예찬 선배님도 있다! 역시, 폴라로이드로 찍어도 잘생겼다.”
“실물이 최고야.”
“아, 나도 보고 싶어.”
“뵙고 싶다고 해야지.”
“깐깐하게 따져 대지 마. 오, 지예찬 선배 또 있다.”
“이땐 톡신 활동 때였나 보네.”
“이때 한창 모히칸이 유행이었지.”
“모히칸……. 그거 기억나냐? 니가 나 모히칸 스타일 해 주겠다고 이발기 들고 설쳤다가 대표님이 결과물 보고 거품 물었던 거.”
“아핰. 그때 머리 내 인생의 역작이었는데.”
“역작은 무슨, 역적이겠지.”
역적이라는 말에 발끈 한 듯, 이은지는 소리치기 위해 크게 입을 벌렸다.
하지만 소리가 새 나올 틈은 없었다.
“은호야, 은지야, 이리 들어와.”
회의를 위해 사라졌던 대표님이 돌아온 덕분이었다.
난 이은지의 화를 피해 도망치듯 대표님한테 향했다.
이은지도 대표님 명령은 어쩔 순 없는지.
여전히 화는 식히지 못한 듯 씩씩거린 채였지만, 그래도 비교적 조용히 회의실로 뒤따라 들어왔다.
“민 팀장님이 매일 잘생긴 신인이라고 노래를 불러 댔었죠.”
“배우 같다고 막…….”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둥근 테이블 맞은편 자리에는 CK E&M 스튜디오 팀으로 보이는 직원들로 가득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팀 이응입니다!”
“이응입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난 각 잡힌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이은지는 당황한 얼굴로 직원들과 은호를 번갈아 바라보다 꾸벅 따라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뒤따라 했다.
하하하하.
한 번 들으면 기억에 남아 버리는 팀명 덕분일까.
회의실에 잠시간 큰 웃음이 떠돌았다.
“팀명이 두 사람 외모나 분위기랑 다르게 귀엽네요.”
“왜 ‘이응’이에요?”
꽤 높은 위치에 있는 것 같은 한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직원이 물었다.
“저희 남매의 이름이 이은호, 이은지라서 그렇게 했습니다!”
“발음이 장난스럽기도 하고요.”
은호의 대답 뒤로 은지가 짧은 설명을 덧붙이자 회의실에는 또 한 번 짧은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에 앉고 본격적인 회의에 돌입했을 때.
“말씀대로 ‘제대로’ 부를 수 있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은호의 대답으로 회의실의 분위기는 언제 밝았냐는 듯 싸늘하게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