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비즈니스로 일합니다 (15)
“주연 씨, 톡신 팬이라고 했던가?”
“아, 네. 좋아하죠. 무진장.”
“어머, 잘됐다. 난 이런 쪽에 딱히 관심이 없어서, 기왕이면 좋아하는 사람이 갔으면 했거든.”
“무슨…….”
일에 치여, 덕질도 잊고 현생에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주연의 팀장은 손뼉을 치며 가방을 뒤적이더니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들며 말을 이었다.
“짠! 나 아는 사람이 지예찬 솔로 데뷔 쇼케이스 좌석표를 줬거든.”
“지예찬 쇼케이스 좌석표…….”
지금은 비록 휴덕이었지만 주연은 톡신의 오랜 팬이었다.
“주연 씨한테 이거 줄 테니까, 나한테 커피…….”
“다녀올게요!”
팀장의 커피 하나에 표를 넘겨주겠다는 제안에, 주연은 대답 대신 당장 가까운 카페로 달려갔다.
그리고 며칠 뒤.
서울 XX 백화점 홀.
주변을 돌아보자 다들 주연과 같이 상기된 얼굴인, 같은 봉을 든 팬들이 가득하다.
주연의 손에도 그들과 같은 봉이 있었다.
사용감이 전혀 없는 보라색 물방울 모양의 응원 봉.
학창 시절부터 아껴 온 보물인 톡신의 팬 봉이 제 역할로 빛을 낼 시간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오빠아―!!!”
주연의 목은 이미 오현의 등장에 다 쉬어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래도 지예찬의 등장은 놓칠 수 없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부터 바라본 첫사랑이자, 첫 그룹.’
콘서트는 학생 신분에 10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라서 시도할 돈이 없어서 번번이 가지 못했었다.
성인이 되고 돈이 있을 땐, 높은 티켓팅의 벽 앞에 늘 무너졌다.
심지어 따로 구해 보려고 했었지만, 이미 부르는 게 값이 되어 버린 톡신의 콘서트 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지예찬이 등장한 직후, 주연은 울컥하는 마음을 몇 번이고 다스려 가며 끝까지 다른 팬들과 함께 함성을 내질렀다.
말은 쇼케이스였지만 주연에게는 미니 콘서트와 다를 게 없었다.
지예찬의 타이틀곡 무대를 맨눈으로 보게 됐을 땐 너무 행복해서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지예찬이 앨범을 설명할 땐 봉을 소중하게 꼭 쥔 채 이야기를 들었다.
내 느낌이 경고해
그래
네가 말하려는 그거
주연은 지예찬의 2번 트랙에서 낯선 목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솔직히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노래 잘하네.
우리 오빠 곡에 잘 어울리네.
딱 그 정도.
“Co-Sign을 소개해 드리면서, 저는 이만 떠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톡신 멤버 오현이 쇼케이스의 끝을 알리며 떠날 땐 아쉬운 마음에 함께 탄식을 흘렸다.
그래도 이 아쉬움을 달래 줄 마지막 무대가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 Co-Sign 무대가 시작됐을 때.
지예찬의 유려한 춤을 감상하며 주연은 열심히 다른 팬들과 맞춰 봉을 흔들었다.
내 느낌이 경고해
아직 네가 오기 전인데
앨범 트랙을 설명하던 그때 들었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하이라이트 소개를 할 때 들은 목소리보다는 조금 더 힘이 실려 있었다.
낯선 그 남자가 무대 중앙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는 곳에 섰다.
테이블 위 한 송이
오늘따라 붉어 보여
지예찬 오빠가 오현보다 잘한다며 칭찬했던 그 신인인 것 같았다.
깔끔하게 끌어올린 머리칼과 차갑게 찢어진 눈매.
한 성깔 할 것 같은 겉보기와 달리 마이크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신경 끄고 싶은데
웃고 떠들고 싶은데
주연은 자신과 같이 봉 움직임을 저도 모르게 멈칫한 팬들을 돌아봤다.
응원 봉의 움직임이 멈춘 곳은 백이면 백 모두가 그 신인에게 홀린 듯 그를 보고 있었다.
내 숨이 틀어막혀
신인이 제 목을 움켜쥐며 가빠진 숨을 뜻하듯 걸음을 물렸다.
주연은 어느새 안무에 홀려 지예찬을 봐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였다.
‘오빠를 봐야…….’
생각을 의식하고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였다.
그 신인과 눈을 마주쳤다.
뺨이 뜨거웠다.
멤버들이 있는 배지, 포토 카드, 브로마이드 등.
꼭 톡신을 처음 접하고 톡신의 모든 것을 미친 듯이 수집하던 그때만큼이나 들뜬 기분이었다.
내 느낌이 경고해
가사 따라 말 그대로 심장이 경고하는 것 같았다.
죄악감이었다.
8년간이나 톡신 한 그룹에 온 마음을 다 바쳐 가며 좋아했었다.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건 배신이라 생각했었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 친구와 배신이니 마니 싸우다 우정을 잃었을 정도로.
그랬는데.
그래
네가 말하려는 그거
이름조차 기억에 남지 않았던 신인이 8년 동안 쌓아 둔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안무인 듯 신인은 박자에 맞춰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시선을 맞춰 온 자신에게 마치 고맙다는 양, 인사를 대신하며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주연은 죄악감마저 삼켜 버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미쳤다고.’
중학생 시절, TV 속 데뷔를 알리는 톡신을 처음 마주했던 그때 느낀 팬심이 이랬던가?
아니, 오히려 첫 썸을 타며 설렜던 그때 감정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주연은 혼란스러웠다.
이렇게까지 좋아 미칠 것 같은 감정은 오랜만이라서.
* * *
“팀장님, NRY 엔터테인먼트에서 준비 중인 남매 그룹 연습생이라고 합니다!”
“NRY가 어디야?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인데?”
“TaKa 엔터테인먼트에 유명한 사람 있었잖아요?”
“TaKa에?”
민기호 팀장은 미간을 구기더니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떠오른 듯 그는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박창석 팀장!”
“예, 맞아요. 그분이 퇴사 후에 세운 기획사래요.”
“박창석 팀장 퇴사한 지 꽤 됐잖아?”
“지방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대요.”
“아하.”
민기호는 곰곰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눈을 흘기며 물었다.
“저 연습생, 요즘 바쁜 것 같아?”
“전 기자 말로는 NRY 대표가 스튜디오 예약을 하루도 안 빼먹고 꽉꽉 잡고 있다던데요.”
“빨리 잡아 놔야겠네.”
“쟤로 하려고요?”
“왜?”
“아니, 그래도 조금 더 인지도 있는…….”
민기호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양, 한 손으로 귀를 막았다.
“넌 지금 저걸 듣고도 그런 소리를 하냐?”
“저희 곡 조만간 방영 예정인 건 알고 계신 거죠?”
“그렇게 밀릴 때까지 왜 미뤘는지 생각은 하고 입을 놀리는 거지?”
“그건…….”
민기호는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는 양, 손목을 까딱였다.
“헛소리할 시간에 빨리 박창석 팀장. 아니, 박창석 대표님 연락처나 알아 와.”
“예? 지금요?”
“지금 말고는 시간 없어. 그 사람 일할 때는 한 방에 처리하는 인간이라고 했으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하…….”
민기호는 따지고 드는 팀원이 답답한 듯,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계획을 잡고 있을 때 밀어 넣는 거 아니면 안 받아 줘. 그 말은, 저 신인 놓치면 우리 진짜 이번 OST 아무나 쓰게 될 수도 있단 말이라고!”
* * *
“은호 씨,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어서 걱정했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잘 따라와서 나 놀랐잖아.”
“선배님께 약속했던 대로, 열심히만 했습니다.”
“진짜 고마워요. 고생했어요. 기대 이상으로 잘해 줬어.”
“저야말로 이런 기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예찬은 꽤 힘이 실린 손으로 은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다 손을 뗐다.
“뒤풀이 가실 거죠?”
무대가 끝난 것을 기념하자며 스태프들 중 꽤 높아 보이는 사람이 물었다.
하지만 피곤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일까.
“저도 오늘은 좀 지쳐서. 오늘은 시간도 늦었는데 쉬고 다음에 모이죠.”
지예찬의 단호한 거절에 그는 잠시 어깨를 들썩이다 호쾌하게 웃으며 그러는 게 좋겠다며 받아들였다.
덕분에 안무팀과 스태프들은 일찍 흩어져 퇴근을 맛볼 수 있었다.
‘말이 ‘일찍’이지.’
그래 봐야 막차도 다 끊겨 버린 늦은 시간이다.
백화점 건물을 빠져나온 은호는 고개를 들어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밝은 밤하늘을 바라봤다.
빛나는 거라곤 인공위성일 게 뻔한 반짝임뿐인 하늘이었다.
‘나는 기숙사로 어떻게 돌아가야 하나.’
막막함이 늦은 밤의 찬 바람과 함께 뺨에 스친 그때였다.
“은호야.”
반가운 목소리에 방금까지만 해도 천 근 같던 발걸음이 건물을 나오자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대표님!”
“뒤풀이는?”
“선배님이 거절하셔서 보시다시피요.”
“하긴, 예찬이는 일 끝나면 술보다 집에 가서 침대에 눕는 걸 더 좋아하는 놈이니까.”
대표님의 고갯짓에 시선을 옮기자 익숙한 검은 세단이 있었다.
“무대는 잘했고?”
“저 이은호입니다. 하하.”
“실수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에이, 선배님한테 칭찬 듣고 왔어요.”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랬으면 다행이고. 고생 많았다.”
대표님의 목소리에서 문득 웃음기가 가신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대표님은 이미 운전석에 올라탄 후였다.
뒤늦게 조수석에 오르며 대표님을 다시 돌아보자 창밖을 바라보는 대표님의 표정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임시였던 녀석이 개인 사정이 생겨서, 한동안은 또 나랑 움직이게 될 것 같구나.”
그림자의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에둘러 이야기하셨지만, 수습 기간 중이었던 매니저가 또 관뒀다는 이야기였다.
‘몇 년을 같이한 그 매니저 형도 2년은 더 흘러야 입사를 했었던가…….’
NRY 엔터테인먼트는 대표님의 화려한 경력에 비해 작은 기획사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미래가 불투명한 회사처럼 느낀 걸까.
매니저나 직원들까지, NRY 엔터는 발판일 뿐. 어느 정도 일을 배웠다 싶을 때쯤, 직원 중 대부분은 흔히 다른 기획사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 보니까, 은호는 은지랑 다르게 재촉이 없었네?”
“그런가요?”
“은지는 요즘 돈 다 떨어지기 전에 빨리 곡 내자고 하루에 두세 곡을 들이밀고 있거든.”
하하.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무거워진 공기를 순환시켜 보려 애써 봤다.
하지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솔직히, 걱정이 없다고 해야 할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회사의 성장이 시급하다 보니 마음이 급한 만큼 데뷔를 급박하게 잡아도 될 법하건만.
‘어차피 어떤 말을 한들…….’
대표님은 대충 보이느니 안 한 것만 못하다 하시니까.
게다가 경험이 만든 감은 무시하기 힘들다.
난 대표님의 그 ‘감’을 몸소 겪고 돌아왔기 때문일까.
그래서 걱정이 없었다.
‘그땐 이은지가 먼저였지.’
남매 듀오를 포기하자마자 나는 아직 과한 느낌이 있다며 조금 더 심화 레슨에 들어갈 때, 완성형이었던 이은지는 먼저 데뷔하게 됐었다.
대표님의 감이 틀리진 않았는지…….
‘이은지는 크게 터졌지.’
남매인 나는 닿을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이.
말 그대로 날아올랐다.
“전 대표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때’를 믿어서 그래요.”
“……요즘 보면 은호 네가 갑자기 몇 년은 더 살다 온 것처럼 느껴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