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아직 끝나지 않은 위협 >
우리들은 하산을 마치고 다시 눈길을 걸어 노슬론 마을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사람들은 오는 길에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얼음 호수도 구경했고, 경치도 구경할 겸 커피와 홍차도 끓여마셨다.
블루스 노인과 회장님 정도를 제외하면 다들 현실에선 등산과 산책에 인연이 없는 사람들인데도 즐겁게 사이버 휴양을 즐겼다.
새삼스레 장기래씨의 바람이 생각나서 뭔가 기분이 묘했다.
여하튼 얼마지 않아서 노슬론 마을에 도착했고, 우리들은 더 지체할 것 없이 마법사 길드로 향해서 텔레포트를 했다.
짧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 것 같은 여행이 끝나고, 하펜 마을의 마탑으로 돌아왔다.
“응?”
“어라?”
하지만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히 하펜 마을의 광장을 좌표로 텔레포트를 했는데, 우리들은 마탑의 1층으로 텔레포트가 되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은 이들이 있었다.
바로 메이거스의 병사들과 대마법사 사이퍼였다.
나와 미나는 그것에 놀랐지만, 다른 이들은 지혜 정도를 빼곤 경계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시화는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했다.
“진정하시오, 흑태자. 적대적인 이유로 그대들을 이곳에 강제 소환한 것이 아니오. 미안하오, 긴히 볼 일이 있어서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소.”
대마법사 사이퍼가 나서서 시화를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적대적인 제스쳐는 아니었고, 주변의 병사들은 그저 의장의 목적일 뿐인 것 같았다.
곧 시화가 말했다.
“저에게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면 공진씨에게 목적이 있는 겁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둘 다라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들어주었으면 하는구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승전을 축하하는 것치곤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하아, 바로 보았네. 좋지 않은 일이 생겼으니 내가 직접 와 그대들을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이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큰일이란 말에 군신 길드원들이나 회장님, 그리고 블루스 노인이 쑥덕였다.
나도 그 큰일이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앞으로 나섰다.
“대체 무슨 일이죠? 적들은 물리쳤는데요. 아직도 공격한다고 합니까?”
“확실히 그대가 부른 강력한 공룡의 힘 덕분에 우린 승리할 수 있었네, 하펜의 영주 공진. 보통이라면 이걸로 승리일 걸세. 적들은 그 공룡······.”
“이름은 데이지입니다.”
“······그래, 데이지의 힘을 이기지 못할 테니, 남은 것은 항복 뿐이지. 보통의 경우라면 말일세.”
“그 말은 보통의 경우가 아닌 일이 생겼단 말이군요.”
“그렇다네. 그거에 대해선 나보다 다른 사람의 설명이 더 적절하겠군.”
사이퍼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사이퍼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도 낯익은 자였다.
바로 밀리아리움의 대사로 찾아왔던 말론 대사제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하펜의 영주시여.”
“오랜만이군요. 말론 사제님.”
“우선 그대들을 보자고 한 사람은 저입니다. 갑작스런 만남에 먼저 사죄드립니다. 메이거스와 사이퍼의 탓은 아니니 양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밀레스가 항복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대체 본론을 묻자, 말론의 얼굴도 그다지 좋아지진 않았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본래 밀레스는 패전 소식을 듣고 곧바로 평화협상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반정이 일어났습니다.”
“반정이라면 쿠데타 말입니까?”
“예, 하지만 평범한 반정이 아닙니다. 마족을 위시한 사악한 반정이었습니다.”
“마족? 마계라면 세계수의 숲에 가로막혀 오지 못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 게임에 대해서 시화나 블루스 노인처럼 빠삭하진 않았지만, 세계수의 숲에 가서 들은 것을 잊어먹진 않았다.
마계는 세계수의 숲 북쪽에 있고, 틀림없이 마족들은 그곳에 있을 것이다.
엘프들이 감시하고 있을진데, 어째서 밀레스에 마족들이 있으며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단 말인가?
“이 반정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입니다. 물론 마왕군은 세계수의 숲을 넘어 올 수 없습니다. 그곳의 엘프들과 수호자들 때문이죠. 하지만 밀레스의 어둠에 기생한 마족의 첩자들이 소환진을 만들어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마왕군 전체를 이동시킬 순 없어도, 선발대 정도는 보낼 수 있지요. 그리고 그 규모는 선발대라 하여도 위협적입니다.”
말론은 자초지종을 침착하게 말했다.
나를 비롯해서 그 사실을 듣는 모든 이들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럼 마왕군의 수는 대체 어느 정도입니까?”
“대략 5만. 저희들이 가진 군대의 수를 압도하는 수준이죠. 숫자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 개개인의 힘도 강력한 편입니다.”
“······.”
침착한 시화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서렸다.
5만······ 이번 하펜 영지의 전투와 비교해보면 상당한 숫자다.
난 더 큰 위협이 생겼다고 생각하면서도 데이지라면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란 생각을 했었다.
“하펜의 영주시여. 그대가 부른 공룡의 힘은 강대하나, 5만의 마족 병력을 무찌를 순 없을 겁니다. 또한 그들의 군세는 마족만이 아니라 반정을 일으킨 밀레스의 세력도 있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패전한 잔당과 이방인 연합입니다.”
“헥토르······ 아직 포기하지 않았군요.”
시화는 자신의 라이벌의 이름을 말하면서 심각한 모습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말론에게 물었다.
“대체 반정은 누가 일으킨 겁니까? 헥토르가 주도한 겁니까?”
“아닙니다. 반정을 일으킨 인물은 이방인이 아닌 이 세계의 주민입니다. 바로 왕실근위대장 아서. 일전에 이곳의 대사로 온 인물이지요. 기억하십니까, 흑태자, 그리고 하펜의 영주여.”
“그······ 상당히 위압적이었던 사람 말이군요.”
아서는 굴복하지 않으면 정복하겠다는 식의 말을 했던 밀레스 쪽의 대사였다.
말론의 말에 따르면 그 자가 마족들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킨 모양이다.
어쩐지 큰일을 저지를 것 같은 자이긴 했는데, 이런 식일 줄은 꿈에도 알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는데, 말론이 계속 말을 이었다.
“우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요. 저희 밀리아리움은 이 불경한 위협을 묵인할 수 없기에 메이거스와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메이거스 쪽에서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럼 힘을 모으기 위해 저흴 찾은 거군요.”
“예, 군신 길드의 힘과 다른 이방인들의 힘을 결집시키려면 흑태자님과 영주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번 싸움에서 두 분의 활약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방인들을 군대로 모집해주지 않겠습니까?”
“전투가 끝난 직후라 쉽지 않을 텐데······ 선전포고 시간은 어떻게 됩니까?”
시화의 물음에 말론은 고개를 저었다.
“신사협정은 인간끼리의 싸움에서만 적용됩니다. 마족을 상대로는 해당사항이 없지요. 따라서 그쪽이든 우리쪽이든 언제든 공격할 수 있습니다.”
“난감하군요. 전투가 끝나서 쉬러간 사람들이 많을 텐데······ 잠깐, 혹시 공격을 계획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시화는 말론의 마지막 말에 약간 위화감을 느꼈는지 그런 질문을 했다.
그러자 말론은 다소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이 예리하시군요. 맞습니다. 저흰 전쟁의 조기종결과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공격을 계획중입니다. 대마법사 사이퍼가 온 이유도 대규모 텔레포트를 하기 위해서이죠.”
“그래선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상대는 5만이 넘는 병력이지 않습니까? 저희는 다 합쳐도······.”
“3만을 넘기 힘들겠죠. 하지만 비장의 수가 있지 않습니까?”
“비장의 수? 데이지를 말하는 거라면 그건 한계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말론은 시화의 추측을 부정하면서 다음 할 말을 이었다.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창조주를 만나고 왔지요?”
“그걸······ 어떻게 아시는거죠?”
“계시가 내렸습니다. 조금 전에 만나 뵙고 그분의 유지를 받들었다고요. 아마 그렇다면 그곳을 지키고 있던 빙룡 쿠샬도 죽였을 테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사냥한 이유도 있지 않습니까? 바로 최강의 마장기 마일스톤을 만들기 위한 재료인 드래곤하트를 얻기 위함이지 않았나요?”
“그건······ 그랬습니다만,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전쟁이 길어지면 해결할 방법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런 예상은 빗나가고, 뜬금없이 마족과 인간의 싸움이 되어버렸다.
그런 사실이 다소 황당하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재료가 아직 부족합니다. 보석도 많이 필요하고 철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축성 받은 마일스톤이란 게 필요합니다.”
“후후후······ 제가 구태여 이곳에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설마······ 그걸 가지고 계신 겁니까?”
말론은 대답대신 염화미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사람을 시켜 조심스레 운반되고 있는 ‘마일스톤’을 가져왔다.
시화가 일전에 길 안내용으로 편리하다는 그 마일스톤이다.
그리고 이 게임 속 세계에서 십자가처럼 쓰이는 것이라고 들었다.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조건이라면 이 성전에 참전해주시는 겁니다. 바로 전설적인 마장기 마일스톤을 만들고서 말이죠.”
“그건······ 가능은 할 것도 같긴 합니다.”
나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 마일스톤에 손을 뻗었다.
내가 그것을 취해도 그들은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축성 받은 마일스톤 획득]
이걸로 마장기의 주요재료가 전부 모였다.
보석과 쇠가 잔뜩 필요하긴 하지만 그건 어떻게든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로봇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전율적인 제작물을 만들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마장기를 만들어도 이길 수 있을까요?”
“저희 사제와 성기사단이 방패가 되고, 메이거스의 화약과 마법이 창이 될 겁니다. 흑태자여, 믿음을 가지고 세력을 규합해 힘을 보태주신다면 우린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믿음보다 저는 현실적인 방법을 믿습니다. 사람들을 모으려면 어떡해야할지······.”
시화가 그런 말을 하면서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회장님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보게 시화군. 아무래도 내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군.”
“회장님?”
“내게 아주 좋은 수가 있지. ‘돈은 늘 옳다.’라는 해결방법 말이야. 이번 전투에 3억밖에 안뿌렸는데 사람들이 아주 환장해서 참전했잖아? 그걸 또 써먹는 거야. 우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참전을 알리고, 친구도 데려오면 돈을 더 주겠다고 말하는 거야. 거기에 성과급도 대충 던지면 벌떼같이 몰려올걸?”
“그, 그럼 돈이 많이 들텐데요.”
“난 10억 정도 쓸 생각인데, 그걸로도 모자라겠나?”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시화는 황당해하며 대답했다.
“난 말이야, 내 걸 빼앗으려고 하는 자들을 놔두곤 두 발 뻗고 못 자!”
······아무래도 회장님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 217화 아직 끝나지 않은 위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