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방어준비 >
하지만 승리를 확신하기엔 이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테르시오 전술로 적 기사의 발을 묶은 것은 좋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발을 묶은 것’에 불과했다.
예컨대 그들을 실질적으로 처치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적 기사 기병대는 테르시오의 창술대형을 격파하다시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억누를 수 없는 돌격력과 튼튼한 갑옷으로 창을 무시하고 창병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역시 기사 병종은 쉽게 막을 수 없는 모양이군.”
블루스 노인도 그 점을 인지하곤 말했다.
창병대형 뒤편에 숨은 총사대들이 기사 기병대를 사격했지만, 그들의 갑옷은 일반 강철이 아닌지 대부분 관통하지 못 했다.
아마도 적의 최정예이니 아다만타이트나 미스릴 같은 재질로 만들었으리라.
“역시 쉽게 흘러가지만은 않네. 황소 기병대와 드라군들도 적들의 반격에 후퇴했어. 싸움이 길어지겠군.”
적 중보병의 후방을 쳣던 황소 기병대와 드라군들도 예비대로 남겨 놓은 적의 후발 보병대들이 활을 쏘면서 대응하기 시작하자, 포위당하기 전에 후퇴해야만 했다.
수적으로 우세하다보니 그런 예비대도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황소기병대와 드라군들이 물러나자, 아군 보병대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적의 중보병대에 점점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면 패배할 것 같은데요. 모루가 무너지면 진 싸움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우리에게도 아직 패는 남았네. 저길 보게.”
블루스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마탑 쪽을 가리켰다.
나와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신기한 광경이 있었다.
마탑의 꼭대기 쪽에 구름이 심상치 않게 모여든 것이다.
마치 번개라도 내리칠 것 같은데······.
찌지지지지지직
콰과아아아아앙!
그런 나의 예감이 적중해버렸다.
갑자기 마탑 꼭대기에서 전기가 일더니, 그것을 중심으로 벼락이 펼쳐졌다.
벼락은 정확히 적 중보병들이 몰려 있는 곳에 작렬했다.
번개에 의한 폭발피해 때문에 상당수의 적들이 감전당하거나 폭발에 휩쓸려 튕겨져 날아갔다.
그러자 다소 밀리고 있던 모루의 싸움이 팽팽해졌다.
그리고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번개는 여러 번 내리친 뒤 멈추었다.
“마탑의 마법지원이 저것이라네. 기대 이상으로 쓸모 있군.”
“마법지원······ 잊고 있었군요. 하지만 계속 사용할 순 없는 겁니까?”
“강력한 만큼 쿨타임이 있지. 이걸로 전세는 다시 팽팽해졌는데······ 걱정이 하나 있군.”
“무엇입니까, 어르신?”
“적들이 바보가 아니면 이런 위협을 놔두지 않을 거야.”
“그럼······.”
“저길 보게.”
블루스 노인은 나에 대한 대답 대신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상당 수의 적들이 우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략 1,000명 정도.
아군의 우회 가능한 병력인 황소 기병대나 드라군으로 견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군의 모루를 우회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닌 듯했다.
“설마, 저거······ 우리에게 오는 겁니까?”
“그렇다네. 마탑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하는 걸세. 준비도 단단히 해온 건지 사다리에 공성차도 보이는군.”
“······큰일이군요.”
나는 마을의 방위력이 저들을 물리칠 수 있을 정도인지 의문이었다.
성벽은 세워놓았지만, 적들도 사다리와 공성무기를 가지고 오는 중이었다.
반면에 우리 마을의 경비병들은 숫자가 얼마나 될까? 주위를 돌아보아 세어 보아도 1,000명의 정예군에 대적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자, 이제 슬슬 우리도 싸워야할 때 같군. 너무 걱정하지 말게, 공진군. 이 싸움은 나와 용재의 것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감히 우리 재산을 노리는 도둑놈들을 두 손 놓고 구경할 것 같나?”
블루스 노인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그런 말이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러려면 자네 도움이 좀 필요하다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마을회관으로 가세.”
“예, 어르신.”
마을 회관에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이 급박한 와중에 그런 걸 따질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블루스 노인과 회장님의 생각에 따르기로 하고, 서둘러 모두와 함께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영주님! 적들이 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마을 회관에 도착하자마자 직원이 내게 보고했다.
그들은 침착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지만, 마을이 공격받는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듯했다.
“자, 그럼 공진군. 포고령으로 퀘스트를 발주하는 걸세. 돈은 나와 용재가 지불할 테니, 두당 50만으로 마을의 모든 유저들을 고용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야.”
“50만이면 제가 용병을 고용했던 비용의 5배인데······ 그 정도면 200명만 되어도 1억입니다.”
“우리들이 그 정도 돈에 꿈쩍이라고 할 것 같은가? 영지를 잃어서 날리는 돈이 더 크다네. 쓸 때 없는 걱정 말고 어서 하게나.”
“······알겠습니다.”
나는 블루스 어르신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마을 회관의 직원을 통해 포고령으로 퀘스트를 발동시키게 했다.
[마을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영주와 그의 지휘관들이 마을의 방위를 위해 이방인들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전투의 승패와 상관없이 참전 즉시 50만 골드가 지급되며, 승리시 50만 골드가 더 추가됩니다.]
그런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포고령은 제대로 뜬 모양이다.
“자, 어서 바깥으로 나가세. 이것만으로는 아직 망설이는 이들이 많을 거야. 연설이라도 해서 합류시켜야 한다네.”
블루스 노인이 그렇게 말했고, 우리들은 즉시 마을로 나갔다.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면서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방금 포고령 봤어? 퀘스트 뜬거!”
“대박이야, 참전만 해도 50만 골드래.”
“근데 괜히 전쟁에 꼈다가 죽으면 곤란한데······.”
“그래도 이 전쟁 이겨야 내 농장이 무사할 텐데, 싸우는 건 좀 겁나기도 하고······.”
“그나저나 우릴 누가 지휘한다는 거야? 마을 영주? 그 농장 아저씨 말이야?”
블루스 노인의 말대로 사람들은 퀘스트에 혹하면서도 당장 퀘스트를 받아들이진 않고 있었다.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가 다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텁
“걱정말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때 회장님이 내 어깨를 잡으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리곤 언제 만드신 건진 몰라도 단상 하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어 거기에 올라서셨다.
그런 다음 또 다시 인벤토리에서 ‘확성기’를 꺼내들었다.
저런 게 있었어?
“아아, 들리는가? 주목!”
“뭐야? 확성기?”
“업적 상점 아이템이네. 저걸 돈으로 지르는 사람이 있다니.”
“순전 어그로용 아니었냐?”
“뭐 할 말이 있는 모양이지.”
“근데 저 사람 어째 낯이 익지 않아?”
회장님이 말하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주목하게 되었다.
곧 회장님은 거만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내 얼굴이 낯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뉴스 좀 보는 사람이겠다. 그래 맞다. 나 S그룹의 이용재 회장이다!”
“앗! 정말!”
“진짜네? 뭐야뭐야! 회장님도 이 게임 하는 거야?”
“부잣집 재벌 회장님 취미가 조금 소박한 것 같은데······.”
“근데 무슨 일로 지금 여기서 저러시는거지?”
회장님이 뜬금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다.
무슨 생각이신 걸까?
“시간이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다. 지금 1,000명 가량의 적들이 이 마을에 처들어오고 있다. 방어하지 못하면, 아마 군신 길드는 지게 될 거다. 군신 길드만 지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영지에 부동산 있는 농장주들! 자기 농장 지키고 싶지? 그럼 당장 퀘스트 수락해! 그리고 이 마을에서 계속 꿀빨고 싶은 사람들! 그 사람들도 당장 수락해! 여기 못 지키면 다 끝나는 거야!”
회장님이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기도 하고, 웅성거리기도 했다.
수락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회장님은 그런 사람들까지 끌어 모으기 위해서 계속 부추겼다.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할 사람들이 있긴 할 텐데, 지금은 급해서 시간 들여 설명할 순 없어! 게다가 아직도 고민하는 사람들! 그래, 맨입으로 싸워주기 어렵다 이거지? 좋다! 내가 더 성과급 지급할게! 지금부터 당장 참전해서 적 한 놈 처치할 때마다 30만골드씩 추가지급된다. 여기 퀘스트 발주서에 대고 말하는 거니까 즉시 적용되고, 자동지급이야. 지금 여기로 오는 적들은 1,000명이니까 계산해봐. 총 3억 골드 걸린 성과급이다. 정부에서 나보고 일자리 만들어내라고 하는데, 지금 만들어내고 있잖아? 게임하고 돈 벌고 일석이조니까 당장 참전해!”
“우오오오오오오오!”
회장님이 거기까지 연설하자, 사람들은 갑자기 열광하기 시작했다.
“야, 저거까지 걸렸는데 가만히 있으면 흑우야. 당장 참전하자!”
“그래! 꽁돈 벌 기회라고!”
“내, 내 레벨에 누구 죽이는 건 무리겠지만······ 참전만 해도 잘하면 백만 골드네?”
“내 농장은 내가 지킨다!”
사람들은 각오를 다지면서 퀘스트를 수락하여 참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을 내에 있던 모든 유저들은 참전하게 된 듯했다.
회장님은 만족스런 모습으로 웃으며 확성기에 다시 말을 하셨다.
“자, 다들 참전했지? 그럼 어서 성벽으로 간다! 저쪽이야 저쪽! 엉뚱한 곳 가지말고 어서 성벽 쪽으로 집합! 거기서 계속 지휘하겠어!”
회장님은 그렇게 말하곤 단상으로 내려왔다.
아무래도 돈이 걸린 일이다 보니,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걸로 싸울 사람들은 모인 모양이군.”
블루스 노인도 만족한 모습이었다.
한편 지혜는 약간 창피한지 얼굴이 빨간 모습이다.
“회장님, 엄청 강단있으신 분이시네요.”
“하하하······.”
미나는 내게 그런 말을 했고, 나도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자자, 그럼 어서 가자! 아자! 내가 간다!”
회장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위풍당당한 전사처럼 성벽 쪽으로 향했다.
우리들도 회장님을 곧 뒤따르려고 할 때였다.
“영주님! 저희도 돕겠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빠져나가서 비교적 한적해진 마을광장으로 몰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저가 아니라 NPC들, 그러니까 마을 주민들이었다.
식료품점 아가씨, 제과점에서 일하는 식료품점 아가씨의 동생, 대장간의 해밀튼 씨, 의류점의 노라, 그리고 예술사 길드의 사람들, 정령술사 시스, 아카데미의 교장······ 그 외에도 마을의 주민으로 보이는 이들이 전부 왔다.
“여러분들은······.”
“영주님, 저희 마을을 저희가 지킬 수 있게 해주십시오!”
대표로 아카데미의 교장이 나에게 말했다.
모두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여러분은 주민이지 않습니까? 죽으면 저희처럼 되살아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을을 침략자들에게 뺏기면 저흰 착취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저흰 영주님의 통치가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저희 힘으로 영주님을 지켜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죽으면 끝인 그들을 싸움에 참가 시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들의 뜻이 확고해보였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니, 받아들이는게 어떤가, 공진군?”
그리고 블루스 노인도 합리적인 지적을 했다.
확실히 지금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긴 했다.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해주십시오.”
나는 거래처의 바이어에게 인사하듯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하면서 말했다.
< 210화 방어준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