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성벽 건설 >
“농장에 가기 전에 마을 회관이랑 아카데미를 들리려고 합니다만······.”
나는 블루스 어르신께 먼저 가있어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
“따로 다닐 필요가 뭐있겠나. 같이 가세. 아니면 노인네와 다니긴 귀찮은 겐가?”
“물론 아닙니다, 어르신.”
블루스 노인의 농담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이들, 이를 테면 회장님이나 시화도 딱히 먼저 농장에 가고 싶다거나, 다른 곳에 가려는 생각은 없는 듯했다.
먼저 찾아가기로 한 곳은 마을 회관이었다.
“오셨습니까, 영주님!”
회관에 들어서자, 업무 중이던 3명의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서 군례를 취했다.
촌장의 후임인 셈인 이들은 일종의 ‘공무원’이 된 셈이라선지 다른 곳보다 유달리 군기가 들어있다.
불성실한 것보단 좋지만, 어차피 NPC는 충성스럽기 때문에 다소 부담스럽다.
하지만 뭐, 이것도 NPC들의 개성이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별 다른 민원이 없나 알아보러 왔습니다.”
“대부분의 민원은 저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건, 영주님의 결재를 기다리는 민원이 있습니다.”
그는 곧 서류 하나를 건넸다.
흡사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양식의 글이었다.
[친해하는 영주님에게, 하펜 마을에 사는 주민으로써 하펜이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최근 밀레스 쪽에서 우리 마을을 노리며 군사력을 증대시키고 있단 소식 때문입니다. 그들의 침략이 머지 않았을 터인데, 우리 마을은 풍족해지고 문화적으로 융성해지긴 했지만 침략이나 재난에 대비한 방어시설은 아직도 소박한 듯합니다. 마을의 커진 가치에 비해, 방어시설이라고 해봐야 조잡한 목책이 전부입니다. 만약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이 점은 큰 약점이 되지 않을까요? 이미 많은 공감대가 만들어진 일입니다. 영주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많은 이들이 성벽을 쌓는데 자원할 것입니다.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 나라와 영지와 영주님에게 무한한 영광이 있기를. -앞날을 걱정하는 시민 올림.]
“무슨 민원입니까?”
“성벽을 만들어달라는 민원입니다. 이 편지에서도 밀레스의 침략이 곧 있을 거라는 말이 적혀 있네요.”
“소문에는 저희보다 NPC들이 더 민감하니까요. 그럼,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안 될 건 없고, 오히려 타당하다고는 보는데······ 전술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지금 생각하고 있는 전투 시나리오에는 성벽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적들이 ‘선전포고’를 하면, 저희 길드와 메이거스 군이 나설겁니다. 상당한 대군이기 때문에 성 안에서 방어하는 것은 도리어 병력의 운용력을 반감시킬 수 있거든요. 그리고······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반드시 요격을 해야합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요?”
“공진 씨의 농장이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성에 틀어박혀 버리면 그곳을 약탈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공진 씨의 농장 뿐만 아니라 부동산을 산 다른 이들 모두 그렇죠.”
“약탈······ 게임상이어도 전쟁 약탈은 패널티가 없는 겁니까?”
“있긴 하지만, 국적이 달라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수준입니다.”
시화의 말을 들은 나는, 생각보다 이 사안이 중요한 일인 것을 느꼈다.
성벽을 세우고 요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안전하긴 하지만, 그런 전술을 펼쳤다간 군신 길드가 욕을 먹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에게도 피해가 없지 않을 것이다.
내 농장이 털린다면 그것도 문제지만, 만약 이 일대의 농장들이 전부 털려서 내게 임대료를 내지 못하거나 땅을 포기하게 되어버리면 내 수익도 줄어 버린다.
그렇게 그것에 연연하는 것은 아니어도, 멍청한 선택으로 손해를 발생시키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그럼 성벽의 필요성은 영 없는 겁니까?”
“굳이 따진다면······ 그건 아닙니다. 특수한 상황을 가정하면 역시 없는 것보단 낫습니다.”
“어떤 특수한 상황을 말씀하시는 거죠?”
“보통의 약탈은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이뤄집니다. 하지만 승패와 관련 없이 적에게 피해를 주고 싶은 이들이 간혹 있죠.”
“설마······.”
“네, 일부 병력을 전장에서 이탈시킨 후, 먼저 약탈을 명령하는 겁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런 목책으로는 소수의 병력에도 유린당할 수 있겠죠.”
“적이 그런 수까지 쓸까요?”
나는 그건 좀 잔혹한 짓같다고 생각했는데, 시화는 무덤덤히 말했다.
“현실에선 이미 남북 전쟁의 셔먼 장군 같은 이들에 의해 더 잔혹하게 이뤄진 전술입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지는 한, 어떠한 전쟁도 이긴 전쟁은 없다는 말이 생기게 한 전술이죠. 현실에서도 그럴 진데, 게임에서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아마 더 거침없이 저지를 행동에 가깝죠.”
“그럼 역시 지어놓는 게 좋겠군요. 기껏 발전 시켜놓은 마을을 파괴하게 내버려둘 순 없으니까요.”
나는 이 건을 승인하기로 마음 먹었다.
안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참 흥미진진한 일이군! 동시에 괘씸해! 내 돈줄을 망치려고 하는 놈들이라니, 나는 뭔가 할 일은 없나? 음?”
나와 시화가 그런 대화를 주고받자, 회장님은 무척 흥분한 모습이셨다.
그동안 헬름을 쓰고 계셔서 잘 몰랐지만, 이런 이야기가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다.
반지의 제왕 같이, 이런 판타지스러운 전쟁 상황이 말이다.
더욱이 자신의 판돈도 걸려 있으니, 더욱 흥분한 상태였고 나나 시화에게 뭔가 할 일이 없는지 여쭙고 계셨다.
나는 딱히 회장님에게 시킬 일은 없는데······.
“만약에 적들이 교전 중에 마을을 노린다면, 성벽이 있어도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이제 이곳도 클라드 마을처럼 어느 정도는 자경단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그리고 전장에서 그들을 수비군으로 이끌 사람도 필요합니다.”
······시화는 그렇게 말하며 회장님을 바라보았다.
“저나 블루스 어르신은 본대와 함께 싸워야 합니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분이 도시의 방어를 지휘해주셨으면 하는데······ 회장님께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 물론이야! 맡겨주게!”
시화가 그렇게 물었고, 회장님은 가슴을 땅땅 두드리면서 말했다.
나는 다 좋지만, 회장님에게 너무 쉽게 일을 맡기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는데, 말은 블루스 노인이 대신해주었다.
“내 아들이니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다른 적임자가 있을지도 모를 터인데 용재에게 너무 쉽게 맡기는 거 아닌가?”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일일 뿐입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할 수도 있죠. 그리고 저는 회장님······ 그러니까 그런 직책과는 무관하게, 회장님의 리더십이나 게임센스를 높이 삽니다. 리더십이야, 현실에서 커다란 그룹을 이끄시니 두 말할 것도 없고, 게임센스는 오늘 수해 동굴에서 싸우시는 걸 보고 잘 느꼈습니다. 전략전술도 금방 익히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암, 그렇지. 맡겨주게! 실망시키지 않겠네!”
회장님은 이 일을 꼭 하고 싶으신 모양인지 또 다시 장담하듯 말씀하셨다.
흠, 회장님도 이 게임에 푹 빠지셨구나, 임원진이 보면 놀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시화가 그렇게 회장님의 게임실력을 평가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럼 성벽을 건설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헌데 한 가지 조언을 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성벽을 만드는 데에는 당연히 석재가 많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론 영주님은 정령술로 석재를 충당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하지만 지금의 목책을 성벽으로 올리는데 필요한 석재의 양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결코 영주님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겠죠. 흠, 그래서 건설업자들에게 도움을 청할 건데요.”
“평소의 건물 한 두개 정도 짓는 거라면, 그들이 석재를 구해오는 걸로 충분하겠지만, 그걸로도 힘든 대규모 작업입니다. 이땐 더 많은 정령술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정령술사 조합의 시스에게 도움을 구해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 그 방법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그녀를 바로 찾도록 하죠.”
조언을 해준 그와 악수를 나눈 뒤, 나는 마을 회관을 나왔다.
그리곤 곧바로 정령술사 길드로 향했다.
다시 사람들이 북적이는 광장으로 돌아와, 그곳에 도착하면 감개무량한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이 들락거리는 것이다.
“어서오세요, 영주님!”
그리고 그 정령술사 길드의 길드장, 시스 양이 해맑고 반가운 모습으로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스. 잘 지냈습니까?”
“덕분에 엄청 바쁜 하루하루에요! 너무 좋아요!”
“하하, 누가 보면 일 중독자 같은 발언이네요.”
“좋은 건 좋은 건데요 뭐. 예전과는 달리, 이제 정령술을 다르게 봐주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졌어요. 여전히 전투에 있어선 조금 평가가 박하지만······ 생활 스킬을 특화시킬 수 있다고 평가받고 있거든요! 실제로 마법공학이나 연금술, 농사에 관련되어서 스킬이 보정도 많이 해주고, 관련 편의용 아이템들도 많이 팔려요. 전부 영주님 덕분이에요!”
“하하, 제 덕분이기만 하겠습니까? 다 같이 노력한 거죠.”
그녀의 말이 짧은 근황보고처럼 되었는데, 여하튼 그렇게 잘 지내는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게 말이죠······.”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성벽을 지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정령술사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좋을 거라고 조언을 들은 걸 조금의 가감 없이 말했다.
“확실히 그렇죠. 정령술사들을 다수 고용하면 건설이 쉬울 거예요. 석재나 시멘트 조달이 쉬워지니까요!”
“그럼 정령술사들을 좀 고용할 수 있을까요?”
“음······ 못할 건 없는데요······ 정말 죄송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정령술사들은 다섯이 채 되지 않아요.”
“그건······ 하긴. 규모가 그렇게 클 리가 없군요.”
본래는 정령술사 길드도 없이 정령술사의 집에서 업무를 봤었다.
나로 인해서 정령술사 길드가 지어진지는 얼마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곳에 정령술사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정령술사도 마탑처럼 탑 같은 걸 만들어야 합니까?”
“아니에요.”
“아 그럼 그런 거 없이······.”
“아뇨, 그것도 아니에요. 우린 정령술사들의 궁전이 필요해요.”
“······.”
“······네, 택도 없는 소리란 거 잘 알고 있죠.”
시스는 어깨를 약간 으쓱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것을 당장 지어주신다고 해도 정령술사들이 당장 늘어나는 건 아니에요.”
“그렇군요. 다섯 명으로 공사를 하기엔 어쩐지 힘들 것도 같은데······.”
“으으음······ 영주님.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그게······ 영주님이 돈을 좀 푸신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무슨 방법이죠?”
내가 시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시스가 말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말이다.
“돈으로 해결하는 거죠 뭐. 이방인 분들 중에 정령술을 배운 사람들은 꽤 많거든요. 그 분들을 돈으로 고용하면 충분할 거예요.”
확실히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으로 고용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 201화 성벽 건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