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비단과 번데기 >
오늘도 시간이 적당히 지나서 선술집의 문을 닫았다.
손님들은 다 떠났지만, 지혜와 미나, 그리고 시화와 블루스 노인, 드래곤씨는 농장에 남았다.
미나는 지혜에게 플루트를 가르쳐주고 있었고, 시화와 블루스 노인, 드래곤씨는 유리처럼 맑은 호수에서 세월을 낚듯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템을 만들기로 했는데, 시화가 오늘 쓸 정수를 주었다.
[병정괴물개미의 정수 50개]
[아라크네의 정수 50개]
[흡혈괴물박쥐의 정수 50개]
[우루사이의 정수 1개]
[강화석 4개]
[미스릴 20개]
그 중에서 우루사이의 정수가 눈에 띄었다.
분명히 오늘 함께 싸워 얻은 것이다.
시화는 아마도 오늘 같은 전투를 하면서 상급 몬스터의 정수를 얻어온 것 같았다.
쉽지 않았는데,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주인님, 누에들이 고치가 되었습니다.”
“앗, 그럼 비단을 만들어야 하는구나.”
아이템을 만들려는데 골렘이 그런 말을 했다.
나는 한달음에 양잠소로 향했다.
축사와 산란실 중 가야하는 곳은 축사다.
산란실의 누에들은 누에나방이 되어서 또 다른 누에들을 만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비단으로 만들 수 없다.
반면에 축사의 고치들은 애석하지만 삶아서 비단실을 만들어야 했다.
축사에 들어가보니 뽕잎을 먹고 만들어낸 실크로 둥글게 고치를 친 누에들이 보였다.
[누에고치 50개]
모두 아이템화 되어 있었다.
그대로 두면 누에나방이 되겠지만, 비단을 만들기 위해선 여기서 삶아 죽여야 한다.
누에 상태에서 꼬물꼬물거리며 뽕잎을 먹던 모습을 보았던 나는 조금 슬픈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선 먹이사슬과 자연의 시스템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런 것조차 게임에서 구현되어 있단 것이 묘한 기분이었다.
애도의 시간을 잠시 가진 뒤, 나는 바깥으로 나와 가마솥으로 향했다.
그리곤 물방울에 부탁해서 깨끗한 물을 부탁했다.
냐오오옹
물방울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살짝 흔들어 하악질을 하곤 물을 채워주었다.
그다음은 불돌이로 가마솥을 데웠다.
거기에 부드럽고 토실토실한 고치들을 넣는다.
고치, 그 안의 번데기 상태인 누에들을 삶아 죽이는 것은 다소 잔인하긴 하지만, 나방이 고치를 찢고 나오면 그 고치는 쓸모가 없다고 한다.
실이 끊어지기 때문이라나? 어쨌든 누에고치 하나에서 얻을 수 있는 실의 길이는 1,500m 정도라고 한다.
믿기 어려운 정도로 긴 길이인데, 정말이지 자연의 경이로움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어쨌든 적당한 시점까지 삶아야 하는데, 원래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삶아야 하지만 게임 시스템으로 그리 오래 삶지 않아도 되는 듯했다.
[삶은 누에고치 50개]
가마솥에 넣은 누에고치들이 ‘삶은’ 이란 수식어가 붙은 상태로 바뀌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가마솥의 불을 끄고 삶은 누에고치들을 건져냈다.
본래라면 건조 작업을 위해 음지에서 서늘하게 건조해야했다.
실버와 골드가 늘어놓은 고치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혹시 하는 생각에 먹지 말라고 말했다.
말을 잘 듣는 실버와 골드는 구경만 할 뿐, 누에고치들을 망치진 않았다.
“허허, 지금 뭐하는 건가?”
“아, 블루스 어르신.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으려고 하는 중입니다. 누에고치를 삶은 뒤, 건조하는 중이죠.”
“오호! 재밌는 일을 하는군.”
블루스 노인은 삶은 누에고치들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리곤 곧 말했다.
“누에고치를 보니, 번데기 삶은 것이 생각나는군. 어릴 적에 꽤 먹었지.”
“번데기를 드셨습니까?”
“그럼. 혹시 자네는 번데기 못 먹는가?”
“아닙니다. 단지······ 블루스 어르신은 안 드셨을 줄 알았습니다.”
“허허허, 부자라고 해서 꼭 고급 음식만 먹을 줄 알았나? 그리고 번데기는 말이야, 편견과는 달리 아주 깨끗하고 양질의 음식이라네. 뽕나무 잎을 먹여 키우는 누에들은 농약에 민감해서 무척이나 깨끗하게 키우지. 단지 불행한 사고 때문에 불량식품이라는 낙인이 찍혔다네.”
“불행한 사고라면······.”
“아, 자네 나이라면 모르겠군. 번데기를 먹은 아이들이 농약에 중독되어 단체로 급사하거나 크게 병든 사건이 있었다네.”
“아······ 하지만 방금 누에는 농약을 써서 키우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네, 양잠업자들은 잘못이 없었네. 문제는 삶은 번데기를 파는 도매상이나 유통업자들이 문제였지. 내가 알기론 유통된 번데기들을 비위생적인 곳에 보관했는데, 그 중 하나가 농약성분이 묻은 포대 따위였다고 하더군. 관련자는 남김없이 쇠고랑을 찼다네. 물론 한동안 번데기 장수들은 보기 힘들어졌고 말이야.”
블루스 노인 덕분에 몰랐던 일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간식인 번데기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하긴, 유통과정에서 식품에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흔한 편이다.
그 과정에 관한 법률이 허술했던 예전에는 심각한 일들도 많았다고 하니, 사실 생산 공정뿐만 아니라 유통과정에도 엄격해야 한다.
아무리 식품 공장에서 반도체 공장마냥 위생복을 입고 식품을 만들어도, 그걸 유통하는 과정이 열악하거나 비위생적이면 소용없는 짓인 것이다.
뭐, 게임에선 그런 걱정 할 필요 없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번데기를 좀 먹어볼 수 있을까.”
“아, 물론입니다. 그런데 50개뿐이라 많지는 않겠지만요.”
“허허허, 술안주 삼기엔 적당한 양이지. 맛있게 볶아주게나.”
블루스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낚시로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화와 드래곤씨에게로 돌아갔다.
지혜와 미나는 동물들에게 둘러싸여 브레멘 음악대처럼 울음소리에 맞춰 플루트를 연습하고 있었다.
나는 평화로운 농장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다음 일을 계속했다.
음지에 건조시켜 물기가 쏙 빠진 누에고치들에게서 실을 뽑을 차례인 것이다.
“50개뿐이니까 자동물레보단 그냥 물레를 써볼까.”
목화 농업을 하면서 마법공학 자동물레와 자동베틀을 썼지만, 아직 누에고치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아서 꼭 자동물레나 자동베틀을 쓸 필요가 없어보였다.
나는 오랜만에 물레를 직접 돌리며 고치에서 실을 뽑아 번데기와 분리시켰다.
[비단실 50개]
[번데기 50개]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고 실과 번데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조금 쉴 겸해서 번데기 요리를 만들어볼까 했다.
고치를 벗기니 삶아서 갈색 빛이 도는 번데기.
이대로 먹어도 상관없겠지만, 약간 심심할 것이다.
맛있게 먹으려면 양념과 함께 볶아야 한다.
나는 혹시 하는 생각에 조리 스킬의 제작 카탈로그를 검색해보았다.
[조리, 번데기
영양만점의 간식이자, 술안주. 누에 번데기를 삶은 뒤 볶아서 고단백의 식품이다. 보통은 그냥 볶은 채로 먹어도 되지만, 조리를 하여서 양념을 해 먹으면 더 맛이 좋다. 다만 시각적으로 번데기를 먹는다는 점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다. 한국에서 대중적인 음식이 된 시점은 1960년대쯤 제사공장이 활발할 때부터 값싼 먹거리로 사랑받을 때부터였다.
필요한 재료: 번데기, 적당한 기름, 소금
추가 재료: 당근, 양파, 마늘, 고추, 후추, 올리고당, 고춧가루
필요한 도구 : 조리도구, 조합 스킬, 조리 스킬 Lv1]
조리 스킬로도 구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렵지 않은 요리라서 꼭 조리 스킬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듯도 싶었다.
다만 가지고 있는 재료가 부실하다는 점이 느껴졌다.
당근과 고추가 없던 것이다.
나는 한식에 거의 필수적인 이런 재료들을 키워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잊지 말고 씨앗을 사둬야 할 것 같다.
“자, 일단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여하튼 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기름이라면 당연히 송로버섯 기름이다.
현실에서 고작 번데기 볶는데 송로버섯 기름을 쓰는 사람은 없을 거다.
맛이 아주 기가 막히겠지만, 오늘 번데기는 블루스 어르신의 술안주행이군.
어쨌든 거기에 번데기들을 모조리 넣는다.
그런 다음 후추를 치고 소금도 치고, 고춧가루를 한 스푼 넣는다.
그다음엔 설탕을 반스푼 정도 넣어야 한다.
한식에서 매운맛은 사천식 매운맛과는 달리 매우면서도 달달한 것이 포인트기 때문이다.
그것에 아쉬운 대로 양파와 마늘을 넣었다.
그런 뒤로는 열심히 볶으면 그만인 것이다.
“맛있는 냄새가 나네, 이제 다 볶은 것 같다.”
적당히 다 볶은 상태에서 멈췄다.
고소한 냄새가 나서 정말로 맛있을 것 같았다.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이라 하나 먹어보는 것이 조금 걸렸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요리사가 자기 음식을 맛도 안보고 내놓는건 무책임한 짓이라는 것도 있어서 번데기 하나를 먹어보았다.
“음, 맛이 제대로인데?”
매콤하고 달달하고, 그리고 담백한 맛.
의도한 맛이 그대로 났다.
이것에 적당한 술은 위스키나 번데기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가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없으니 말이다.
나는 정갈하게 그릇에 플레이팅 한 후, 낚시를 즐기고 있는 시화와 블루스 노인, 그리고 드래곤씨를 향해 걸어갔다.
“블루스 어르신, 주문하신 번데기 나왔습니다.”
“오! 이거 정말 맛있는 냄새로군! 자네들도 같이 드세!”
번데기를 보자마자 시화와 드래곤씨가 입맛을 다시는 분위기였고, 곧 그들에게도 젓가락이 돌아갔다.
나는 위스키 네 잔을 꺼내 나와 그들에게 한 잔씩 돌렸다.
“크으······ 정말 맛있군요. 양념 맛도 좋아서 더 맛있습니다.”
“······.”
시화나 드래곤씨도 맛있게 먹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번데기를 집어먹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뭐 드시는 중이에요? 어머, 번데기잖아? 저만 빼놓고 먹기에요?”
그때, 미나와 지혜가 다가왔다.
미나는 번데기를 보자마자 반가운 듯이 말했다.
하지만 지혜는 조금 얼굴 안색이 안 좋은 모습이다.
“그······ 그게 번데기에요?”
“허허허, 우리 지혜는 번데기 보는 게 처음이던가? 여기 하나 먹어보렴.”
블루스 노인은 지혜에게 번데기를 은근히 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혜는 아마도 시각적인 호불호 때문에 번데기를 먹기가 좀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블루스 노인은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공진군이 만든 요리인데 우리 지혜는 먹기 싫은 모양이구나.”
“어머, 오빠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더 맛있네요.”
“허허, 미나양은 번데기 잘 먹는구먼?”
“이렇게 맛있는데, 좀 못생긴 재료라고 호불호가 갈리는 건 좀 아쉬운 일이죠. 호호.”
“······.”
블루스 노인과 미나가 그런 대화를 나눌 쯤, 지혜는 어쩐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자신도 젓가락을 받아 조심스럽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인상을 마구 썼으나, 곧 풀리는 표정이었다.
“맛있네요.”
“그치? 보기보다 맛있지? 사실은 말이야, 번데기는 못생겼을 뿐이지 다른 음식보다 깨끗하고 좋은 음식이야.”
“그래요?”
“응! 그러니까······.”
나는 블루스 노인에게 들은 상식을 지혜에게 말해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여하튼 잠깐 야유회 분위기를 내면서 휴식하게 되었다.
< 192화 비단과 번데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