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어쩐지 간에 좋을 것 같은 녀석(2) >
“저 분이 우루사이라네.”
남성 엘프 전사는 존칭을 하면서 그 곰을 가리켰다.
“굉장히······ 포악해 보이는 곰이군요. 지금은 자고 있지만.”
나는 보이는 그대로의 감상을 말했다.
눈가에는 칼자국이 나있고, 온 몸에 흉터와 상처가 나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숲의 녹색과는 이질적인, 흡사 폐기물 따위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짙은 녹색의 오오라였다.
불길하면서도 악취가 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곰 외에도 주변의 풍경이 다소 이질적이기도 했다.
어느 곳이든 푸르른 숲 속에서 그 곰이 잠든 곳만 검게 썩어 있었으니 말이다.
“언클린의 흑마법사가 우르사이에게 저주를 걸었소. 우르사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저항했지만 결국 정신을 장악당하고 말았지. 타락한 우르사이는 다른 수호자들을 공격해 상처 입은 것이오. 지금은 지쳐 잠들어 있으나, 깨어나면 그것을 반복하겠지······ 숲의 평화를 지키고 오염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를 안식에 잠들도록 해야하오. 준비되었소?”
남성 엘프 전사가 물어보았고, 그것에는 시화가 대답했다.
“준비됐습니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범상치 않아 보이니, 믿어보겠네.”
시화는 자신 있게 대답한 후, 그 거대한 곰에게 다가갔다.
그 곰이 깨어나도 상관없다는 듯이 저벅저벅 걸어가선 자신의 검, 아론다이트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기합소리와 함께 도약하여 곰의 얼굴을 검으로 베었다.
꾸워어어어엉!
그대로 곰이 즉사할 것 같은 일격이었으나, 곰은 굉음을 내면서 잠에서 깨어날 뿐이었다.
“시작하지!”
엘프 전사가 외쳤고, 우리들은 각자 전투태세에 들었다.
두 엘프 전사는 활을 꺼내 쏘기 시작했고, 나와 지혜, 미나는 총을 들어 쐈다.
네 마리의 정령들고 원거리 공격을 시작했고, 실버는 호크와 옥스와 조를 짜서 용맹히 달려가 곰의 후방을 노렸다.
시화는 당당하게 곰의 전면을 맡았다.
까앙!
곰의 날카로운 발톱을 검과 검은 갑옷으로 막는 시화였는데, 기가막히게도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걸 이렇다할 방어구가 없는 내가 맞으면 한 방에 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화는 아주 능숙하게 방어와 회피를 하면서 반격까지 했다.
그 모습은 굉장히 멋지긴 한데······.
꼬꼬꼭!
음머어어어!
멍멍멍!
월월!
곰의 뒤편에는 호크가 회를 치며 부리로 곰의 엉덩이를 쪼고, 옥스는 작은 뿔로 들이는데다, 실버는 멍멍 짖고 물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골드는 응원하듯 월월 짖고만 있으니, 시화의 전투에 비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타앙 탕 탕!
10초의 장전 시간 때마다 나와 미나, 지혜는 화승총을 쐈고, 대부분은 곰의 커다란 덩치 덕분에 쉽게 명중했다.
하지만 위력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현실의 그리즐리 베어는 현대식 총기에 사격 당해도 버틴다고 하는데, 그런 그리즐리 베어보다도 2배 이상 커보이는 곰탱이에게 중세식 머스킷은 효과가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일단 가죽에 총탄이 박히고는 있는 것 같은데, 실질적으로 대미지를 주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일도양단!”
꾸워어어엉!
“건곤대나이!”
꾸워옹!
“아수라의 일격!”
크아앙!
뭔가 대단해 보이는 스킬들을 작렬시키는 시화였고, 종국에는 검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서리기도 했다.
곰은 그걸 막기도 하고, 검에 베여서 상처 입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불타는 검에 베인 것은 치명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곰은 죽지 않고 대단히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꾸와오오옹!
“큭!”
갑자기 곰이 시화에게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다.
시화는 그것에 부딪혀 튕겨나가면서도 멋지게 낙법으로 굴러 다시 일어났지만, 문제는 곰의 어그로가 튄 모양이었다.
나한테로 말이다.
꾸오오오오옹!
“이런!”
내 쪽에는 지혜와 미나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두 사람에게 피하도록 했다.
지혜는 조금 겁을 먹어 도망치지 못 했는데, 미나가 그녀를 데리고 피했다.
곰의 타겟은 확연하게 나인 것 같았는데, 나는 정면으로 그것에 맞서야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곰을 만나면 도망치는 것은 무리라고 하지 않던가?
물론 맞서싸우는 것도 무리인 건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여하튼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마법공학 톱날검을 꺼내들었다.
위이이잉!
마력동력에 의해 톱날검의 톱날이 회전했다.
그리고 곰이 지척까지 돌격해왔다.
그 순간 생각난 건 우스꽝스럽게도 이런 거대한 괴수를 잡는 게임이었다.
이름이 몬스터 슬레이어였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하튼 그 게임에서 사냥꾼들이 돌격해오는 괴수들의 공격을 피해 구르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최대한 그것과 비슷하게, 돌격을 당하는 찰나에 옆으로 굴렀다.
물론 멋지게는 못 굴렀고, 거의 그냥 엎어지다시피 한 것이다.
꾸워엉!
하지만 요행으로 곰의 공격을 피하긴 했나보다.
곰은 반동 때문에 잠시 멈칫 했는데, 나는 어영부영 일어나서 곰의 다리를 톱날검으로 썰어보려고 애썼다.
키기기기기기기기긱!
분명히 가죽인데 철을 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톱날검이 통하지 않아서 기겁하면서 물러나면, 곰은 어느새 내 앞에 흉흉한 기세로 서 있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쪽이다.”
하지만 그때, 곰의 어깨 위로 도약해 착지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시화였다.
시화가 어깨 위에 오르자마자 곰은 날뛰면서 그를 떨어트리려고 애썼는데, 시화는 능숙하게 그 목살에 검을 꽂아넣고 버텼다.
몇 번은 곰의 팔을 피해 다시 점프하고 착지하는 걸 반복하면서 곰의 얼굴과 목을 집중 공격했다.
촤악, 촤아악! 써컥!
그는 마치 판타지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놀라운 공격을 보이면서 3합만에 곰의 목을 베어버렸다.
목에 검을 꽂은 뒤, 검을 돌리듯 뽑아내어 잘라버린 것이다.
잔혹한 광경이었으나, 갑옷을 입고 있단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곡예였다.
설령 가벼운 차림이었어도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후우······ 끝났군요.”
시화는 목이 잘려서 축 늘어진 곰의 몸뚱이와 바닥을 뒹굴고 있는 목을 바라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열심히 화살을 쏴서 지원하던 엘프 전사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대단하군, 어떤 엘프 전사도 그대처럼 싸우긴 힘들 걸세. 이걸로 우르사이가 구원을 받은 것이었으면 좋겠군.”
엘프 전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곰의 몸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곰의 몸이 연두색의 아름다운 빛으로 산화되었다.
그리고 반투명한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역시 거대한 곰의 모습이었다.
-고맙다······.
아마도 그 곰의 영혼이었을까?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엘프 전사들은 그의 죽음의 슬픈지 눈물을 조금 흘렸다.
“우리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주었군. 전리품인 우르사이의 정수는 그대들이 가지게나. 부디 좋은 곳에 써주게.”
엘프 전사의 말에 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곰의 영혼과 육체가 사라진 곳에 남은 ‘정수’를 인벤토리에 챙기는 시화였다.
“장로님에게 돌아가도록 하지. 이제 그대들은 우리의 환영을 받을 자격이 있네. 분명 그대들이 원하는 보상도 얻을 수 있을 거야.”
엘프 전사가 돌아갈 것을 종용했고, 우리들은 수긍하면서 그를 따라 엘프 마을로 돌아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멋진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 우리들이 가는 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노루를 보았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초식동물이나 육식동물을 가리지않고 모였다.
그들은 울음소리를 내고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마치 우리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 같았다.
꼭 디X니의 ‘사자왕’이라는 만화영화가 생각나서 흥미로웠다.
물론 여긴 사바나가 아니라 숲속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얼마지 않아 엘프 마을로 돌아왔을 때였다.
“정말이지 고맙네, 이방인들이여. 우루사이가 영면에 잠든 것은 슬픈 일이나, 차마 우리 엘프와 숲 속의 수호자들은 하지 못 했을 일을 그대들이 대신 해주었네. 그러니 보상을 해주어야겠군. 세계수의 뿌리가닥이 필요하다고 했나?”
“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일세. 어떠한 대가도 없이 주겠네. 이번 한 번에 한정할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장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를 ‘세계수’로 안내했다.
그에게 부탁하여서 뿌리가닥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너무 거대해서 벌목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세계수에 도착했다.
“세계쑤 아우루라님, 숲의 일족에게 은혜를 입힌 자가 아우루라님의 뿌리가닥을 원하옵니다. 부디 작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 거대한 나무앞에서 장로 엘프가 말하니, 나무에 주변에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작은 빛들이 무리 짓더니 빛이 사라지자 허공에 신비해 보이는 ‘뿌리가닥’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의 뿌리가닥이라고 해서 혹시 거대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보통 나무의 뿌리가닥 정도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은은한 빛이 난다는 점이었다.
장로 엘프는 그것을 받아들어 세계수에 예를 표하곤 그걸 나에게 가져왔다.
“자, 받게나. 부디 좋은 곳에 쓰게. 세계수의 힘이 악용되어선 안 될지니······.”
흠, 좋은 곳에 사용하라라······ 이걸로 전쟁 병기를 만든다고 하면 화를 낼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곤 그것을 받았는데, 장로 엘프가 말했다.
“그리고 양잠의 재료가 필요하다고 했었나?”
“예, 뽕나무 씨앗과 누에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그냥 비단을 사가지, 왜 번거롭게 양잠재료를 찾나?”
“제가 농부라서 직접 하는 것을 좋아해서 말이죠.”
“흠, 보통 이방인들은 모험을 하면서 살육을 하기 바쁜 걸로 아는데, 자넨 조금 다른 모양이군. 어쨌든 양잠 재료는 적당한 대가를 치르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네.”
“화폐거래보단 물물교환을 선호한다고 들었습니다. 무기나 보석, 음식이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다네, 혹시 우리와 지속적으로 거래하고 싶다면 그런 물품들을 가져오거나 만들어주면 될 걸세.”
“혹시 음식으로 해도 될런지요?”
“나쁘지 않다네. 다만 맛이 있어야하겠지만. 우린 아쉬운 것 없다네.”
무기는 총이 적당할 것 같은데, 총은 수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장간을 업그레이드해서 양산 체제를 만들기 전엔 뭔가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보석도 지금은 수량이 얼마 없고, 남은 것은 지참한 작물들로 요리를 하는 것 정도였다.
돈을 지불하는 거라면 더 편하겠지만,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혜야, 그럼 어디 한 번 맛있는 거 만들어 볼까?”
“네!”
나는 지혜에게 물어봤고, 지혜는 해맑게 대답했다.
식전 운동도 했으니 맛난 거 먹고 쉴 때가 되었다.
< 185화 어쩐지 간에 좋을 것 같은 녀석(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