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11일차 선술집 종료 >
“괜찮은 공연이었구먼, 아니······ 괜찮은 수준이라고 말하면 조금 실례인가, 미나양?”
“호호, 그 정도로도 충분해요 어르신.”
“공진군도 연주가 대단히 좋았네, 그것도 스킬의 힘이었나? 그래도 겉보기엔 만돌린을 직접 연주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스킬이긴 합니다만 리듬게임 같은 시스템이라 직접 현을 튕긴 겁니다. 다행히 제가 리듬게임은 좀 해서 가능했습니다. 현실의 연주난이도보단 낮은 편인 것 같습니다.”
“그 정도라면 나도 연습하면 연주가 가능하겠구먼. 어쨌거나 둘 모두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처럼 연주했네. 보기 흐뭇할 정도였군.”
노래와 연주를 마친 나와 미나에게 블루스 노인이 지긋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와 미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 저기······ 내일은 제가 노래해볼래요!”
“응?”
그때 뜬금없이 지혜가 그런 말을 했다.
“그때도 오빠가 연주해줄 거죠?”
“아, 뭐······ 안 될 건 없지. 무슨 노래 부르고 싶어? 플레이 목록에 있으면 연주는 가능할 거야.”
“내, 내일까지 생각해 올게요.”
“알았어.”
뭔가 의욕적인 것 같은 지혜의 모습에 빙그레 웃었다.
나 뿐만 아니라 블루스 노인이나 미나, 그리고 드래곤씨까지 그런 모습이었고, 그러자 지혜는 낯간지러운 모습이 되었다.
“그럼 내일은 나도 악기 하나 사서 합주해볼까?”
“아, 그것도 좋겠다.”
“허허, 나도 한 번 해보면 재밌겠구먼.”
“어르신도 함께 해주신다면 영광입니다.”
“끌끌, 자넨 정말 말주변이 좋군.”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나와 블루스 노인도 같이 연주하려는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흠, 그래. 흥이 오른 나머지 오늘 하려던 말을 잊고 있었군. 시화군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 클라드 마을이란 곳의 일로 그는 바쁜 모양이군?”
“네, 아마 지금도 자경단원들을 훈련 중이라 바쁜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어르신?”
“산통 깨는 이야기긴 하지만 밀레스 쪽이 이제 본격적으로 심상치 않네. 원래부터 침략은 예고되어 있지만, 아주 조만간 쳐들어올 기세더군.”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군요.”
“그렇지······ 반면에 자넨 이 영지에 많은 것이 걸려 있다네. 자네는 별 욕심이 없어 보이지만, 엄밀히 말해선 이제 자네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군신 길드도 걸려있고, 그룹의 이익도 걸려있지.”
“그렇습니다만,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음······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요.”
“도움이라······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것 같으니, 뭐든 동원해야하지. 뭘 할 수 있겠나?”
“레거시 퀘스트를 완료한다면 꽤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흠, 그런가? 진척사항은 어느 정도인가?”
“확인해보겠습니다.”
나는 즉시 퀘스트창에서 레거시 퀘스트의 진척을 확인해보았다.
[퀘스트, 창조주의 유언
당신은 창조주가 남긴 유산을 가질 자격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창조주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창조주가 남긴 유산을 쫓고자 한다면 이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바꾸십시오.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해도 상관없습니다.
클리어 조건 : 퀘스트를 받은 시점에서 게임 내 50%의 유저들이 생활 스킬을 가지도록 유도.
클리어 보상 : 100,000,000 업적점수, 창조주의 유산
클리어까지 진척률 : 51/100%]
“오, 많이 진척됐네요. 51%나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인즉 이제 유저의 25%이상이 생활 스킬을 배웠단 말이군.”
“네, 기대 이상으로 빠른 속도입니다. 다만······ 침략을 받기 전에 완료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음, 내가 알기로 오늘 CF를 찍었을 텐데. 최고의 팀이 붙어서 오늘 내놓을 수 있게 한 걸로 알고 있네. 그렇게 되면 또 홍보효과가 좋겠지.”
“크, 크흠. 그······ 다소 부끄러운 경험이었습니다. 미나는 연예인 지망생이라지만 저는 그런 것도 아닌데, 괜히 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흐흐흐, 좀 더 자신감을 가지게. 그리고 마케팅 전략은 그걸로 끝이 아니야. 자네도 영업과니까 잘 알겠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것이라네. 스타를 불러서 게임을 시켜본다든지, 언론 인맥도 활용해볼 거고, 뭣하면 회장이 직접 농사나 낚시를 하는 영상을 올려보는 것도 좋겠지. 대한민국 간판 재벌이 하는 일이라면 따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거야.”
블루스 노인은 별 거 아니란 듯이 말하지만, 하나같이 스케일이 커다란 말들이라서 대화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문득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참, 어르신. 그것 말고도 영지를 지킬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뭔가?”
“그게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게······ 이런 것입니다.”
나는 마장기 ‘마일스톤’의 제작 카탈로그를 블루스 노인에게 보여주었다.
그걸 보자 블루스 노인은 “오호.”하고 놀라는 눈치였다.
“마장기라······ 거대 로봇이군. 두 말할 것도 없이 강력해 보인다네. 헌데 문제라면 만드는 재료와 요구 스킬인가?”
“예, 요구 스킬이야 마법공학 정도만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지만······ 문제는 드래곤하트라든가, 세계수의 뿌리가닥, 축성받은 마일스톤······ 이런 것은 어디서 구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드래곤하트는 말 그대로 용을 잡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도전해볼만한 것은 빙룡 쿠샬이 있겠군.”
“아······ 시화씨가 말해준 적 있습니다. 노슬론 마을 쪽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네. 어디 한 번 시화군과 도전해보자고 해야겠군.”
“저 때문이라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실 필요는······.”
“자네 때문만은 아니야. 이제 우린 운명공동체인 셈이니, 나나 우릴 위해서라고 하는 편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지. 그러니 마음을 쓸 것 없네.”
블루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곤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말을 계속 이었다.
“그리고 아우루라의 뿌리가닥은······ 일단은 세계수가 있는 곳에 가야겠지. 호랑이 수염이 필요하면 결국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할 것 아닌가?”
“그곳이 호랑이굴만큼이나 위험한 곳입니까?”
“하하, 다행히 그렇지는 않다네. 하지만 꼭 환영 받는 곳도 아니라고 해야할까나······ 왜 있잖나, 꼭 무슨 판타지에선 세계수는 엘프가 돌보고 엘프들은 사람들에게 배타적이란 거. 그런 상황이지.”
“······알 것 같군요.”
판타지의 환경운동가들인 엘프들이 연관되어 있나보다.
그런 이들에게 세계수의 뿌리가닥 좀 달라고 하면 기꺼이 들어줄까, 아니면 화를 내면서 활을 쏴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은데도 생각은 어쩐지 후자에 기우는 듯했다.
내 안의 엘프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평화로운 사람들은 아니구나······.
“성배의 경우는 호수의 여신에게서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건 다행이로군. 그래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낀 것인가?”
“예, 여전히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많은 것 같지만요.”
“그럼 남은 것은 축성 받은 마일스톤 정도로군. 그건 아마도 밀리아리움 성국에서 구할 수 있을 걸세. 그곳의 교황청에 가서 문의해보면 되겠지.”
“공짜로······ 주진 않겠지요?”
“물론이지. 돈을 요구할지는 모르겠지만, 돈으로 달라고 하면 꽤나 많이 내야할 걸세. 껄껄껄.”
“······.”
어쩐지 판타지의 탐욕스런 성직자의 모습이 떠올라서 불안감을 느꼈다.
뭐,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길 바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흠, 자네가 그런 방법들을 제안했으니 이제 내가 제안을 해야겠군. 자네, 오늘도 시화군에게 제작 재료템을 얻었나?”
“네, 선술집이 끝나면 만들 생각입니다만.”
“그럼 한동안은 경매에 올리지 말고 군신길드의 무기로 사용하기로 하지. 돈은 내가 낼테니 말이야.”
“그런 경우라면 돈은 굳이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아냐아냐, 예외사항이라고 돈을 굳이는 짓을 하면 자네와 군신 길드간의 거래에 금을 가게 하는 짓이지. 최소 개당 5000만은 낼거야.”
“알겠습니다. 어르신.”
어르신의 뜻이 확고한 것 같아서 더 이상 반대하진 않았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선술집이 한산해졌다.
문을 닫을 때가 된 것이다.
“허허, 우리도 이제 가볼 때인 모양이군, 이제 닫을 시간이지 않은가? 나와 이 친구는 그만 가볼 테니까, 잘들 있게.”
“안녕히 가십시오, 어르신.”
블루스 어르신과 드래곤씨는 그렇게 퇴장하였다.
나는 골렘과 정령, 그리고 동물친구들과 함께 선술집을 정리하곤 문을 닫았다.
“주인님, 목화가 모두 자랐습니다.”
“그래? 수확해야겠네. 아, 골렘아. 그런데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뭐든 여쭤보십시오.”
“양잠말이야. 그, 비단 만드는 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양잠은 누에를 사육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뽕나무를 재배한 후, 누에를 길러서 고치를 생산합니다. 상당히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여 농사 9레벨 이상이어야만 가능합니다.”
“일단 농사 레벨은 된다는 거네. 하지만 뽕나무와 누에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세계수의 숲에 있는 엘프들에게서 얻을 수 있습니다.”
“······세계수라, 거기서 또 다른 볼일도 있는데. 잘 된 건지 모르겠네.”
아마도 양잠을 하려면 블루스 노인이 말한 세계수의 엘프들을 만나야하는 것 같다.
어쩐지 힘든 여정일 것 같은데······ 하긴, 그러니 비단이 게임에서도 귀한 것이리라.
“끄응, 그런데 좀 쉴까나.”
선술집을 청소한 후, 나는 기지개를 펴면서 만돌린을 꺼냈다.
그러자 미나와 지혜가 말했다.
“또 연주라도 하게요?”
“응, 작게 캠프파이어 놀이라도 해볼까 해서 말이야.”
“재밌겠어요!”
“자, 그럼 모닥불부터 피워볼까.”
나는 호수 곁의 적당한 곳에 모닥불을 피웠다.
그 곁에 앉자, 미나와 지혜가 양옆에 앉았고, 정령과 동물친구들도 불 곁에 둘러앉았다.
나는 조금 센티멘털한 기분으로 내가 좋아하는 곡 하나를 연주하려 했다.
[악기 연주, Alone
록가수 박완규 옹의 노래. 유명한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의 국내판 엔딩곡이다. 센티멘털하고 그루미한 노래이며 지친 이들이 듣기 좋은 노래이다.
필요한 도구 : 적당한 악기, 악기 연주 Lv1]
연주하기 전에 만돌린 현을 조금 튕기면서 분위기를 잡았다.
그리곤 곧 스킬을 발동해 연주를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예술적인 감각이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감정을 실어서 노래를 불렀다.
이 고전 애니메이션의 엔딩곡은······ 그 재즈스런 주인공의 마지막을 장식해주는 노래라서 내 마음에 꽂혔지만, 동시에 지금은 영혼이 지쳤을 때 들어서 힘을 얻기도 했다.
부르기에 간편한 곡이기도 해서 어렵지도 않았다.
만돌린의 음에 맞춰, 우울하지만 카타르시스를 만들어주는 노래를 불렀다.
다 부르고 나니, 지혜와 미나가 박수를 쳐주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 177화 11일차 선술집 종료 > 끝